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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경상도)/김천,구미,칠곡

김천/무주 부항령성

<2019년 2월 24일>

 

 

 

 

 

부항령성은 김천과 무주가 공동 소유한 산성이다.

 

부항령은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숙뱅이와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가목을 넘나드는 고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항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항은 가마솥을 의미한다. 마을의 형상이 가마솥을 닮았다 하여 가목, 가매실. 한자로는 부항으로 불렸지만, 실제는 거북을 지칭할 수도 있다.

 

고대에는 부항령이 주요 수렛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덕산재로 신작로(30번 국도)가 나면서 백두대간의 오래된 고갯길인 부항령의 역할은 쇠락하고 만다. 1999년 12월 6일 삼도봉 터널이 개통되면서 김천에서 무주로 통하는 두번째 아스팔트 길이 생겼다. 그런데 하필 삼도봉 터널이라니 백두대간의 삼도봉과는 무려 7.4km나 떨어져 있는데. 부항터널 혹은 무풍터널이라 하기 힘들어 삼도봉 터널로 한 듯하다. 고뇌는 모르는 바 아니지만 콧웃음이 난다.

 

- 물고기 닮은 밭이 있는 어전리

 

월곡리 마을 입구에서 삼도봉터널 방면으로 가다가 좌측 어전령 아래 위치한 어전리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으로 속했는데 1895년 상서면으로 됐다가 1914년 신설된 부항면으로 편입됐다.
어전리는 김천최대의 김해허씨(金海許氏) 부위공파(副尉公派) 집성촌이다. 시조로부터 18세손인 공조참의 허시발(許時發)의 아들 허인(許仁)과 허경(許景)이 경남 합천의 삼가(三嘉)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집성을 이뤄왔다.
어전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 들판의 형상이 물고기와 같이 생겨 물고기어(魚)자에 밭전(田)자를 써서 어전(魚田)이라 했다고 하는데 산비탈에 둘러싸인 마을 앞 들판의 형세가 부항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을 따라 헤엄쳐 나가는 물고기의 형상을 어김없이 닮은 듯하다.
마을중앙에는 김해허씨 재실로 입향조(入鄕祖) 허인(許仁)을 제향하는 경모재(景慕齋)가 높이 솟아있다. 이 가문에서는 철원부사를 역임한 허연(許然)을 비롯해 중추원참의 허진구(許軫九)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부항령을 경계로 전라북도 무풍면 금평리와 이웃하고 있는 어전2리 가목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한 부항리였는데 1895년 상서면이 되고 1914년 상서면, 하서면이 통합해 새로 면을 신설할 때 이 마을의 지명을 따서 부항면으로 했다. 이때 면의 지명과 마을지명이 같으면 혼란이 생긴다고 인근 어전리로 폐합했다가 1963년에 어전2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부항령과 백도래산의 비탈진 자락에 위치해 교통여건이나 마을로서의 입지 조건이 용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년까지 100가구에 육박하는 큰 마을을 유지했다.
가목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의 형국인지라 가마부(釜)자에 목항(項)자를 써서 부항(釜項)이라 하고 우리말로 가마목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목이라 불리게 됐다. <김천신문,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 부항면 편, 권숙월 기자>

 

어전리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어전(漁田), 어전리, 어전골

임진왜란때 허인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피난와서 보니 들판의 형상이 마치 물고기처럼 생겼다 하여 어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 마을 이름이 없을 때 어떤 도인이 이 마을에 와서 보니 동네 서쪽의 작은 폭포수 아래에서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놀고 있어 어전이란 마을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어전재·어전령은 어전리 서쪽에 있는 고개로 경상북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신라군과 백제군이 싸웠던 재라 한다. <김천시사(1999년)>

 

가목, 가매실, 부항(釜項)

마을이 위치한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매실이라 하다가 지금은 한자로 부항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가목이라 하는데, 이는 가매목에서 중간의 매자를 버리고 가목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가목재에서 감내의 큰 줄기샘이 발원한다. 마을이름의 기원으로는 가마-가미-거무(거미)-거북의 의미 상통함으로써 농경사회에서의 숭배대상인 거북 신앙 곧 물신앙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마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삼도봉터널(391m : 경북 151m, 전북 240m)이 개통되어 인근의 삼도봉과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김천시사(1999년)>

 

기록

 

진덕왕 1(647) 겨울 10월에 백제의 군사가 무산(茂山)[()]·감물(甘勿)[동잠(桐岑)[]의 세 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유신(庾信)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하여 기운이 다 빠졌는데, []유신의 부하 비령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공격하다가 죽었는데,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의자왕 7(647) 겨울 10월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甘勿)과 동잠(桐岑)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군사들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군을 크게 격파하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무산성(茂山城감물성(甘勿城동잠성(桐岑城) 3성을 에워싸자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게 하였다. 고전하다가 기운이 빠지니 []유신이 비령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상황이 급박하구나.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분발시키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비령자가 절을 하며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아들 거진(擧眞)과 종 합절(合節)이 그를 따랐고 검과 창을 부딪치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감격하여 나아가 싸워 적병을 크게 물리쳤으며, 3천 명을 참수(斬首)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

 

진덕왕(眞德王) 원년 정미(丁未, 647)에 백제가 많은 군사로 무산성(茂山城감물성(甘勿城동잠성(桐岑城) 등을 공격해 왔다. []유신(庾信)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을 막았다. 백제 군사는 매우 날쌔어, [신라군은] 고전(苦戰)하였고 이기지 못해 사기가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비령자>

 

진덕왕 2(648) 3월에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의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腰車)[()]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왕이 이를 근심하여 압독주(押督州)의 도독(都督)[()]유신(庾信)에게 명하여 이를 도모하게 하였다. []유신은 이에 사졸(士卒)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거느리고 나아갔다. 의직이 이에 대항하자 []유신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挾擊)하였다. 백제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는데, []유신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상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때 김유신(金庾信)은 백제의 장군 8명을 사로잡아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될 때 죽은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유해(遺骸)와 교환하였다. 그리고 승세를 몰아서 백제의 경계 안으로 쳐들어가서 악성(嶽城)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0,000명을 죽이고, 9,000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조 참조.

 

의직은 647(의자왕 7) 10월에 무산성(茂山城) 전투에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에게 패하였고, 6483월에 신라의 요거성(腰車城) 10성을 함락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 옥문곡(玉門谷)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하였다. 660(의자왕 20) 6월 백제가 멸망할 때에는 좌평(佐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