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1일>
고대 루트는 교역의 루트가 아니라 전쟁과 유맹의 루트이다. 반도에서 고구려의 남하의 본질은 대 가야 정복 전쟁이었다. 고구려는 대 가야 전쟁을 통하여 신라라는 교두보를 설치하고 낙동강 전역을 장악해 나갔다. 하지만 가야의 땅에서 고구려의 대리자로 훌륭한 역할을 해내던 신라가 갑자기 눌지마립간 34년(450) 실직벌 고구려장수 살해 사건을 계기로 등을 돌리자 고구려 남하루트는 고스란히 신라와의 전쟁 루트로 변모한다.
필자는 고구려 주요 남북루트로 죽령루트, 낙동강 상류루트, 동해안루트를 꼽으며 보조 루트로 영주시 부석사 부근의 마구령루트를 상정한다. 이에 반해 신라는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남북루트로 계립령을 중시하여 대 고구려 공세에 맞섰다.
신라와 고구려간의 남북루트는 4개의 간선과 1개의 지선을 가진 전면적인 전쟁 루트이다. 점차 동해안 루트에서 신라가 우위를 확보하자 고구려는 백두대간 루트에서 신라에게 공세를 취한다. 하지만 역사는 신라의 우세로 결정났다. 즉 신라는 계립령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측면을 파고들며 고구려의 죽령 루트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를 백두대간과 남한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고구려의 적산현을 차지한다. 적산현은 지금의 단양군 단성면 일대로 적성산성과 적성비는 당시 신라의 남한강 진출에 대한 기념물과 기념비라 할 수 있다. 적성비의 건립 연대가 545-550년으로 추정되는 걸로 보아 신라는 6세기 중반 경 백두대간을 넘어 남한강 상류 지역을 장악한 듯하다.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 국보 제198호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인용>
지난 7월 10일 필자는 의성 금성산성 답사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면서 '고구려 남북루트'를 떠올리며 죽령루트를 따라가 보기로 하고 근처에서 숙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왠걸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그래도 하루 숙박한게 아까워 무작정 죽령루트를 향해 출발했다.
숙소는 군위군 효령면 관동유원지 근방이었다. 숙소 남쪽의 위천. 위천은 경북 중부지방을 동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사행하며 서쪽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위천과 그 지류는 옛 소문국의 원향이다.
위천
병천교와 안개에 가려진 적라산(352.1m). 적라산 일대는 소문국과 친연관계에 있는 적라국의 원향으로 추정된다. 소문국과 적라국은 경주김씨의 이동 경로상에 있어 경주 김씨 세력이 사로국으로 진입하기 전에 실력을 키운 태토(胎土)로 여겨진다.
위천 북쪽의 군위 성리산성
성리산성 아래 작골마을
안개가 걷히자 성리산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죽령루트는 지금의 5번 국도와 궤적을 같이한다. 필자는 죽령루트 상의 고구려 유적들을 답사하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다. 경북 중부와 북부 지역에는 고구려적 요소를 지닌 유적들이 상당 수 잔존하고 있다. 특히 탑으로 종종 오인되는 적석유구를 답사할 생각이다. 적석유구는 고구려 적석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차이점은 불교식 장례를 따르면서 실제 고분의 성격은 사라지고 의례적인 무덤으로만 기능한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그리고 후대에 탑의 기능으로 변모했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경주 김씨 일파도 최초 고구려 군사 세력으로 남하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낙동강 중상류 일대의 가야 폴리스들을 정복한 후 자치를 실현하며 힘을 축척한 것 같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로국을 정복하고 낙동강 일대의 강자인 신라를 개창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를 보면 경북 북부 일대가 한때 고구려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동삼거리에서 5번 국도를 타고 군위를 지나 의성읍에 이르러 912번 지방도로 좌회전하면 의성군 안평면 소재지 가는 길이다. 고개 하나를 넘어면 신월리이고 다음이 석탑리이다. 석탑1리 버스주차장 맞은 편 길로 우회전하면 석탑리 방단형적석탑 가는 길이다.
석탑리 방단형적석탑 가는 계곡 전경
입구 바위절벽
입구
이정표
의성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 전경
안내문에는 한국 석탑의 기본형과는 다른 유형이라고 한다. 필자는 최초에는 석탑이 아니라 고구려 적석총이 경북지역에 들어와서 변모한 것으로 추정한다. 불교의 영향으로 고분의 기능은 사라지고 후대 탑으로 재창조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필자는 경주 김씨의 남하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감실과 석불. 의성 석탑리 적석유구는 사면에 감실을 두고 석불을 안치해 놓았다.
서쪽(후면) 감실에는 석불이 비어 있다.
북서쪽 모퉁이는 1층이 허물어져 있다.
북쪽은 감실도 무너졌다.
동쪽(정면) 감실과 불상
동쪽(정면) 부분의 적석유구
북쪽(오른쪽 측면)의 적석유구. 감실도 무너져 흔적만 보일 뿐이다.
적석유구는 최초에 적석총이었다가 후대에 석탑으로 재창조되었을 것이다.
의성 안평면 석탑리 적석유구를 보고 보물 제57호인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오층석탑을 보러갔다. 조탑동오층석탑은 고구려식 잔존 유적은 아니지만, 죽령 루트 상에 있어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의성읍에서 안동 방향으로 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일직삼거리에서 남안동 나들목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조탑마을이 나온다. 오층석탑은 조탑마을의 평지에 서서 그 누군가를 천년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동 조탑동오층석탑 (보물 제57호)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基壇)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5∼6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龕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塔身)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이 탑의 체감 비율은 지붕보다 몸돌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점과 5층 몸돌이 너무 큰 것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부분적인 보수를 거치는 동안 창건 당시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인용>
동면에서 바라본 5층석탑
남면에는 감실(龕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인왕상은 호국불교의 상징이다.
인왕상(좌)
인왕상(우)
감실을 들여다 보기라도 할라치면 이놈들이 꼭 뒤통수를 갈길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없지. ㅋㅋ
감실 내부
북쪽의 조탑마을
5층석탑과 조탑리 계곡
안동 시내를 우회해서 안동시 북후면 소재지까지 치달았다. 북후면 소재지에서 자장면 한그릇하고 5번 국도를 비켜 학가산 가는 고갯길로하여 영주시로 진입하였다. 아마 고대 죽령루트는 학가산 가는 고갯길이었을 것이다. 준비없이 온 길이라 고대 교통로를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북후면 석탑리에 적석유구가 있는 걸로 보아 석탑리 가는 길이 죽령루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북후면 소재지에서 5번 국도와 작별하고 928번 지방도로 좌회전하면 학가산 가는 고개길이 나온다. 큰두무재.
큰두무재부터 928번 지방도는 산복(산의 배부분)도로이다. 산의 5~6부 능선을 타고 계곡 3개와 고개 2개(비내고개와 방우재)를 넘어면 학가산 아래 북후면 신전리가 나온다. 신전리 아래 동네가 바로 적석유구가 있는 석탑리이다. 방우재를 넘어면 학가산(870m)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보호수와 적석유구
북후면 가는 928번 지방도
고추밭 뒤로 북후면 석탑리 적석유구가 보인다.
정식 문화재명은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이다.
필자는 의성 안평면 적석유구와 같이 이곳 안동 북후면 적석유구도 고구려의 잔존 유적으로 추정한다. 두 유적의 공통점은 고대 죽령루트 상에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남하 세력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유적이며, 필자는 다시 언급하지만 그 남하세력이 경주 김씨 세력으로 추정하고 있다.
적석유구 옆의 석탑사
적석유구 옆의 보호수
백두대간 남쪽의 적석유구는 안동, 의성 뿐아니라 문경, 산청, 울산에도 분포해 있다. 이러한 적석유구는 고구려가 한때 낙동강 전역까지 진출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유적뿐 아니라 북위 내지 북위 양식의 불상(유물)도 출토되어 이러한 추정이 막연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즉 동해안 방면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의 태화 13년(489년)명 삼존석불상이나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상류지역인 경남 의령군 대의면의 연가 7년(539년)명 고구려 금동불상은 고구려 요소가 낙동강 전역에 두루 미치고 있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적석유구 북면
보호수
석탑사
적석유구 옆의 등산로 가는 길
북후면 석탑리 적석유구에서 영주로 가다보면 석탑교가 나온다.
석탑교 아래 내성천.
백두대간 남쪽에서는 학가산과 내성천 이북이 비교적 오랫동안 고구려 지배를 받은 곳으로 보인다. 영주 일대는 고구려 나이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를 보면 백제의 나이군으로서 사로국 파사왕이 이를 빼앗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지금의 영주 일대가 고대 삼국의 각축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석탑교 지나 내성천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영주 시내로 진입하다 보면 내성천과 서천이 합강하는 지점 부근의 무섬 마을을 지나게 된다. 무섬마을은 일명 물섬마을이라고도 한다. 내성천과 서천이 삼면을 막고 나머지 한면은 산이 가로막아 내륙의 섬처럼 고립된 곳이 무섬마을이다.
무섬 들어가는 다리
다리 아래의 내성천 하류
내성천 상류
무섬마을
해우당 고택
안내판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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