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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한국전쟁

하동전투 : 서울 수성에 실패하고 백의종군한 채장군의 최후지

<2013년 7월 27일>

 

 

<표지사진 - 고 채병덕 장군 전사비>

 

 

채병덕 장군의 인생은 오욕으로 점철되어 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해방 당시 그의 계급은 일본 육군 포병 중좌. 중좌는 지금의 중령에 해당된다. 그는 분명한 친일파다.

해방 후 그는 미군이 창설한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군번 2번)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장을 역임하며 출세가도를 달리다 한국전쟁 직전 제4대 육군총참모장에 취임한다.

희극은 항상 비극의 전조이다. 하필 위기 직전에 육군 최고의 별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인민군으로부터 수도 서울을 방어하지 못했다. 중과부적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음모가 있었을까?

아무튼 그는 서울 수성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전격 해임되고, 그 자리는 맥아더와 함게 미국 하와이에서 날아온 정일권 장군이 차지한다. 채병덕은 패배한 장수다.

1950년 7월 23일. 전쟁의 양상이 낙동강으로 좁혀오자, 부산에서 낙심해 있던 채장군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의 편지였다.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 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

채장군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처럼 백의종군의 마음이었을까? 그는 곧바로 하동고개(쇠고개)로 달려갔다. 반드시 명예를 회복하고야 말겠다고 다짐도 했을 것이다.

7월 27일. 하동고개에서는 수백 발의 총성이 울렸다. 선두에 서서 진격하던 채병덕은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그는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처럼 최후를 맞이했다.

한국전은 국제적인 음모에서 촉발된 의도된 전쟁이라는 시각도 있다. 세계대전의 종전에 따른 미소 군수산업의 급격한 위축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대통령에 대한 야심, 김일성의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망상. 이 모든 것들이 빚어낸 비극이다.

의도된 전쟁에서 육군 총참모장도 개인에 불과하다. 의도된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채병덕이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채병덕의 목숨을 앗아간 그 총알이 누구의 총구에서 나왔든지 말이다.

 

 

2번 국도 (진주방향)

 

2번 국도 (하동방향). 하동전투는 2번 국도 상의 하동고개에서 벌어졌다. 지금의 2번 국도는 하동고개 아래 쪽에 있다. 따라서 채병덕 장군이 죽은 곳은 옛날 2번 국도 하동고개이다. 지금은 접근이 용이한 이곳에 채병덕 장군의 전사비를 세워놓았다.

 

하동군 호국공원

 

안내문

 

저 위로 구 2번 국도가 나있다.

 

 

 

참전전우기념비

 

 

 

 

 

 

 

 

 

 

 

 

 

 

 

 

 

 

 

 

 

 

 

 

 

미군 제29독립연대 장병 충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