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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신라 산성

옥천 굴산성 : 신라 굴현의 치소

<2013년 11월 30일>

 

 

 

<표제사진 - 굴산성에서 바라본 보청천과 우측의 백화산. 백화산에는 금돌성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자비마립간 13년(470) 삼년산성을 쌓았다."

 

"자비마립간 14년(471) 봄 2월에 모로성을 쌓았다."

 

"소지마립간 8년(486) 봄 정월에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았다. 일선계(一善界) 장정[정부(丁夫)] 3천 명을 징발해서 삼년(三年)과 굴산(屈山) 두 성을 고쳐 쌓았다."

 

신라군은 상주에서 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상 중에서도 해발 고도가 제일 낮은 지역인 중화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토대로 삼년산성을 축성한다. 470년 삼년산성의 축조는 신라가 남부여와 고구려의 분쟁지역 중심으로 들어오는 일대 반도 각축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신라는 남부여와는 금강 연안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는 금북정맥을 넘어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에서 대립하게 된 것이다.

신라군은 다음해인 471년 모로성을 축조한다. 모로성은 보은 마로면의 관기리산성으로 추정되는 바, 이는 신라군이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을 따라 남서진하는 계기가 된다.

 

486년에 이르러 <삼국사기>에 일선주(지금의 구미 선산읍) 장정 3천을 동원하여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한 기사가 나온다. 삼년산성은 지금의 보은읍에 있는데, 굴산성은 어디일까?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을 보면, 지금의 보은읍 일대인 삼년산군의 영현으로 살매현과 굴현이 나온다. 살매현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 유역인 지금의 충북 괴산군 청천면 일대로 추정되며, 굴현은 금강 지류인 보청천 중하류 유역인 지금의 충북 옥천군 청성과 청산면 일대로 비정된다. 굴산성은 굴현의 치소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굴산성 개축 기사로 추정컨대 신라군은 471~486년 사이에 보청천 일대를 완전 장악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필자는 2010년 4월의 <옥천 굴산성과 저점산성(1)>의 글에서 굴산성의 입지를 남부여의 인후(목구멍)를 겨눈 칼로 비유한 바 있다. 그리고 굴산성 개축 시점을 '성왕의 비극'이 잉태되는 순간으로 묘사한 바 있다.

 

보은읍의 서쪽인 수한면에서 발원하여 크게 역U자를 그리며 보은읍을 관통한 보청천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발원한 삼가천과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산성 바로 남쪽 아래에서 합강한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관기리산성을 <삼국사기>의 모로성으로 추정한 바 있다.

보청천은 관기리산성에서 남쪽으로 급격에게 떨어지다가 중하류 유역인 지금의 옥천 청산과 청성면에 이르러 거대한 퇴적평야를 만든다. 이곳부터 보청천의 흐름은 천천히 서류하다가 다시 협곡을 만나 요동치다가 종국에는 청성면 합금리 부근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합금리란 금강에 합류한다는 뜻일 터.

 

실제 신라군은 보청천의 지형을 잘 이용하였다. 보청천 유역에서 남부여 관내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굳이 남부여 경계로 들어간다면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1) 남쪽으로는 팔음지맥의 뿌리가 무더기로 산군(山群)을 이루어 금강 유역으로 나아가려면 고개만 해도 서너개를 넘어야 했다. 과거 1970년대 경부고속도를 개통할 당시 경부고속도로에는 터널이 드물었다. 그런데 유독 금강유원지 지나 옥천과 영동 일대에는 터널을 두 개나 뚫어야 하는 난공사로 인해 노동자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명박도 그때 공사의 어려움을 실토하며 자신이 터널 완공의 책임자라는 것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곳이 바로 굴산성 남쪽 팔음지맥의 뿌리가 무더기로 산군(山群)을 이룬 지역이다. 관산성 전쟁 당시 신라군은 아마도 하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과는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유사한 심정으로 이곳 산군락을 넘어 남부여군을 기습하였을 것이다.

2) 보청천을 따라 서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굴산성을 지나자마자 협곡이 가로막고 있다. 만약 남부여군이 매복해 있다면 신라군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협곡을 통과한 다음이다. 금강의 거대한 물줄기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좋다. 금강을 도하했다고 치자. 그런데 문제는 남부여군이 방어하던 관산성(지금의 옥천) 동쪽이 높은 산악지대라는 것이다.

관산성전쟁 당시 신라군은 실제 양동작전을 보이며 1)과 2) 두 가지 중 하나를 취하여 남부여군을 기습하여 관산성을 점령하게 된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2)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옥천 굴산성과 저점산성>의 글에서 굴산성의 지정학적 위치를 '비가역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즉 남부여가 굴산성에 입지하여 동쪽의 신라군을 맞는다면 이는 (남부여 입장에서) 배수진을 치는 꼴이 되어 굴산성이 포위되기라도 한다면, 퇴로가 막히는 꼴이 되어 후방 보급이 원할치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신라 입장에서는 남쪽으로는 영동 산악지대의 중요한 고개만 지키고, 서쪽의 협곡에 기습병만 배치하면 남부여의 후방은 간단하게 차단되는 꼴이 된다. 반대로 신라군이 굴산성에 입지하여 서로 보청천 하류의 협곡지대와 남으로 영동의 산악지대에서 기습적으로 백제를 공략할 수 있는 좋은 은폐지가 될 수 있다."

 

비가역적인 입지란 어느 일방에게 유리한 지형을 말한다. 굴산성은 남부여군에게는 방어나 공격 모두 불리하고, 신라군에게는 방어나 공격 모두 유리하다. 아무튼 남부여는 굴산성 공방 이전에 신라군에게 백두대간 이서지역인 중화지역을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남부여가 고구려와의 전투에 치중한 나머지 동맹군인 신라군이 중화지역에 안착하는 것을 허용하는 패착을 범했다. 결국 그 패착이 신라가 남부여의 인후를 노리고 숨통을 끊을 기회를 주고 만 것이다. 그랬다면 남부여는 성왕의 비극도, 멸국의 비운도 피했을 것이고 오히려 삼한통일은 남부여가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한번 중화지역으로 들어온 신라군은 한번도 이곳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것은 중화지역 남쪽에는 금돌성을, 북쪽으로는 삼년산성을, 그리고 서쪽으로는 보청천을 따라 마로성과 굴산성으로 완전 요새화한 덕분이다.

이로써 백년간에 걸친 삼국의 대회전은 이때 이미 게임오버였다.

 

오늘은 관기리산성에 이어 보청천을 따라 굴산성을 답사하였다. 그리고 보청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고당리 및 합당리 부근을 둘러보았다.

 

 

 

 

굴산성 전경(옥천군 청성면 소재지)

 

 

굴산성 뒤쪽의 저점산성. 굴현의 치소인 굴산성은 평지성으로 볼 수 있고, 저점산성은 농성인 산성으로 볼 수 있다. 굴산성은 이중적인 성의 구조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신라군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청성초등학교. 면소재지 관통 도로. 과거 굴산성 성벽.

 

 

초등학교 앞에는 마을자랑비가 서 있다. 이곳 비석도 면소재지가 굴산성임을 밝히고 있다. 지금은 청산면 소재지가 이곳 청성면 소재지보다 크지만 고대에는 이곳이 굴현의 치소다.

 

 

저점산성 등산로 입구 이정표. 실제는 청성초등학교에 주차하고 올라가면 된다. 오늘은 저점산성 답사는 생략하고 이곳 굴산성 주변만 둘러보았다.

 

 

마을도 굴산성 내부이다. 이곳으로 올라가면 굴산성 윤곽과 외부 전경도 살필 수 있다.

 

 

 

 

굴산성 성벽 윤곽

 

 

장대지 부근

 

 

 

 

굴산성 내부에서 바라본 저점산성 전경

 

 

 

 

보청천

 

 

정자가 무너진 모양이다.

 

 

 

 

급경사를 이룬 성벽

 

 

 

 

좌측이 청산면 일대

 

 

 

 

 

 

멀리 팔음산이 보이고, 우측으로 금돌성이 있는 백화산이 보인다.

 

 

 

 

 

 

 

 

 

 

 

 

 

 

 

 

멀리 백화산(금돌성)이 보인다.

 

 

 

 

 

 

 

 

 

 

 

 

 

 

 

 

 

 

 

옛 성문터로 추정된다.

 

 

 

 

우측 성벽

 

 

중앙

 

 

우측 성벽

 

 

백화산

 

 

저점산성과 그 아래 굴산성 좌측 성벽

 

 

 

 

저점산성과 좌측 성벽

 

 

도로 우측 성벽

 

 

맨 좌측의 저점산성, 도로 좌우측의 굴산성. 보이는 곳은 굴산성 남벽구간임.

 

 

산계교에서 바라본 굴산성. 도로에 의해 좌우로 양분되어 있다.

 

 

 

 

보청천 동쪽

 

 

보청천 서쪽

 

 

보청천 서쪽으로 이곳 청성 벌판을 지나자마자 바로 협곡이 시작된다.

 

 

보청천 서쪽

 

 

저점산성

 

 

보청천 동쪽

 

 

 

 

 

 

좌측의 저점산성과 그 아래 우측의 굴산성

 

 

 

 

산계교에서 505번 지방로를 타고 남쪽 궁촌재를 넘는다. 묘금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75번 지방도를 타고 보청천을 계속 추적한다. 그리고 양저교에서 보청천의 협곡을 만나다.

 

 

 

양저교에서 바라본 보청천의 협곡

 

 

 

 

 

 

 

 

양저교에서 바라본 보청천 서쪽. 이곳에서 서류하다가 합금리 원당교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원당교. 합금리 원당교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보이는 원당교 좌측 방향이 금강유원지 IC 가는 방향이다. 

 

 

원당교 부근에서 바라본 상류쪽 보청천.

 

 

<2017년 10월 28일>

 

 

<2018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