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성기행/백제 산성

부여 석성산성 : 백제 진악산현의 치소

<2021년 8월 1일>

 

<표제사진 - 석성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2009년 4월 19일>

 

논산에서 4번 국도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 부여군 석성면소재지에 이르러 부여읍의 동쪽 산자락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바로 남부여 수도의 동방 방어선이 된다. 석성면에서 부여읍내 들어가기 직전에 능산리 백제왕릉원이 있다. 1993년 12월 23일 이곳 능사터 목곽 수로안에서 국보 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가 발견되었다.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사터 서쪽 산사면이 바로 남부여 수도 사비성의 외성이다. 이 외성을 방어하는 산성이 북으로는 청마산성, 남으로는 석성산성이 있다.

 

 

 이미지 출처 http://cafe.daum.net/sillaroad/8B7d/121?docid=16NzS|8B7d|121|20081207133739

 

부여 석성산성은 청마산성과 더불어 남부여 제1의 수도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바, 특히 석성산성은 수도인 사비 외성의 남방과 금강변을 방어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당나라군 선단이 금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올 때, 석성산성 때문에 사비성으로 바로 진격하지 못하고 석성산성의 남쪽 산 언저리에서 남부여군과 대치하였다. 자칫 석성산성을 지나쳐 사비성으로 진격하다가 만약 석성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여군에 의해 금강 남쪽이 장악되기라도 한다면 퇴로가 막혀 바로 협공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석성산성의 남쪽 산을 파진산이라 일컸는바, 당나라 군대가 진을 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만약 석성산성이 이곳 파진산까지 펼쳐져 있었다면 당나라 군대의 사비성 진입이 느쳐지고 계백장군도 황산벌이라는 극단의 배수진 전략으로 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만약 나당의 협공 전략을 파괴할 수 있었다면 역사를 다시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저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며 석성면소재지에서 799번 지방도로 빠진다. 벗꽃들이 반갑게 나그네를 맞이한다. 석성산성의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여 탑골마을로 진입한다. 주민에게 산성 진입로를 확인하고 곧장 오른다. 넓은 임도를 따라 10여분 오르니 바로 석성산성의 동문(정문)이 아래로 펼쳐져 보인다. 멋지고 큰 포곡식 산성이다.

 

 

석성산성의 동문(정문)

 

 

석성산성의 동문(정문)2

 

 

 

석성산성의 동문(정문)3

 

 

동문 옆의 부여 석성산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

 

 

 

 

 

석성산성의 북쪽 성곽이 시작되는 곳

 

 

석성산성의 북벽

 

 

 북벽 끝 장수대에서 바라본 금강 일대

 

 

 금강 일대(석성산성의 북방)

 

 

 석성산성의 서쪽 성벽

 

 

석성산성의 서쪽 방어대, 금강이 서향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남부여 수도 사비성으로 진출입하는 선박들을 관찰하였을 것이다.

 

 

 석성산성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석성면 일대가 보인다.

 

 

 석성산성 서쪽 방어대에서 조금 내려와 바라본 금강변

 

 

 금강변

 

 

금강변

 

 

 금강변, 어느 사진이 좋을까 여러 장 찍어보았다.

 

 

 석성산성의 서벽

 

 

 서벽 방어대

 

 

 서벽의 잔재, 세월이 흘러 돌들이 이곳 저곳 흩어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