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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 (충청도)/대전, 옥천

대전 백골산성 : 태자 부여창의 군대가 고립되어 학살당한 비통한 산성

<2021년 2월 27일>

 

 

<2008년 10월 25일>

 

백골산성은 이름 그대로 무시무시한 산성이다. 산성 오르는 길에 필자는 끊임없이 념을 했다. 원귀를 달래려는 끝없는 념!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볼 수 없다. 수많은 주검들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대청호반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천 오백년전에 3만에 가까운 남부여 군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남부여와 신라인들은 서로를 그토록 용납할 수 없었던가?

옥천읍에서 4번 국도를 타고 삼양교 부근에 들어서면 산성의 트라이앵글(관산성, 서산성, 삼양리산성)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고대 신라의 최전방 서부전선이다. 적들이 이 트라이앵글 지역으로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세방향에서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바로 고슴도치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호시탐탐 노려보던 곳이 있다. 바로 옥천군 군북면 소재 노고산과 고리산이다. 이곳 노고성과 환산성에서 빈틈만 보이면 바로 산성의 트라이앵글 지역으로 들이닥칠 태세였다.

554년(성왕 32년) 남부여 군주인 성왕의 태자 창이 이곳 환산성에서 산성의 트라이앵글 지역을 돌파하려고 3만의 군대를 동원했다. 하지만 오히려 협공을 당하고 있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이 이끄는 신주(지금의 충북 진천 일대)의 군대가 증원되어 환산성 배후에서 태자 창의 군대를 위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왕은 항산현성(지금의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산성)에서 태자 창을 독려하려고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밤을 타 환산성으로 향하던 중 구천(지금의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서화천 일대)에서 신라 복병을 만나 그 자리에서 참수되고 만다.

졸지에 군주를 잃은 남부여군은 사기가 꺾여 비통해하던 와중에 환산성 배후에서 태자 창을 노리던 김무력 군대의 급습을 받는다. 태자마저 적의 포로가 될 경우 남부여 왕조의 운명은 가늠하기 어려워 환산성의 배후 산성인 백골산성(당시에는 무명산성)에서 김무력 군대를 피로써 막았다. 겨우 태자 창은 사비성으로 돌아왔지만 3만의 군대는 협공으로 몰살을 당한 것이다. 태자 창의 퇴로를 뚫기 위한 백골산성 전투는 남부여 군인들의 피맺힌 원한을 남긴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백골산성의 이름만이 남아 남부여 청년들의 피맺힌 죽음을 기려줄 뿐이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말이다.

 

 

백골산 정상 직전의 길, 이곳이 바로 백골산성의 동벽이다.

 

 

 백골산성 동벽

 

 

 

 백골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대청호, 남부여 군대의 학살과 대비될 정도로 아름다운 가을의 대청호반

 

 

 대청호, 바로 이곳으로 신라의 김무력 군대가 급습했을 것이다. 백골산성이 함락되면 남부여 태자인 창의 퇴로가 막힐 참이다.

남부여 군대는 이곳 백골산성에서 내려와 김무력 군대의 급습을 저지했을 것이고, 그 결과 지금의 대청호 밑에는 당시 남부여 군인들의 주검들이 즐비했을 것이고 남부여 주민들은 이곳을 백골산이라 부르며 병사들을 위로했을 것이고 산라에 대한 복수의 념을 키웠으리라.

 

 

늦가을로 넘어가는 백골산과 대청호

 

 

 대청호는 기억할까? 백골산은? 3만 남부여 병사들의 원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