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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백제 산성

부여 청마산성(1) : 남부여가 도성인 사비성 부근에 장기 농성을 쌓다

<2010년 11월 14일>

 

 

표지사진 - 청마산성에서 바라본 산경표의 금남정맥. 앞에 보이는 정맥 넘어 뒷산이 금성산성이다.

 

남부여는 도성인 사비성의 위기를 대비하여 장기 농성으로 나성(사비 외성) 동쪽 월명산 능선에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것이 둘레가 장장 6.5Km에 달하는 포곡식 청마산성이다. 그러나 신라군에 앞서 당나라 군대가 기벌포에 상륙하여 남부여군을 학살하고 사비도성으로 치달았을 때도, 신라군이 겨우 황산벌에서 남부여 중앙군을 깨트리고 사비도성으로 들이닥쳤을 때에도 남부여가 청마산성에서 장기 농성전을 전개하였다는 기사는 없다. 사비 내성인 부소산성에서 몇일간 항전하다가 항복하였다는 기사와 남부여 군주인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란하였다는 기사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청마산성은 후대(대체로 여말 선초)에 금강 연안으로 침략하는 왜구를 막기위해 쌓은 산성일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의 중앙군이 기병 전략을 구사하다가 패했기에 도성을 지키는 군사가 별로 없었다. 이에 미처 피난하지 못한 사비의 왕족, 귀족 및 주민들은 사비 내성(부소산성)에서 형식적으로 항전하는 척하였지만 실제로는 웅진성으로 피난간 의자왕을 중심으로 지방군이 합세하여 도성을 회복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웅진성의 성주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남부여 멸망은 미스테리다. 우연한 불행이 세번 연속 겹쳤던 것이다. 우연이 세번 겹친다는 것은 불가사의 그 자체다.

첫번째 불운은 당나라가 바다를 건너 남부여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신라를 믿는 바도 있지만, 당시 상황에서 도해(渡海)하면서까지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거의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소정방은 덕물도에서 신라의 태도에 의심이 들면 회군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두번째 불운은 청마산성에서 보병 우위의 장기 농성을 택하지 않고, 기병 우위의 전략을 위해 황산벌 전투를 감행한 일이다. 이는 계백의 중앙군이 기병전에서 비교 우위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계백은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부대를 삼분하여 전선을 매우 확대시킬 줄이야 상상이나 했을까? 그 결과 남부여 군의 기병도 삼분되어야 했으니 그 위력은 8분의 1로 약화되었을 것이다. 계백은 충신이지만 무능한 충신이었다. 그는 다른 방도를 찾지 않고 남부여 멸망의 시간을 유예했을 따름이다. 단 한차례의 충돌로 모든 전력을 상실한 계백의 선택은 의자왕의 권위 약화로 이어졌다. 물리력이 없는 군주는 허명 뿐이다. 그 결과 배반을 초래했다. 뒤이어 벌어질 남부여 부흥군의 활약을 보노라면 황산벌 전투가 과연 불가피한 선택이었냐는 반문이 든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하긴 망하려면 무슨 일인들 생기지 않았을까?

세번째 불운은 남부여 군주인 의자왕이 가까운 웅진성으로 피난을 간 일이다. 이는 곧 항전의 근거지 선택에 실패 했다는 것이다. 웅진 성주인 예식진에게 이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배반으로 이어졌다. 이는 계백의 황산벌 전투 패배에서 비롯된 의자왕의 물리력 상실과 궤를 같이 한다. 결국 남부여는 항전의 근거지와 그 구심력을 상실함으로써 부흥군의 내부 알력에 무력하였다.

남부여 도성이 유린되는 그 날에도 청마산성 주변은 조용하였을 것이다. 군대가 없는 산성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날의 비통함을 침묵으로 삼키고 1500년 가까이 버텨온 청마산성을 오르니 남부여 최후의 그 날이 떠오른다. 청마산성 바로 서남쪽 아래 남부여 선왕들의 혼을 지키던 능사에서 누군가가 백제금동대향로를 묻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처럼 남부여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청마산성 동남쪽 능안골

 

능안골 고분 안내도

 

능안골 고분은 남부여 귀족들의 무덤터라고 한다. 이곳에서 차로 3분여 거리에 왕릉으로 전해지는 능산리고분군이 있다.

 

능안골 고분에서 바라 본 청마산성 전경

 

  능안골 고분에서 구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우회전하면 능산리 체마소 마을 가는 길이 나온다.

 

체마소 마을 지나면 용정리 독쟁이 마을 넘어가는 얕은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가 산경표상 금남정맥인 체마소고개이다. 체마소 마을 방향. 정면에 보이는 산은 조석산(183.1m)이다.

 

용정리 독쟁이 마을 가는 길

 

독쟁이 마을

 

금남정맥상 금성산과 부소산 가는 길

 

 

청마산성 가는 길

 

 

 

 

 

 

 

5분여 가다보면 남쪽이 트인 민묘가 나온다. 조석산.

 

민묘 부근에서 청마산성이 조망된다.

 

산책로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청마산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표지석

 

장대지 아래 성벽

 

서남벽

 

 

 

서남벽 건너편 산

 

청마산성은 이곳 서남벽에서 건너편 산까지 계곡을 막은 포곡식 산성으로 추정된다. 청마산성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 답사자의 눈대중으로 산성의 평면을 그려본다. 오늘은 계곡의 수구문과 서문터까지는 답사하지 못하였다.

 

서남벽 장대지 오르는 길

 

 

 

돌아 본 서남벽. 이곳이 계곡을 막은 서벽과 동쪽에서 서쪽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간선도로를 감시하는 남벽이 시작되는 곳이다.

 

서남벽 오르는 길. 자료에 따르면 성문터는 아니란다. 청마산성은 서문을 제외하고는 성문이 없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장기 농성전을 대비한 구조일 듯하다.

 

산성의 장대지에는 늘 민묘들이 자리하고 있다.

 

산성 안내판. 군창으로 추정되는 큰 건물터가 3곳이나 있다고 한다.

 

민묘 옆에는 토지신을 모신 조그만 제단이 있다.

 

장대지에서 서쪽을 조망하다. 가운데로 부소산성과 오른쪽으로 청산성이 보인다.

 

정면 산구릉이 산경표의 금남정맥이다. 그 뒤 오른쪽 산이 사비 내성인 부소산성이다.

 

멀리 서남방으로 금강이 조망된다.

 

남쪽에는 조석산이 보인다.

 

이 산책로는 산성의 남벽 위로 나있다.

 

산성의 서남방으로 아래로 4번 국도가 지나간다. 국도는 홀수번호가 남북 국도이며, 짝수번호가 동서 국도이다. 4번 국도는 동서로 정확히 부여와 경주를 잇고 있다. 고대 남부여와 신라간의 최단거리인 간선도로도 지금의 4번 국도와 거의 일치할 것으로 보인다. 4번 국도는 서해인 충남 서천군 장항읍과 동해인 경북 경주시 감포읍까지 이어진다. 

 

가운데가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인바, 그 뒤 왼쪽 산이 금성산성이 있는 금성산이다. 필자가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신경준의 <산경표>에 나오는 금남정맥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금남정맥은 말 그대로 금강의 남벽을 이루는 산줄기로 진정한 남벽의 끝자락은 이곳 부여 부소산이 아니라 군산 장계산이기 때문이다. 박성태씨의 <신산경표>에 따르면 부여 부소산까지는 금남기맥으로 부르고, 군산 장계산까지는 금강정맥으로 부른다. 혹자들은 부여 부소산까지는 금남정맥으로 부르고, 군산 장계산까지는 금강기맥으로 부른다. 물론 많은 고민 끝에 명명한 것이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군산 장계산까지를 금남정맥으로, 부여 부소산까지는 금강 기맥으로 부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다. 금남정맥에서 황산벌을 적신 논산천을 만든 산줄기를 제외시키는 것이 못내 찜찜하다. 필자는 앞으로 부여 부소산까지의 산줄기를 금강기맥으로 부를 생각이다.

 

남쪽의 조석산

 

 

 

 

 

 

 

 

 

 

 

 

 

청마산성 내부 계곡 아래

 

 

 

논산가는 4번 국도가 청마산성 남벽 아래로 지나간다. 보이는 터널은 염창터널이다. 청마산성(금강기맥)에서 남쪽으로 하나의 산줄기가 분기하는바, 저곳 염창터널 위를 지나 금강과 평행하게 가다가 파진산에서 맥을 다한다. 파진산은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를 진을 쳤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다. 이는 석성산성 때문이다. 석성산성의 남부여 군과 일전을 앞두고 소정방이 작전을 펼치기 위해 파진산에 군대가 머물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비 도성의 남방과 동방을 방어하는 석성산성과 청마산성은 유기적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다.

 

금강이 남쪽으로 힘차게 내려가고 있다.

 

 

 

조석산과 그 뒤의 금강 연안

 

 

 

동남쪽의 논산벌 일대

 

 

 

 

 

서남방의 금강연안. 부여 궁남지 방향이다.

 

산성의 남벽 구간

 

남벽 장대지. 그 아래로 능안골 고분이 산포해 있다. 

 

동남방의 논산벌 방향

 

남벽 산책로는 이어지고...

 

 

 

산성 내부 계곡과 건너편 북벽 구간

 

지나온 남쪽 장대지

 

이곳 남쪽 장대지에는 남부여 군사 대신 산불무인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망권은 끝내준다.

 

 

 

 

 

청마산성 전체 구간 중 방어가 제일 취약한 구간으로 내려간다.

 

 

 

지대가 제일 낮은 것 같다.

 

산성 내부 계곡으로 들어가는 임도

 

되돌아본 남벽 구간

 

이곳에는 성문터가 없다고 한다.

 

역할을 다한 듯한 이정표가 서있다.

 

이곳 지대가 낮은 남벽구간에는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하긴 산속이라 그렇지 밖에서 보면 이곳도 웅장한 남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청마산성의 능선을 다 밟아 볼 요량으로 산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산행을 마치고 나서 제일 아쉬웠던 점은 능안골 고분에서 산성 오르는 길을 밟아 보지 못한 것과 계곡 입구의 수구문과 서문터를 답사하지 못한 것이다. 괜시리 북벽을 타는 바람에 시간을 제법 소비하였던 것이다.

 

 

 

 

 

삭막한 계절이 다가옴에도 구절초가 너무도 화사하게 피었구나. 보아주는 객이라도 없었다면 얼마나 슬펐을까? 오늘 산행의 보너스다.

 

 

 

건너편 북벽이 조망된다.

 

 

 

저곳 민둥 부분에서 계곡 쪽으로 치고 나온 서벽이 분명 있을터...하지만 북벽에서 시간만 소비하고 서벽터를 찾지 못했다. 보통 포곡식 산성은 계곡이 제일 좁은 곳에서 성벽과 성문을 만든다. 용정리 독쟁이 마을도 독을 만드는 말에서 유래되었지는 모르지만, 계곡이 독처럼 병목을 이루는 구간이 있어 계곡 모양을 보고 이름을 지을 수도 있다.

 

산성 외부 성안골 부근

 

다시 남벽은 이어지고

 

 

~ 부여 청마산성(2)에서 게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