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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백제 산성

청양 우산성 : 남부여부흥군의 든든한 후방기지

<2009년 7월 5일>

 

충청도라는 고유지명에는 지금의 충청북도만을 가리키는 '충주+청주'의 의미 이상이 없다. 즉 충청도는 지금의 우리가 인지하는 것과는 달리 단어상 의미에는 충청남도를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리지널 충청도는 오히려 지금의 충남이라고 볼 수 있고, 여기에 적합한 단어는 '내포'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청도라고 불리울까? 그런데 옛날에는 홍청도라고 불러 '홍주(지금의 홍성)+청주'의 의미로 불려 전 충청지역을 대변하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홍청도'라는 말이 왜 사라지고 '충청도'라고 불렸을까? 지금은 우리가 호남을 반역의 고향으로 많이 부르지만(여기에는 동학농민전쟁, 광주학생의거, 여수순천반란사건, 518민주화운동 등 근현대 반봉건반외세반독재 운동이 호남에서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긴 비교적 근대적 관념의 산물이다.), 옛날에는 충청도가 반역의 고향이었다. 특히 내포지역은 통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수로가 발전하여 중앙 조정에서 보면 골치의 대상이었다. 홍주(지금의 홍성)는 내포의 대표적인 도시로 홍청도의 첫머리에 나오는 도시다. 홍주를 중심으로 조선 중기까지만해도 홍주 인근지역에서는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는 내포를 격하시키는 의미로 홍주 대신 충주를 넣어 행정의 체계를 잡은 것이다. 지금의 내포민 입장에서는 왜곡된 행정지명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러한 내포의 반역의 기운은 그 연원이 매우 깊다. 아마 그 시초가 남부여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남부여 부흥군이 내포의 풍부한 물자를 기반으로 강고하게 신라군에 맞섰던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가 삼한통일 위해 견훤의 후백제와도 악전고투의 전쟁을 치룬 기억들도 한몫했을 것이고...

남부여 부흥군은 사비성의 남북 즉 금강 남북에서 동시 항전을 전개하였던 바, 사비성 함락 직후에는 그 근거지가 칠갑산을 위시한 내포 지역이었다. 오늘 찾아가는 청양의 우산성은 이러한 남부여 부흥군의 든든한 배후 기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 북변에서 사비성을 향해 압박해 들어가던 참호성들의 후방기지였던 청양의 우산성을 오르기로 한다.

 

은산 별신당, 우산성 가기 전에 남부여 부흥군의 죽은 원혼을 기리는 은산의 별신당에 들러 념을 올렸다. 은산별신제의 기원은 남부여부흥군이 별신당 뒤산 토성인 당산성에서 많이 죽자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형식은 장군제를 취하고 있다.

 

 

은산별신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이다.

충청남도 부여에서 서북쪽으로 8km를 가면 은산면 은산리가 있다. 이 지역에는 마을 사당인 별신당에서 오래 전승되어 오는 별신제란 향토신제(鄕土神祭)가 있는데 이것이 은산별신제이다.
옛날 은산 마을에 큰 병이 돌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어느날 밤 마을 어른의 꿈에 백제를 지키다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 나타나 병을 없애줄테니, 자신과 부하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달라고 했다. 꿈에서 깨어 장군이 말한 곳으로 가 보니 오래된 뼈가 잔뜩 널려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뼈들을 잘 묻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굿을 했다. 그 후 병이 사라졌고,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마을사람들은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는 뜻으로 제사를 지내왔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은산별신제이다.
별신제는 2년에 1번씩 1월 또는 2월에 열리고, 보통 15일동안 약 100여 명의 인원이 참가한다. 제사에 앞서 마을 어른들은 제사를 준비하는 임원을 선출한다. 임원은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대장, 중군, 패장, 사령 등 군대조직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데 이것은 은산별신제가 장군제(將軍祭)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제물을 준비하는 화주(化主)는 제물에 부정이 타지 않도록 조심하고, 제사에 쓰일 우물에 멍석을 덮고 주위에 금줄을 친 후 노랗고 검은 흙을 뿌려 부정의 접근을 막는다. 마을 장승 옆에 세워 둘 나무를 베는 ꡐ진대베기ꡑ를 하고, 신에게 올릴 종이꽃을 만들어 제물과 함께 당집으로 향하는데 제물을 나르는 사람들은 부정을 막기 위해 입에 백지를 문다. 제사는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데, 무당이 굿을 한 후 마을로 내려와 마을의 번영을 위해 거리제를 열고 마을 동서남북에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규모 행사답게 의상, 소도구, 장비가 다양하게 동원된다.
은산별신제는 백제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마을의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는 향토축제이다.
별신제는 매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윤달이 든 해의 음력 정월 또는 2월의 좋은 날을 택해서 마을 북쪽에 있는 당산(堂山)의 산제당(山祭堂)에서 거행한다. 이 산제당에서 매년 산신제(山神祭)를 지내고 있으며 별신제도 같은 당(堂)에서 지내게 된다.
별신제를 지내려면 마을 원로들이 그 해의 별신제 임원을 선정해서 동짓달 무렵부터 준비에 들어간다. 임원은 대장(大將), 중군(中軍), 패장(稗將), 사령(司令) 등 군대조직의 명칭으로 불려지는데 은산별신제가 장군제(將軍祭)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임원들은 부정이 없는 사람들로 선정하며 일단 임원으로 선정이 되면 겨울날에도 목욕재계를 하는 엄격한 금기를 지켜야 한다. 제물을 장만하는 임원을 화주(化主)라고 하는데, 제물에 부정한 일이 있으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제사를 지낸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탈을 입게 되므로 심신을 단정하게 하고 부정을 멀리 한다. 그래서 제사에 쓰는 우물에는 멍석을 덮어두고 근처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놓아 부정의 접근을 막는다.
별신제는 먼저 제사에 쓸 술을 담그며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날에 마을 동서남북에 있는 장승 옆에 세워둘 나무를 베는 의식인 진대베기가 있다. 이 의식은 은산에서 약 1~20리 안에 있는 산에 가서 미리 나무를 물색해 두었다가 진대 베는 날에는 대장 이하 임원들이 말을 타고 행군해서 산신에게 고사하고 나무를 베어 돌아오게 된다. 진대 베러 갈 때는 요란하게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울리며 나무는 화주집에 임시로 세워둔다.
제사의 2, 3일 전에 꽃받기가 있다. 별신제에는 종이꽃을 만들어 큰 꽃다발을 신에게 올리는데 이 꽃을 수 개월 전에 미리 주문해 둔다. 꽃은 인근 절이나 꽃을 만드는 화장(花匠)의 집에서 만드는데 어느 경우나 부정없이 정성껏 만들어 올리게 된다.
제사는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데 강신(降神)을 위해서 무당이 별신축원굿을 하고 다음날에는 거리로 내려와 시장 복판에 있는 고괴목(古槐木) 앞에서 시장번영을 비는 거리제가 있고, 마지막날에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행사는 끝난다. <부여군청 홈페이지 인용>

 

 

은산면 소재지에서 칠갑산으로 거슬러 가는 지천을 따라 군도와 지방도를 타고 청양읍내로 들어섰다. 우산성 초입의 공원, 옆에는 청양초등학교가 있고 그 뒷길로 우산성을 오를 수 있다.

 

 

15분 정도 오르면 팔각정이 나온다. 청양 읍내가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 온다. 멀리 보이는 산이 바로 칠갑산 자락이다.

 

 

 

 

 

 

 

 

우산성 표지기

 

 

 

우산성 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