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7일>
토요일(26일) 월드컵 16강전(우리나라:우루과이) 보자고 해 진주로 갔다. 2:1로 패했지만 만족한다. 다음날 오전 식사를 마치고 대전 가는 길에 하동 고성산성을 둘러보기로 작정했다.
오늘날 진주는 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비로소 거타주로부터 분리되어 청주(菁州)로 불리다가 경덕왕(재위기간 681~691년) 대에 이르러 강주로 개명했다. 고려대에 이르러 오늘날과 같은 진주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신문왕 대 청주는 영현이 둘이었다. 하나가 가주화현으로 오늘날 남강의 지류인 양천강 중상류의 합천 삼가면 일대로 비정되며, 다른 하나는 굴촌현(정덕본(正德本)에는 ‘굴재현(屈材縣)’으로 되어있으나, 주자본에는 ‘굴촌현(屈村縣)’으로 표기되어 있음)으로 역시 남강의 지류로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 하류에 있는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과 진주시 수곡면 일대로 추정된다.
고성산성은 당시 굴촌현의 치소로 추정되는바, 가야 동서루트(남부)와 남북루트(중부)에서 서북으로 조금 치우쳐져 있어 역사적인 주목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역사나 전쟁의 패배자로 지리산으로 은둔할 때나, 섬진강을 따라 남부여로 피신할 때나, 고대 세작들의 험하지만 지름길로 이용되었을 정도다.
고성산성 동문에 도달하기 전 7부 능선 쯤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있어 역사적으로 고성산성이 어떠한 곳인지 명확해진다. 즉 1894년 3월 백산 기포에 이어 5월 서부 경남의 중심지 진주에서도 기포해 7월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진주에서 퇴각한 농민군 5천명은 이곳 고성산성을 중심으로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였다. 10월 14일 고성산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 186명이 전사하고, 농민군은 지리산과 섬진강 유역으로 후퇴하고 만다. 아마 고대 가야도 신라와 남부여에게 패배를 거듭하다가 이곳에서 마지막 일전을 겨루고 지리산으로 은거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하늘도깨비에게 고성산성은 역사의 뒤안길에 선 고독한 군웅들의 마지막 쉼터로 다가온다.
진주에서 2번 국도를 타고 사천 곤명면 소재지에서 19번 군도를 타고 장수고개를 넘어면 하동 옥종면 북방리가 나온다. 고개에 내려서면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산정에 보이므로 찾기는 수월하다.
19번 군도로 가다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동학혁명군 위령탑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으나, 중간 언덕 쯤에 주차하기로 마음먹었다. 주차 후 바라본 동쪽 북방리 들판.
고성산성 가는 길.
지나온 길.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보인다. 모양이 펜촉을 닮았다.
동학혁명군 위령탑
위령탑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고성산성 안내판
내용
동남방
다음은 동학혁명군 위령탑 문이다.
고성산은 고수레당산으로 불린다. 이름 즉 고수레+당=고수레당으로 유추컨대 고성산은 예로부터 이 지역의 제천과 제사의식을 지냈던 신성한 곳으로 사료된다. 다음은 '고수레'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설명이다.
'고수레'는 산과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나 이바지가 왔을 때 음식물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외치는 소리, 또는 그렇게 하는 행위. 흔히 '고시래'라 하고, 강화도 지역에서는 '퇴기시레'라 한다. 이는 신에게 바치는 공희(供犧) 의식인데, 잡신에게 제물을 떼어주고 달래어 쫓는 한편, 먼저 제물을 바쳐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수레는 주언(呪言)과 공희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는 주술이다. 마치 주문(呪文)처럼 "고수레!" 하고 외치는 소리가 곧 고수레다. 또 '고수레하는 행위'에서 보듯, 음식을 떼어 던지는 행위를 일컫기도 한다. 이렇듯 고수레는 언어와 행위를 일치시켜 액을 막고 복을 맞으려는 주술적 관습이다. 고수레의 어원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해동가요(海東歌謠)〉의 시조에 "고스레 고스레 사망(事望) 일게
오쇼셔"하는 구절로 보아, 예로부터 귀신을 쫓을 때나 축원할 때 썼던 관용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수레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 2가지가 있다. 첫째, 고수레는 곡식의 신인 고씨(高氏)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다. 음식을 먹기 전에 곡식을 담당하는 고씨에 대해 먼저 예(禮)를 차린다는 데서 '고씨례'(高氏禮)라 했고, 이것이 곧 고수레라는 설명이다. 둘째, '고씨네' 이야기다. 고씨네라는 여인이 죽어 들판에 묻혔는데, 새참을 먹던 사람이 "고씨네도 먹으라."고 하면서 음식을 떼어주었더니 풍년이 들게 되었다. 이후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고씨네"라고 하면서 음식을 떼어주었고, 이 고씨네가 고수레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들 유래담은 고씨례나 고씨네를 억지로 끌어와 '고수레' 민속에 붙인 민간어원설에 불과하다. (張長植 글, 출처 브리태니커)
위령탑 건립문
위령탑 뒤로 난 고성산 정상 가는 길
3분여 가자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동벽 구간
이곳이 동문터였을까?
우측으로 불분명한 석축의 흔적
고성산 정상 장대지
삼각점. 누구 족이게?
산정에도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아마 동쪽 장대지를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쪽으로 난 산성 내부 산책로
평탄지. 건물터인지는 모르겠다. 평범한 시골 뒷산으로 생각하고 올라왔는데, 산정은 의외로 넓은 규모의 평탄지가 있어 현의 치소로 보기에도 규모면에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북방. 장마전선이 북상하는 바람에 날씨가 흐려 북쪽의 지리산 연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날씨는 흐리지만 의외로 비는 오지 않았다. 오늘 고성산성 답사는 보너스다.
서부 경남의 낮은 평범한 산이지만, 정상은 기묘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여긴 석축의 흔적 같지만...
어찌보면 자연 풍화된 돌 같기도 하고...
안내문을 보니 자연 암벽 구간도 있다고 한다.
석축인가? 자연암벽인가?
자연암벽과 석축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저기 불탄 나무 잔재가 보인다. 전에 산불이 났던가 보다.
산성 내부 산책로 좌우의 소나무들이 검게 거슬린 흔적이 있다. 그런데도 산의 자연 재생력은 위대한가 보다.
평탄지. 고성산성은 내부 평탄지 규모가 매우 넓다. 시골 야산이라고 생각하고 올라왔다가(고성산은 산정의 높이가 186.6m에 불과하다), 역시 산성의 입지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구나 하고 하늘도깨비는 연신 감탄사를 뱉어낸다.
동쪽 북방리 들 뒤 산줄기 아래로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흐른다. 덕천강은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봉에서 발원한다.
남쪽의 사천시 곤명면 가는 길. 19번 군도가 남쪽으로 장수고개를 넘어 곤명면 소재지에 이른다.
평탄지. 기와 조각이 발견되지 않아 건물터로 단정하지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주춧돌을 찾기도 힘들고...
동쪽의 고조고런 낮고 평범한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꿈틀대며 진양호를 향해 가고 있다. 앞선 산줄기 뒤가 진주시 수곡면이다. 수곡면 지역까지 굴촌현 지역으로 사료된다.
석축인지 자연암벽인지 알아 맞혀 보세요!
남방
자연암벽 구간. 남쪽 성벽을 이룬다.
고성산이 고대 수구레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있다. 고성산은 겉보기에는 육산이지만 실제로는 암산이다. 암산은 기도발이 잘 받는다. 고대 제천의식의 신성한 장소로 손색이 없는 산이다. 지리산 발원수인 덕천강 주변에는 명산과 고산이 즐비하나, 해발 200m도 안되는 이 조그만 산이 굴촌현의 치소로 선정된 까닭은 발을 딛는 순간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 굴촌은 고대 삼가라의 일개 촌으로 고성산에는 제천의식을 주관하던 천군이 거주했을터 삼한 연맹체 과정에서 천군은 정치적인 군장으로 성장하였고 그 결과 고성산성의 성주로 이곳에 제단 대신 석축의 산성을 쌓았을 것이다. 이곳은 삼한의 무수한 제사장이 제천하던 소도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이후 가야 폴리스(읍락국가) 일 연맹이 되면서 군장의 산성이 되었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덕천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제법 넓은 비옥한 충적토 덕분이었을 것이다.
다시 서쪽으로 난 내부 산책로를 따라가 본다.
거북 등 같은 자연 암벽이 서북벽을 형성하고 있다.
서북방. 지리산 방향이다.
서북벽의 자연 암벽 구간
참 기묘한 돌들로 가득하다. 한편 고성산은 군데군데 산정에서 보기 힘든 고운 모래흙들이 바위 사이 사이에 있다. 이로 추정컨대 고성산은 태고적에 바닷가였다가 융기하여 산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정에 올라왔는데 해안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평탄지
평탄지. 이곳은 건물터엿음이 분명하다.
서쪽 장대지 부근의 돌탑
동쪽 북평리 들이 제일 시원하게 조망된다.
남방. 뒷 능선은 낙남정맥으로 추정된다.
서방. 구릉 너머 뒷편 중간산이 자태도 고운 옥산(614.2m)으로 보인다.
서남방
고성산성의 서극 지점
서벽도 자연암벽과 석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듯하다.
서쪽 장대지
동방
아! 망개열매. 망개떡을 만들때 망개잎을 싼다.
가시나무 꽃
서남방
남방
남방
동방
서쪽 장대지에서 바라본 동방. 동쪽과 서쪽 장대지 사이는 넓은 평탄지가 있어 굴촌현의 치소 당시에는 제법 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것 같다.
왜? 예쁘서 그냥 찍어봤다. 이름은? 모른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동학농민군 위령탑 뒷면이 보인다.
산딸기 맛을 보았다.
내려오는 길에 찍은 망개 열매. 이렇게 잎의 색감이 발할 수도 있는 건지. 금방 물들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