남원 교룡산성 : 백제 고룡군의 치소
<2009년 8월 30일>
늦여름 오후에 남원땅을 밟았다. 여름에는 문화재청도 관심이 없어 버려진 무명의 산성을 가기에는 벅차다. 숲풀을 헤치고 깔따구들도 피해야 하고... 거기다 뱀까지 나타나면... 교룡산성은 그나마 여름에도 갈 수 있는 산성일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교룡산성도 정비되어 있지 않고 잊혀진 산성 같다. 이렇게 훌륭한 사적지가 공원화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버려진 것은 자치단체의 무능이거나 관심 밖의 일이라서... 토목공화국에서 자치단체장에게도 이익이 될 복원 사업을 외면한 것은 예산이 부족해서일까? 암튼 전국의 산성을 답사해 보면, 우리의 산성이 훌륭한 관광자원임에도 복원 사업을 벌이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물론 잘못 복원할 거라면 가만히 두는 것도 상책이지만 말이다.
남한에만 고대 산성이 2,000여개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산성국가이다. 이유는 사국(고구려,신라,백제,가야)이 몇백년을 두고 반도에서 영역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한강 유역의 위례성을 잃고 금강 유역의 웅진성, 사비성으로 천도한 남부여는 호남 일대에서 가야 폴리스 정복 전쟁을 벌인다. 일명 남벌의 시작이었다. 그 완성이 곧 지금 남원의 남부여 시대 이름인 고룡군의 성립이다. 고룡군은 백두대간 서부지역에서 가야 폴리스를 몰아내고 백두대간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남부여의 교두보로 볼 수 있다. 현재의 남원 읍성터 자리가 교룡군의 평지성이라면, 교룡산성은 위기시 항거할 산성격이다.
주차시키고 5분쯤 올라가면 동학농민군이 영남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이곳 교룡산성에서 주둔하였다는 기념비가 나온다. 만약 동학농민군이 백두대간인 여원재를 넘어 영남까지 혁명화시켰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최제우의 동학이 영남인 경주에서 발흥하여 백두대간을 넘어 전 호남의 혁명 사상으로 발전하였는바, 어떻게 그 혁명의 물결에서 영남은 반동의 세력이 되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다. 동학의 극좌파인 사회주의자 김개남이 이끈 군대는 결국 여원재에서 영남의 민보군에 패해 백두대간을 넘지 못하였다. 영남의 양반층이 호남의 동학군에 두려워 엄청난 물자를 동원하여 조직한 민보군은 여원재라는 유리한 지형에서 결국 김개남의 기세를 꺾은 것이다. 혁명의 사상을 전파하지 못한 여원재가 못내 한스럽다. 이후 김개남 군대는 전남 일대에서 집강소를 설치한다. 그러다가 우금치 전쟁에서 패한 후 장성에서 붙잡혀 최후를 맞이한다. 전봉준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된 반면, 김개남은 양반층이 보복 차원에서 즉결 처분을 내린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조선 조정의 칼날을 피해 이곳 교룡산에 은거하며 저술과 포교활동을 벌였다. 동학교도들에게 교룡산은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창시자와 실천가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최제우는 은적암에 은거하며 교룡산에 올라 칼노래와 칼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때 불렀던 칼노래 즉 '검가'이다.
교룡산 등산 안내도
남문 근처의 수구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 표지
남문(정문) 출입구, 옹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적이 침입하면 3방향에서 공격이 가능하다.
남문(정문)
성문을 설치하기 위하여 돌에 홈을 팠다.
성 내부에서 바라본 남문(정문)
교룡산성 승장동인 표지
선국사 대웅전
선국사 7층 석탑
선국사를 오른쪽으로 뒤돌아 올라가면 대나무 터널이 나온다. 이곳에서 풀쐐기한테 한방 쏘였다. 지독한 깔따구들!
교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원시내
정상의 송신탑
교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서쪽 방향
교룡산 복덕봉
교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방향, 오른쪽으로부터 노적봉(565.1m), 풍악산(605m), 매봉, 할미성도 아득히 보이고 그 뒤로 왼편으로 문덕봉(599.4m), 고리봉(708.8m)이 섬진강으로 힘차게 뻗어가다 폭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