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4일>
<2010년 5월 8일>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근거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수 많은 방어성들의 존재다. 우금산성은 장기 옹성으로서의 가치는 크다. 물론 고려나 조선조에도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내륙 깊숙히 장기 옹성을 쌓은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우금산성을 이 같은 목적으로 축조한 사실은 없다. 만약 조선조에서 전주도호부가 와해된다면 이 지역의 장기 옹성은 변산반도의 우금산성이 아닌 완주군 소양면의 위봉산성이 될 것이다. 따라서 장기 근거지로서 우금산성이 어느 시절 중시되었을까? 아무래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남부여 부흥 전쟁이 전개되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금산성이 남부여 부흥 전쟁 시절 도성이었다면, 이곳으로 들어가는 교통로를 추적해보면 도성으로서의 그 입지를 그려볼 수 있다. 먼저 수로(해로)를 보면 적어도 왜와의 교통은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 축조로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는 어귀가 곧 육지로 변모할 예정이지만, 계화도 간척 사업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부안군 상서면 고잔리 목포 마을이 포구였다. 목포와 우금산성의 직선 거리는 대략 3.5Km 정도로 매우 가깝다. 따라서 남부여 부흥전쟁 시절 목포는 남부여 최대의 항구로서 기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목포는 서해상에 있었지만, 고대의 내륙 하천이 지금보다 유량이 풍부한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지금의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 사산저수지까지도 접근히 가능했으리라. 우금산성의 계곡 동남쪽 끝자락에 사산저수지가 있어 수로면에서 우금산성은 더할 나위 없는 입지로 보인다.
육로면에서는 우금산성 근역이 반도 중부권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동서루트의 서해 최종 기착지라는 점이다. 즉 우금산성 근역이 옛 대가야 낙동강 항구였던 고령군 개진면 개포에서 서해 항구였던 부안군 변산면 격포로 이어지는 대가야 동서루트의 서극점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남부여 5방성 중 하나인 중방성으로 추정되는 고사부리성(성황산성)과 고사부리성의 장기 농성인 금사동산성과 지근거리(동진강 지류인 고부천 건너편)에 있어 남부여부흥전쟁의 토대를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볼 소지는 다분하다. 물론 충남 홍성군 장곡면의 석성산성(일명 얼방성)도 내포의 풍부한 물자와 임존성과 지근거리에 있어 남부여부흥전쟁의 물적 토대면에서는 유력한 주류성 후보군이다. 그런데 초기 남부여부흥운동을 주도한 곳이 흑치상지가 주도한 금강 이북의 임존성이라면, 흑치상지가 항복한 후 주된 남부여부흥운동의 중심지는 금강 이남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특히 왜의 군사 원조를 감안한다면 수로가 유리한 우금산성이 주류성으로서 남부여 최후의 항전지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어 보인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회포마을 부근에서 바라 본 백산성
백산성은 동진강 어귀에서 조금 들어오면 보이는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동진강 평야 지대에 솟은 구릉 대부분은 큰 암석으로 이루어져 침식작용이 인근 지역에 비해 덜 진행된 것이다.
백산성은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우금산성과 남부여 중방성인 고사부리성으로 들어가는 고부천과 동진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어쩌면 고부천 어귀와 동진강 어귀가 서해와 맞닿아 있어 고대에는 이 두 강을 통괄하는 산성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부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읍시 영원면 앵성리 수성마을이 나온다. 수성마을은 이름 그대로 물의 성이다. 즉 고부천가에 성을 쌓고 남부여 중방성으로 추정되는 고사부리성의 항구였을 것이다. 앵성리 수성이 고부천의 방어성이었다면, 백산성은 동진강의 방어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부여부흥전쟁 당시에는 백산성이 본의 아니게 남부여군의 북방 최전선에 위치했을 것이다. 물론 사비성 진공작전에 의해 피성으로 도성을 옮겼을 때는 피성의 남방 방어성이 되었겠지만.
백산성 안내판. 백제의 왕자 부여 풍이 일본의 구원군 맞이한 곳이 백산성이라고 한다.
백산성 입구. 전농부안군농민회에서 걸어 놓은 동학농민혁명 백산봉기 116주년 기념 플랭카드가 눈길을 끈다. 백산성이 다시 역사의 주 무대로 등장한 것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이다. 고대에는 일본의 전신인 왜의 구원군이 전멸당했다면, 근대에는 거꾸로 일본이 반도의 농민군을 학살한 지역이다. 반도와 열도의 물고 물리는 원한관계! 미래에는 어떤 식으로 결말을 볼런가?
백산성 구릉은 내부가 큰 암석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백산성 입구의 큰 바위들.
입구에서 바라본 백산성 동벽
출입구 난 곳이 백산성 동문일 걸로 추정된다.
백산성 동문 출입구에서 바라본 동북방 들판.
북쪽의 동진강이 시야에 들어 온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가 구 30번 국도의 동진강상의 군포교.
남쪽으로는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의 두승산(443.5m)이 동진강, 고부천 유역의 호남벌을 의젓하게 굽어보고 있다.
두승산 앞산은 금사동산성이 있는 산줄기로 남부여 중방성인 고사부리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동북방의 동진강
신 30번 국도가 백산성의 동방을 지나고 있다.
백산성 오르는 길.
남쪽으로는 두승산과 앞으로 금사동산성이 있는 산줄기가 보인다.
백산성 정상의 평탄지.
백산성 남쪽 산구릉. 남서방으로 멀리 부안의 변산 줄기가 보인다. 우금산성이 있는 곳이다.
동북방의 동진강 물줄기. 동진강 너머 보이는 산줄기 중에서 제일봉이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와 정읍시 신태인읍 청천리 경계에 있는 명금산으로 산성이 있다. 명금산성은 피성의 남방 방어성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북녁으로 동진강 지류인 원평천 어귀에 소재한 김제시 죽산면 소재지가 보인다. 죽산면 소재지에는 죽산리 산성이 있어 피성의 동방 방어성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동학혁명 백산 창의비
백산창의비 앞에서 바라본 남쪽의 두승산
정읍천과 동진강이 합강하는 정읍시 이평면에는 만석보가 있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들판이 넓어 쌀 산출량이 높았다. 그러나 평야지대인 관계로 큰 산이 없어 농사 지을 물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고대부터 김제에 벽골제가 있었다. 만석보는 이름 그대로 쌀 만석을 산출할 정도로 관개가 풍부한 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고을 군수가 과거 등 실력보다는 매관매직에 의해 부임하였다. 특히 고부군수 자리는 곡창지대에 위치하였으므로 비싼 편이었다. 역시 많은 돈을 주고 고부 군수 자리를 산 조병갑은 본전을 뽑기 위해 만석보에다 가혹한 세금을 매기자, 1894년 2월 동학의 고부접주인 전봉준은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해산하였다. 이후 고부농민봉기의 주모자 및 가담자를 탄압하려 하자, 4월 김기범, 손화중 등과 함께 무장현에서 창의문을 발표하고 이곳 백산성에 모여 동학농민전쟁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모였던지 농민군이 앉으면 죽창이 대나무 산 즉 죽산을 이루었고, 서면 농민군의 흰옷만이 보여 백산이 되엇다고 한다. 그래서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 하였던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통신인 사발통문에 대한 설명
백산성 안내판
백산성과 남부여부흥전쟁. 남부여군과 왜의 지원군이 합세하여 이곳 백산성에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였으나 결국 대패하였다. 백산성은 백강구 전투의 역사적 현장으로 추정된다.
백산성은 내외성을 갖춘 겹성의 토성이다. 서남방 구릉도 외성에 포함된다.
발굴 유물에 대한 설명
서남녁의 변산 줄기. 고대에는 이 사이를 고부천과 두포천이 흘렀을 것이고 두 강의 어귀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와서 지금의 부안읍도 큰 항구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서남녁 구릉의 외성. 그 남쪽에는 동서로 30번 국도 4차선 도로 건설이 한참이다.
동진강 유역의 평야. 오른쪽으로 수문이 보인다.
좌측이 변산의 산줄기이며, 우측이 부안읍 뒷산
서녁의 부안읍. 부안읍에는 부안진성이 있다. 전성기에는 전주성 3배 이상의 규모였다고 한다.
동진강과 명금산성
백산성 정상에는 동학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동학정에서 바라 본 동진강. 정면에 명금산성이 보인다.
부안읍 주변의 산 구릉과 그 뒤 변산의 산줄기가 희미하게 보인다.
철쭉이 너무도 붉게 피었다. 남부여 부여군의 넋이든가 아니면 농민군의 넋이든가?
바위 성곽
군포교 근방에서 바라 본 백산성 전경
역사의 동진강
군포교
다음 답사 코스는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 반곡리산성이다. 먼저 백산성에서 동진면 소재지를 찾아가야 한다.
백산성에서 동진면 소재지 가는 길에 고마저수지가 5월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한다.
고마저수지. 물이 너무 맑다.
동진면 소재지에 있는 동진초등학교 조금 지나 우회전하면 705번 지방도를 탈 수 있다. 5분여 가다보면 첫 사거리가 나오는 곳에 반곡리산성이 있다. 반곡2리 마을 뒤로 산성의 윤곽이 보인다.
반곡리산성 동쪽
반곡리산성 서쪽
반곡리산성 북쪽에서 바라 본 모습. 반곡삼거리에서 705번 종점인 문포로 빠지지 말고 계화면 소재지 가는 길로 좌회전해서 바라본 모습이다. 반곡2리 마을 후면에서 조망한 모습이다.
토성의 윤곽이 나온다. 지금은 반곡리산성이 침묵하고 있지만, 백강구 전투 시절에는 동진강 남쪽의 전진 기지로 왜와 당나라 군선의 전쟁을 목도하였을 것이고 어쩌면 왜의 남부여 지원 군선이 불타 오르는 아비규환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분명 반곡리산성에서도 큰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동북아 최고의 국제전의 중심부에 반곡리산성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서북방을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계화산(246m)이 보이고 가까이는 새포산(20.4m)이 보인다. 계화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계화산은 섬이었고, 새포산은 서해 포구였다. 이곳 반곡리산성도 동진강 유역의 포구였을 것이다.
개화간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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