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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등유적기행/고분 기행

충주 누암리고분군, 탑평리7층석탑(중앙탑), 고구려비

<2010년 7월 4일>

 

<표제사진 - 충주 고구려비 전경>

 

네비게이션에 누암리 고분군을 치고 충주로 달렸다. 누암리 고분군은 중앙탑이 있는 충주박물관과 자동차로 5분여 거리에 있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따르면,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新羅)가 이를 평정하였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세우고 문무왕(文武王)때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592보였다.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충주(忠州)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국원성(國原城)-미을성(未乙省)라고도 하고 탁장성(託長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3년조>에 따르면, "문무왕 13년 가을 9월에 국원성(國原城)[옛날의 완장성(薍長城)이다],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또는 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하였다],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고구려(북부여)는 수도를 국내성, 부도를 국원성이라 불렀다. 국원성 건설은 반도 진출의 교두보로서 북부여족이 천년 왕조를 꾸릴 목적으로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였다. 이러한 북부여의 염원을 꺾은 이가 바로 진흥왕이다. 진흥왕 18년(557년)에 오히려 신라가 제2의 수도라는 의미에서 소경을 설치한다. 만약 북부여가 국원성을 중심으로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면 북부여 천년 왕조의 수도가 되어 오늘날에도 이곳 국원지역(중원지역)이 우리나라의 수도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장미산성을 오르기 전에, 누암리고분군으로 간 까닭은 고구려 지배자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가 궁금해서였다. 진흥왕이 이곳 국원지역을 정복한 후 누대에 걸친 지배층의 무덤이 바로 누암리 고분군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지배자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일단 단서는 누암리 고분군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누암리 고분군 안내판

 

 

 안내판 내용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고분의 특성중에 '시상대를 설치하고 위로 오르면서 원형의 궁륭 모양으로 점점 좁혀지는 수법'이라고 한 부분이다. 궁륭의 형태는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 아닌가?

 

 

 

 문화유산해설사들이 사용하는 공간. 그분들과 함께 고분을 둘러보았다. 누암리 일대에는 230여기의 고분이 있다.

 

 

 누암리 고분군

 

 

 

 

 

 1호분. 아마 누암리 고분군 중에서 제일 큰 것 같다.

 

 

 목장길 따라 오르는 기분이다. 문화유산해설사는 두분인데, 그 중 남자분은 점잖게 생긴 노신사로 충주에서 선생님하시다가 퇴임하셨다고 하였다. 이분께서 좋은 정보들을 주셨는데, 근처에 고구려 고분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이류면 두정리 고분군이 고구려 양식이라고 들엇다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그러면 그렇지. 다음에 꼭 확인해야지. 그리고 문경 고모산성 근처에도 누암리 고분군과 비슷한 무덤들이 발견되엇다는 것이다.

 

 

 

 

 

 다른 문화유산해설사분.

 

 

멀리 보이는 산이 충주 남산이다. 남산에도 산성이 있다.

 

 

 새로 발굴하고 있는 고분들.

 

 

 누암리 고분군의 특징은 큰 것과 작은 것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고분과 남산

 

 

 고분 좌측이 남산(636m), 고분 우측 앞산이 삼봉(276.6m).

 

 

 

 

 

 

 

 

 

 

 

 

 

 

 해설사 분이 주변 지역 고분군들을 현장발굴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5번이 이류면 두정리 고분군이다.

 

 

 누암리 고분군 분포도. 크게 가~마구역으로 5구역이 있다. 고분을 둘러본 전체적인 소감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고분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그때 그때에 따라 임의적으로 만든 느낌이 든다. 이는 고분 양식이 궁륭 형태를 띤 것으로 보아 과거 고구려 고분을 신라인들이 국원 지역을 점령하고는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부장품은 신라적인 것이나 양식은 고구려적인 것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인들이 새로 무덤을 조성할 때, 옆에 산재한 고구려 고분의 흙을 새로운 고분 위에 덮어 위세를 과시한 듯하다. 그 결과 고분군속의 고분들이 크기가 비대칭적으로 산재된 것으로 사료된다.

 

 

 충주박물관(1관) 옆에서 바라본 누암리고분군 가는 길.

 

 

 충주박물관 야외공원의 중앙탑.

 

 

 토단 위에 쌓아 올려 그 위용이 느껴진다.

 

 

 남쪽에서 바라 본 중앙탑.

 

 

중앙탑 안내판

 

 

 반도의 중앙에 세웠다고 해서 일명 중앙탑이란다. 물론 제주도는 제외. 이곳 중원 지역이 대략 평양과 경주의 중간 정도는 될 듯하다. 충주지역을 고구려는 국원이라 불렀고, 삼한통일 이후 신라에서 비로소 중원이라고 하였다. 반도를 둘러싼 삼국간의 경쟁에서 중원 지역의 장악은 반도의 심장을 움켜진 형상이라 사료된다. 신라의 중원지역 진출이 곧 삼한 통일의 분수령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탑의 다른 모습. 상승감이 느껴지는가?

 

 

 중앙탑에서 바라 본 장미산성 방향. 장미산은 보이지 않는다.

 

 

 중앙탑에서 바라본 누암리 고분군 가는 계곡

 

 

 

 

 

 중앙탑에서 바라 본 장미산성

 

 

 

 

 

 중앙탑 옆으로는 남한강이 북쪽으로 힘차게 흘러가고 있다.

 

 

 

 

 

 

 

 

 남한강. 충주댐은 상류에 있으나 장미산 동쪽 하류에 조정지댐이 있어 이곳 야외공원 옆의 남한강에는 물로 가득하다. 우리 4대강 정비사업의 결과는 이곳 조정지댐의 모습을 보면 대강 그릴 수 있다. 4대강 사업 홍보책자에는 줄곧 '보'라고 하나 실상은 '조정지댐'이라 할 수 있다. 4대강 사업이 완성되고 나면 우리는 예술적으로 도안된 여러곳의 조정지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들은 MB를 칭찬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러하듯 44조를 투입하면 뭐든지 좋아진다. 왜냐하면 인풋이 44조이기에 아웃풋이 50%만 되더라도 22조의 Benefit은 발생하기 때문이다. 청계천 사업이 그러하다. 겉모습만 좋지 실제 돈먹는 야외 어항아니던가? B/C분석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저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좋다고 할런지 모르겠다. MB이후 초래될 막대한 재정적자(미래세대의 부담)는 고사하고 44조라는 막대한 재원을 4대강에 들이는 동안 이땅의 소외된 계층은 그만큼 더 불행해지는 것이다. 민중의 고혈을 짜서 몇몇 토목건설업자의 배를 불리는 게 과연 고부군수 조병갑이 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런지...

 

 

 충주시내 방향. 상류쪽을 바라본 모습.

 

 

 건너편은 임페리얼 레이크 C.C이다. 4대강 사업이 끝나면 저런 골프장들의 모습을 처처에서 볼 수 있을 듯하다.

 

 

북쪽의 장미산(336.9m)과 장미산성

 

 

 우리 4대강의 미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흐르는 강물이 아닌 거대한 어항인 4대강을 만나게 될 듯하다. 그네들은 무슨 자격으로 이토록 자연을 학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네들의 개똥철학에 위대한 찬사를 표하노라!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물은 탁해서 고기 한마리 보이지 않는구나!

 

 

 

 

 

 박물관 가는 길에 바라 본 중앙탑. 삼한통일 이후 신라인의 프라이드가 느껴지는 곳. 이곳에서는 오늘 찾고자 하는 고구려적인 것은 전혀 느낄 수 없고 다만 신라적인 것만 보여진다. 누암리고분군에서도 그랬거니와 중앙탑에서는 과연 이곳이 고구려의 부도인 국원경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고구려의 존재감은 너무도 가벼워 하늘도깨비의 소회가 자칫 감상으로 흐를까 두려워진다. 아! 고구려가 너무 외롭다.

 

 

충주박물관(1관)

 

 

 

 

 

 정토사 흥법국사 실상탑 모형

 

 

 

 

 

충주의 역사

 

 

 아! 이것이 무엇이더란 말인가?

 

 

 중원 고구려비. 그렇지! 이곳이 고구려의 국원성임을 이보다 명확히 표지하고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누암리 고분군과 중앙탑이 아무리 이곳이 신라의 중원경이라 떠들어도 천오백년 가까이 묵묵히 버텨온 이 비석의 저음도 감당키 어렵다. '이곳은 고구려의 국원경이니라.' 갑자기 박물관을 뛰쳐나가 바로 고구려비로 달려가고 싶다.

 

 

 이곳이 충주시와 통합되기 전에는 중원군이라서 중원 고구려비라고 하지만, 신라와 고구려의 짬봉 같은 이 말은 '국원 고구려비'라고 하여야 그 위상을 찾을 듯하다. '중원 중앙탑'처럼 '국원 고구려비'라고 하여야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다.

 

 

 삼가라 즉 삼한 이후에 삼국 중 백제가 제일 먼저 이곳 중원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당시는 이 지역을 낭자곡성 내지 미을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충주 금릉동 고분군이 백제 지배층의 무덤으로 사료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이곳은 고구려의 국원성으로 삼한 통일의 남방 전진기지로 150년간 기능하였다. 고구려비, 장미산성, 봉황리마애불상군, 건흥5년명 금동불광배가 이를 표지하고 있다.

 

 

 진흥왕 대 이후 신라의 중원 진출.

 

 

 누암리 고분군에 대한 설명

 

 

 단양 신라 적성비에 대한 설명

 

 

 이 지역은 낭자곡~국원~중원~충주로 이어지는 지명 유래가 있다. 충주는 고려시대 몽고에 대한 항쟁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충성스러운 고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명예로운 지명이다.

 

 

 1231년 몽고 1차 침입시 충주 노군의 항전

 

 

 

 

 

 

 

 

 충주산성 연못지 사진

 

 

 불심으로 몽고를 막다. 팔만대장경 조판.

 

 

몽고 5차 침입시 금당협전투와 70일간의 충주성 방어전. 이로 인해 국원경으로 승격된다. 고려대에도 이곳 충주 지역은 반도를 관통하는 간선도로상에 있었기에 몽고의 침입을 받은 것이다. 물론 조선대에도 영남대로가 관통한다.

 

 

 

 

 

 

 

 

 

 

 

 충주박물관 옆의 야외전시관에 있는 신매리 후처 선돌

 

 

 신매리 남편 선돌

 

 

신매리 선돌은 본래 3기가 있었는데, 충주댐 건설로 수몰선안에 있던 2기만 신매리 무궁골로 옮겼다고 한다. 사람들도 야박하게 본처 선돌은 빼먹고 남편과 후처 선돌만 옮겨올게 뭐람! 본처 선돌 오매 열받어!

 

 

 국원 고구려비가는 길에 바라 본 장미산성

 

 

 건너편 임페리얼 레이크 C.C, 멀리 보이는 산은 충주시 산척면과 동량면의 경계에 있는 인등산(665m)임.

 

 

 드디어 국원고구려비이다.

 

 

 고구려비 후면. 우리의 국보

 

 

 고구려비 전면. 국보는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국보라는 깨달음이 엄습해온다.

 

 

 천오백년이라는 진공의 시간속에서도, 국원경의 찬란했던 영화를 이끼속에서도 묵묵히 침묵했던 그 위대한 역사의 표식아닐런가? 한낫 무념의 돌덩어리로 탄생하여 역사의 비밀을 아로새긴 영원불멸의 비석이 되어버린 그 영광의 주인이여! 그대에게 경외의 존경을 념하노라!

 

 

 비록 오른쪽 다리를 잃었어도 이는 고통의 시간에도 불멸의 역사성을 일깨운 영광의 과정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노니, 국원고구려비여! 역사의 뒤안길에서 안식을 하여도 그대의 소임은 다한 것일지니 우리 역사공동체의 영원한 벗이어라! 그대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국원 고구려비 비각

 

 

 비문 해석

 

 

 안내판

 

 

 국원 고구려비 모형물

 

 

 자, 국원 고구려비의 감동을 안고 국원경을 비호하던 장미산성으로 날아가보자! 장미산성 가는 등산로는 국원 고구려비 옆 주차장 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