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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 (충청도)/충주, 괴산, 음성

충주 장미산성(2) : 북부여가 반도의 중심부에 부도인 국원성을 건설하다

<2010년 7월 4일>

 

 

 

 

 

 

 정상 가는 산책로

 

 

정상의 성벽까지 참호는 이어진다.

 

 

 

 

 

 정상에도 민묘 1기

 

 

 서남쪽 괴산 방면의 속리산 줄기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뒷산은 평풍산 줄기. 우측 뒷산은 국망산(770.3m)~보련산 줄기임.

 

 

 좌측 산이 파헤쳐진 곳은 충주 기업도시(지식기반형) 예정지이고 우측 산이 평풍산.

 

 

 장미산성 안내판

 

 

 장미산성은 장미산 산정을 중심으로 석축한 포곡식 산성이다. 둘레는 2,940m로서 상당한 규모의 고구려 계통의 산성이다.

 

 

 

 

 

 

 

 

삼각점

 

 

 산정에서 동쪽을 바라 본 모습

 

 

 장미산성 아래 동쪽으로는 남한강이 흐른다.

 

 

 서북 방향의 보련산. 장미산성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삼국시절 보련산 서쪽 가마골에는 '보련'과 '장미'라는 오누이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타고난 장수였던 오누이는 어느날 목숨을 걸고 성쌓기 시합을 벌인다. 누나인 보련이가 성 쌓는 실력이 낫다는 것을 감지한 어머니는 아들인 장미를 살리려고 꾀를 내어 손수 떡을 해서 보련이를 찾아갓다. 보련이가 떡을 먹고 있는 동안 장미가 먼저 성을 쌓아 버렷다. 어머니의 뜻을 알아 차린 보련이는 그길로 집을 떠났다. 다음날 보련의 집에 큰별이 떨어졌다. 보련이 성쌓은 산을 보련산이라 하고, 장미가 성 쌓은 산을 장미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산성들 중에는 이와 유사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이는 대부분 고구려나 백제같은 부여족 계통의 산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특히 고구려의 산성 축조 방식은 한 책임자가 일구역을 책임지는 돈내기 방식으로 다른 책임자와의 경쟁을 부추겨 빠른 시간내 축조토록 한다. 이 결과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빠른 시간내 축조하다가 하자가 발생하여 산성이 무너지게 되는 경우 처벌을 각오해야 한다. 이러한 비정한 현실이 장미와 보련 같은 전설을 낳은 듯하다. 결과적으로 보련이라는 인물은 산성 축조에 하자가 발생햇거나 실패한 인물로 당시의 노역군들이 그를 위로하여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보련산이 애처로와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일까? 보련산에도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잇다고 한다.

 

 

 수축하고 잇는 장미산성 동벽구간

 

 

 

 

 

보련산. 보련산에도 산성의 흔적이 있는 걸로 봐서 보련산, 장미산 일대가 고구려군의 핵심 군사 요새엿던 것 같다.

 

 

 산성의 동벽 구간

 

 

 

 

 

 동벽의 끝에는 정성스런 탑이 하나 있다.

 

 

 탑이 잇는 곳은 보루가 잇었던 듯하다. 이 보루에서 남한강을 남북으로 이동하는 배들과 사람들을 감시한 듯하다.

 

 

 

 

 

 

 

 

봉학사(한국불교 태고종 사찰) 내려 가는 길.

 

 

 저게 무얼까? 바위인듯 하지만 인공구조물처럼 보인다.

 

 

 허걱, 산신각이란다.

 

 

  개도 짖고 하여 다시 헬기장까지 돌아가서 내려온다.

 

 

 봉학사 전경

 

 

 봉학사 대웅전

 

 

 봉학사를 남쪽에서 감싸 않으며 이어지는 장미산성

 

 

 장미산성은 봉학사 계곡을 감싸안은 포곡식 산성이다. 보이는 성벽 끝에 수구가 있었던 듯하고,

 

 

이쯤해서 정문인 남문터로 추정된다.

 

 

 봉학사에서 장미산 마을 내려가는 길

 

 

 

 

 

마을유래비

 

 

 장미산 마을에서 택시를 타려고 114에 문의해보니 가금면에는 택시가 없단다. 마침 젊은 아가씨가 오길래 택시를 부를데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버스 타러 나왔다고 한다. 고구려비 근처까지는 최대한 간다고 했다. 이름이 장미산 마을이라 그런지 참 이쁜 아가씨다. 건데 웬걸 택시 하나가 오고 잇지 않은가? 아가씨랑 인사를 하고 서둘러 택시를 타고 차까지 복귀하엿다.

 

고구려비 주차장으로 복귀한 다음, 가금면 봉황리 마애불상군으로 갔다. 고구려비와는 자동차로 10여분 거리다.

 

 

장미산의 북쪽에서 동서로 흘러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한포천이다. 한포천은 장미산성의 북쪽 해자 역할을 한다. 국원경(충주)에서 멀게는 북부여 한산군(지금의 경기도 광주)까지, 짧게는 북부여 개차산군(지금의 안성시 죽산면의 죽주성 일대)의 속현인 노음죽현(지금의 이천시 장호원읍과 설성면 일대)까지 가는 길은 크게 3가지다. 1) 조선의 영남대로였던 지금의 3번 국도로 조선의 모도원을 거쳐 부용지맥의 못고개를 넘어 장호원에 이르는 길 2) 충주 가금면 고구려비~노은면~부용지맥의 솔고개~음성 감곡면 주천리~이천 장호원 3) 지금의 38번 국도길로 고구려비~ 잣고개~봉황리 매애불상군~앙성면~부용지맥의 이문고개~음성 감곡면~이천 장호원 등이다. 북부여 당시에도 3개 루트가 다 개척되었을 듯하지만 주요 루트는 역시 남한강을 지향하고 잇는 3)번 루트였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유적이 바로 봉황리 마애불상군이다.

 

 

 동으로 흐르고 잇는 한포천. 이 천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한포천 절벽(고대에는 마애불상이 있는 절벽 옆으로 한포천이 흘럿을 것 같다) 위에 봉황리 마애불상이 나온다.

 

 

 내동교와 신축중인 펜션단지. 주위 풍광이 괜찮은지 지금같은 불경기에도 펜션을 짓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주위에 충주보훈휴양원도 있다.

 

 

 내동교에서 북으로 바라 본 한포천

 

 

 보훈휴양원 지나 내동대교 못미쳐 좌측 천변 둑길이 마애불상군 가는 길이다.

 

 

 안내판

 

 

 마애불상은 햇골산 중턱 2곳에 약간 떨여져 있다. 햇골산은 주위에 장미산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컨대 해골산의 와전으로 보인다. 전쟁의 결과 이곳 주변에는 해골로 가득햇고 따라서 영혼을 달래려고 마애불상을 아로새겼나? 아래편이 고구려양식이고 왼쪽 위편은 통일신라 양식이라고 한다. 절도 있었다고 한다.

 

 

 마애불상군이 있는 한포천변의 절벽

 

 

옛날에 어떻게 올라가서 불상을 조각했을까?  

 

 

오르는 계단

 

 

 아이들 데리고 오기에는 조금 위험.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은 무방할 듯...

 

 

 동남쪽으로 장미산성이 보임

 

 

 

 

 

 제방을 쌓기 전에는 한포천이 정면으로 이곳 마애불상의 절벽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잣고개. 북부여(고구려) 노음죽현(지금의 장호원)과 한산군으로 가는 3번 루트이다.

 

 

위편의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상

 

 

항상 장미산성을 응시하고 있다.

 

 

 북부여의 잔재를 지우기 위해 신라인들은 아래편의 마애불상 보다 더 크게 조각한 것일까? 중앙탑과 비슷한 이유에서 조성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포천

 

 

내려오는 도중 발견한 마애불상군. 처음에는 위편의 마애불상을 아래편으로 착각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포기하고 하산하면서 발견하였다. 역시 산을 오를 때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산을 내려올 때는 잘 보이는 법인 것 같다. 오를 때는 그냥 절벽으로만 생각했다. 이러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하늘도깨비도 착각할만 하죠! 아래편 좌편의 마애불상.

 

 

 아래편 우측의 마애불상.

 

 

 솔직히 불상인지 알기 어렵다. 너무 오래되어 풍화작용을 거친 때문인지 윤곽만 그릴뿐이다.

 

 

 자세히 찍어보지만...

 

 

 불상 위의 날카롭게 떨어져나간 바위의 날을 보라! 고구려인의 솜씬지 현대인의 솜씬지 분간하기 어렵다.

 

 

 

 

 

 

 

 

 

 

 

 저기에도 마애불상이 조각되었을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알기 어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