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4일>
<표제사진 - 송파 방이동 고분군 전경>
지나간 숙제를 한다. 11년 봄. 우연히 방이동 근처를 지나다 백제 고분군이란 이정표에 호기심이 생겨 들렸다.
발굴 당시는 당연히 백제고분군으로 추정하여 명명했으나, 지금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과 유적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475년 백제 위례성(한성)이 함락되고 난 후 이곳 일대는 고구려 한산군이 되었으나, 진흥왕 대에 이르러 한강 유역은 신라가 차지한다. 진흥왕 대 건립된 북한산순수비(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진흥왕은 553년 7월 백제로부터 동북변경을 빼앗고 신주를 설치한다. 신주는 지금의 진천 대모성으로 비정된다. 진흥왕은 관산성전투에서 북진의 발목을 잡고 있는 남부여 성왕을 패사시키고, 신주에서 북진하여 한강 이남에서 고구려군을 몰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방이동고분군이 신라인들의 무덤이라면, 이는 당시 한산주에 거주하던 신라 장군들의 무덤일 것이다. 왜냐하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불교의 영향으로 매장보다는 화장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는 법흥왕 대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받아들인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 혹은 외손이 된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 입종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다. 즉 진흥왕의 어머니는 자기 삼촌과 결혼한 셈이다. 이는 신라 왕실이 성골을 유지하기 위한 철저한 족내혼의 유습 때문이다. 비록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당시 신라의 유습까지 혁파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매장의 유습 또한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필자는 송파 방이동 고분군이 만약 신라 계통이라면, 진흥왕 이후 한강 유역을 호령하던 신라 장군들의 무덤일 것으로 추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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