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1일>
<표지 사진 - 도산서원 전교당>
사월 봄 어느날, 빛고을 박 박사님으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요지인 즉 성리학의 도맥을 찾아서 서원기행을 하자는 것이다. 하늘도깨비 답왈 "콜". 그렇게 서원기행이 시작되었다.
서원기행은 한국 성리학의 맥을 찾는 답사다. 아무래도 답사의 시작은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회헌 안향이 세운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거나 중시조격인 점필재 김종직의 예림서원이겠지만, 짧은 일정이므로 일단 주마간산식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으로부터 서원기행은 시작되었다.
한국 보수의 두 줄기 근원은 서인과 남인인데, 그 종장은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이다. 율곡과 퇴계는 한국 보수의 양대 시조로 평가할 만하다. 율곡이 오천원짜리, 퇴계가 천원짜리 지폐의 주인공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올 2월 정치학 박사 논문을 통과한 박 박사님은 학문의 중압감에서 해방되었는지, 얼굴이 밝아보여 좋았다. 만사 건승하시길...
도산서원 가는 길
운영대에서 바라본 동쪽의 천연대. 그 아래로 칠백리 낙동강이 흐르고...
운영대에서 바라본 시사단
운영대
왕버들 고목
열정
도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의 진도문
진도문 좌측의 광명실
우측 광명실(서고)
광명실 옆면
진도문을 들어서면
전교당이 나오고...
도산서원 현판도 보인다.
박약재(동재)
홍의재(서재)
박약재(동재)
전교당(대강당). 현판의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고 한다. 일설에는 한석봉이 관직이 일천하여 스스로 도산서원의 현판 쓰는 것을 거절할까 염려하여 선조가 한석봉에게 도산서원을 각자하여 쓰라 명하고 합한 것이라고도 한다. 한석봉이 원자와 서자를 쓰고나서 서원 현판이란 것을 직감하고 글쓰기를 멈추었는데 선조가 도산서원이라고 이르자 산자와 도자는 마음이 위축되어 글솜씨가 발휘되지 못했다고도 한다. 참고로 이 일화는 들은 애기라 확실치는 않다.
전교당 대청 뒤 쪽마루
상덕사 부 정문
전사청
상고직사
옥진각
외국학자들의 퇴계에 대한 평가
신기독. 홀로 있게 되면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기 쉬우므로 늘 조심하라는 뜻이다.
무불경.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보수의 뿌리에 대한 단견
퇴계의 가르침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특성을 갖고 있다. 즉 신기독(愼其獨)과 무불경(無不敬) 사상이 자신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남인은 정치사상적으로 너무 소극적이었다.
서인이 동인의 강우학파(남명 조식의 제자들과 호남 유림으로 훗날 북인을 형성)를 공격하고 학살한 정여립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강좌학파(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훗날 남인을 형성)들은 침묵함으로써 이후 조선 성리학의 건강한 지성사는 사라지고 기회주의와 당파주의 및 상잔의 잔혹사로 점철되었다.
자칭 사류(士流)라는 서인들은 실제는 탁류의 무리로 한국 보수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양란 후 이덕일 박사의 책제목처럼 '그들의 나라'로 만들고 세도정치라는 봉건 착취의 최고 정점의 정치체제를 완성한다. 서인의 많은 후예들은 일제하에서는 이씨왕가와 더불어 친일파로 전락하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을 위시하여 친미그룹을 형성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였으며, 516 이후에는 군사 독재에 기생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강고한 기득권을 형성한다.
한국 보수 세력은 정여립 사건 후 4백년 이상이나 지속되어온 기득권이라 연원도 깊고 세력 또한 광범위하여 어지간한 정치개혁으론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새누리당의 집권은 우연이 아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그나마 건강했던 사회의 기풍이나 나라의 국풍이 지금처럼 혼탁해진 것은 한국 보수의 반격과 반동에 기인한 것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들인 남인들은 그런 면에서 비겁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여립 사건과 인조반정 이후 남인들은 스스로 서인들과 더불어 탁류의 흐름에 동참하고 말았다. 서인 우위의 정권 하에서 국왕들의 정치 노름에 피로써 피를 씻는 상잔의 역사는 어쩌면 자업자득일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사론이 다소 과격하나 그 대개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도산서원을 나와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퇴계종택으로 향했다.
퇴계종택 정문
추월한수정
퇴계종택을 나와 차로 3분여 거리에 있는 퇴계 묘소로 향한다. 주차시킨 후 박 박사님께선 트렁크에서 포도주 한 병을 꺼낸다. 포도주가 제주(祭酒)란다. 역시 우리 박 박사님에겐 특별한 뭔가가 있다. ㅋㅋ
퇴계 묘소 오르는 길
퇴계 선생 며느리이신 봉화금씨 묘소. 돌아가시고도 바로 밑에서 고매한 시아버님이 부르기라도 하면 수발을 들어야 하니 피곤도 하시겠다. 대단한 효부라는 생각이 얼핏 든다.
퇴계 이황 선생 묘소
제단에 적포도주 올리고 재배를 하니 역시 박 박사님이시다.
퇴계 묘소에서 안동 시내 들어가는 길에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이정표가 있어 찾아갔다.
초파일이 얼마남지 않아 연등이 꽃처럼 걸려 있다.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한다. 제비원은 성주풀이의 발상지이라고 한다. 석불에는 전설이 하나 내려오는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칼로 석불의 목을 내리쳤다는 것이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기에 임란 때 구원군 장수로 온 이여송이 석불의 목을 내리친단 말인가? 상상력이 발휘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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