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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백제 산성

연기 원수산성(1) : 금강과 미호천이 합강하는 지점을 지키던 산성

<2011년 4월 17일>

 

 

 

표지사진 - 우측의 원수산과 좌측의 성재산. 원수산성은 성재산 정상부에 있다.

 

 

조치원에서 세종시 중심부를 지나는 1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 보면 좌측으로 원뿔 모양의 산이 나온다. 바로 원수산이다. 헌법재판소는 세종시 판결에서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는 관습헌법을 적용시켜 세종시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그때 적용한 관습헌법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이른바 '이현령비현령'으로 자의적인 판단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만약 수도 이전이 위헌이 아니었다면 청와대가 들어설 자리가 바로 원수산 남쪽 아래이다. 우연이지만 청와대 들어설 뒷산이 원수산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원수(元帥). 대통령을 가리키지 않는가?

 

원수산 정상의 서쪽 아래 성재산에는 산성이 하나 있다. 이 산성은 둘레가 약 1,200m로 고대 산성의 규모로는 매우 큰 편이다. 이 산성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원수산은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고려 충렬왕 17년(1291) 합단이 침범해 왔다. 왕이 구원병을 원나라에 청하니, 세조가 평장사 설도간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니, 왕이 한희유와 김흔 등으로 하여금 3군을 거느리고 원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의 군병과 더불어 연기현 북쪽 정좌산 아래서 격전 끝에 이기고, 웅진(지금의 공주)까지 추격하니, 땅에 깔린 시체가 30여리까지 이어졌으며, 참수한 머리와 노획한 병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래서 세속에서 지금까지도 그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부른다.'

 

1287년(충렬왕 13) 원나라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이 일어났다가 평정된 적이 있는데, 1290년 1월 내안의 군대에 속했던 합단이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5월 합단의 군대는 원나라의 나만대(那蠻帶)에게 쫓겨 고려로 침입하였다. 합단군은 개전 초반 승승장구하며 1291년 원주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합단의 군대는 치악성(雉嶽城) 전투에서 패하였고 이어 충주산성을 공격하다가 또다시 실패하고, 남하하여 연기현(燕岐縣)으로 들어갔다. 1291년 5월 설도간이 이끄는 원의 군대와 고려의 삼군(三軍)이 합세하여 연기현에 주둔하고 있는 합단의 군을 공격하였다. 1차 전투는 연기현 북쪽 정좌산 아래에서 벌어졌다. 이때 합단군이 크게 패하여 웅진 방면으로 도망가자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합단은 웅진에서 남은 군대를 정비하고 북상하기 위해 다시 연기 원수산 부근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이때 2차 전투가 벌어진다. 그때 원나라와 고려군이 주둔하면서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원수산성이다.

원수산성 북쪽 남면 연기리 뒷산에는 당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남부여 두잉지현의 치소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당산성은 둘레가 약 600m 정도로 원수산성 규모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필자는 두잉지현의 초기 치소는 이곳 원수산성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그러다가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후 두잉지현의 치소를 당산성으로 이전한 듯 보인다. 이후 원수산성은 폐성이 되었다가 고려 충렬왕 때 합단의 무리가 침입하자 이곳을 보수하여 임시로 사령부가 주둔한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원수산성의 출토 유물은 와편 1점과 토기편 3점이 전부로 고대 남부여 시절 산성의 활용 정도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고구려가 6C경 미호천 동안까지 진출할 때 미호천 서안을 방어하던 중요한 남부여 산성일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필자는 당진대전고속도로 북유성IC에서 나와 북으로 1번 국도를 타고 금남교로 금강을 건넜다.  금강을 건너면 나성마을이 나온다. 나성마을 지나자 마자 우회전하면 경부고속도로 청원IC 가는 96번 지방도가 나온다. 3분여 달리다 보면 금강 북안의 전월산이 보이고 좌측으로 장남들을 가로질러 진의리가는 신작로가 곧게 뻗어 있다.

 

 

 

원수산 동남방 금강 북안의 전월산

 

 

진의리 가는 신작로. 멀리 원뿔 모양의 원수산이 보인다. 원수산은 붓끝을 닮았다고 하여 문필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문필봉 아래에는 대학자나 대문호가 나온다고 한다.

 

 

전월산. 달이 굴러가는 산이란 뜻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전월산에서 달 감상을 하게 되면 미호천과 금강이 합강하는 지역을 조망할 수 있어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울 것이라는 상상이 든다. 전월산은 해발 200m 이상 급으로 높지는 않으나 금강과 장남들 평지에 바로 붙어 있어 그 위용은 대단해 보인다.

 

 

원수산 좌측 성재봉에 산성이 있다.

 

 

연기군 남면 양화리 곡촌마을. 그 뒷산이 바로 원수산이다.

 

 

이정표

 

 

이정표 옆의 열녀소

 

 

아래와 같은 행위의 내용은 말끔히 지워져 있다. 세종시 개발에 대한 원주민의 반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주민들의 절반 이상은 이미 고향을 떠난 듯하다. 이런 빈집들이 대다수다.

 

 

남면 양화리 상촌마을. 남동쪽으로 전월산이 보인다.

 

 

 

 

 

좌측으로 전월산 서쪽 아래의 형제봉이 보이고 우측으로 장남들이 보인다.

 

 

이 임도는 산제당까지만 이어진다.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니다. 필자가 착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경사도가 가파른 원뿔 모양의 원수산을 오르는데 쪼끔 고생했다. 산이 높지 않아 다행이다. 이정표가 표시한 대로, 할머니가 가리켜 준 대로 갔어야 되는데...편안한 임도에 끌려 오른 것이다. 상촌마을 뒤 임도로 오르든지 아니면 진의리 백동마을로 오르는 것이 편안할 터...

 

 

전월산과 형제봉

 

 

형제봉과 장남들

 

 

우리의 바위 신앙

 

 

 

 

 

 

 

 

산제당

 

 

 

 

 

산제당 좌측을 돌아 원수산 능선을 올랐다. 사진보다는 실제 매우 가파르다.

 

 

남쪽의 장남들과 금강. 장남들 중간에 직선으로 뻗은 신작로가 보인다. 아래 구릉은 원수산 정상에서 보면 어렴풋이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

 

 

상촌마을과 전월산

 

 

 

 

 

동쪽으로 월산산업단지가 보인다.

 

 

한반도 지형의 구릉과 장남들 그리고 금강

 

 

원수산 정상

 

 

삼각점

 

 

동남방의 전월산과 우측의 조그만 형제봉

 

 

동쪽의 전월산업단지

 

 

동북방

 

 

서북방. 세종시에서 연기군 서면과 조치원 가는 방향

 

 

서쪽의 세종시 전경. 좌측 산구릉 뾰족 올라온 것이 밀마루 전망대이다.

 

 

서남방. 멀리 보이는 산은 공주 장기면 장근산(354.3m)으로 보인다.

 

 

세종시 전경. 아래는 남면 방축리이다.

 

 

원수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남방의 성재산. 성재산에 원수산성이 있다.

 

 

멀리 세종시 첫마을 사업 현장에서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남쪽의 장남들과 금강

 

 

서남방의 계룡산 방향

 

 

 

 

 

 

 

 

 

 

 

 

 

 

서북방 연기군 서면 일대

 

 

 

 

 

서북방

 

 

북방으로 당산성이 보인다.

 

 

 

 

 

정상

 

 

 

 

 

 

 

 

성재산의 원수산성을 답사하러 하산하였다.

 

 

방축리에서 올라오는 임도

 

 

원수산성 전경

 

 

원수산 유래비

 

 

 

 

 

 

 

 

 

 

 

방축리에서 진의리 넘어가는 고개

 

 

원수산성의 윤곽이 보인다.

 

 

산성의 북벽

 

 

되돌아보니 원수산이 보인다.

 

~ 연기 원수산성(2)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