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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백제 산성

김제 만경읍성 : 백제 두내산현의 치소

<2010년 4월 25일>

 

매년 지평선 축제가 열리는 김제 성덕면 남포리에 서서 광활면 일대를 바라보고 있다. 말 그 대대로 광활 그 자체다. 고대 바다였을 이곳에 서서 우리 역사 공동체의 위대한 생명력을 느낀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만경강과 동진강 일대 고대 성터를 답사해도 그 유기적 연관성은 찾지 못했다. 책속에서 아무리 주류성과 피성을 찾을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나무는 그만보고 숲을 보자. 이번 역사 기행에서는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에 점처럼 포진하고 있는 고대 성터에 대해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하기로 한다. 성공적이기를 빌며 첫발을 내 딛는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만경강 유역으로 먼저 시선이 간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따르면, 남부여 벽골군에는 속현이 넷이 있다. 수동산현, 내리아현, 두내산현, 무근촌현이 그것이다. 4현 모두 벽골군의 북쪽인 만경강 하류 연안에 접하여 만경강을 도하하려는 적들을 방어하려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다만 지금의 김제 성덕면 소재지인 무근촌현만이 벽골군의 서방에 위치하는 바, 앞서 3군과 목적은 다를 바 없다. 서해에서 동진강을 거슬러 신평천으로 진입하여 벽골군을 침탈하려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무근촌현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동진강을 거슬로 올라오려는 적선이 있다면 무근촌현의 남포에서 한달음에 남부여의 군선들이 신평천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각 현 내에는 만경강 연변의 전술적인 보루성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벽골군 주위에도 전술적인 보루성들이 있다. 따라서 적들이 벽골군 중심지에 도달하려면 최소한 3겹의 방어선을 뚫어야 가능할 것이다. 현보루성-현성-벽골군 보루성의 3겹 방어막은 벽골군을 남부여 일개 군의 중심지 지위와는 사뭇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남부여 수도인 사비성 버금가는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혹 남부여 부흥군의 도성 역할을 했던 주류성 내지 피성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추론해 본다.

 

호남고속도로 김제IC에서 나와 군산방향의 23번 국도로 애마를 몰았다. 21번 국도와 23번 국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북으로 2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첫번째 우회전하면 김제 공덕면 소재지가 나온다. 소재지 반대 방향으로 아스팔트를 따라가다 송정마을에서 우회전하면 공덕면 저산리 저성마을이 나온다. 저성마을에는 저성이 있다. 저성은 공덕면 제말리 이성과 더불어 남부여 내리아현의 만경강 연안의 보루성으로 사료된다. 내리아현은 지금의 김제시 청하면 월현리 성남마을 매봉재에서부터 석한부락까지 이어진 성터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때는 이성현으로 지금의 공덕면 제말리 방향으로 이동한다. 이는 평화시기 물자 교역을 위해 수로를 중시한 결과다. 아무래도 만경강 연안에 근접한 지금의 공덕면 제말리 이성이 남부여 시절 방어를 위해 선택하였던 내리아현성 보다는 유리하였을 것이다. 결국 전통의 내리아현 보다는 이성이 도시 규모가 더 커졌으며, 지금도 이성은 속칭 이성장터로 불리며 과거 물물교역지로 각광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송정마을에서 바라본 저성. 기록에는 공덕면 제말리에 이성성터(속칭 이성장터)가 있다고 하나, 저산리 저성마을 뒷 구릉도 고대 성터로 보인다. 이곳은 북으로 만경강이 연접하고 있어 이성과 더불어 방어 요새화할 필요성이 있을 듯하다. 이성과 더불어 실지 답사가 요구된다.

 

 

 저성과 저성마을. 저성은 한자로 '돼지 저'를 쓸 것 같다. 즉 돼지가 웅크려 누워있는 형상을 두고 붙인 이름 같다.

 

 

 가까이서 본 저성과 저성마을

 

 

 저산리 동자마을 가는 중 뒤돌아 찍은 저성. 멀리서 보아도 오른쪽에 토성곽이 보인다.

 

 

 저산평야. 만경강 제방을 보고 한컷.

 

 

 

 동자교 앞에서 찍은 수로. 아직 물이 흐르지 않아 조금 더럽다.

 

 

수문교

 

 

 수문교에서 바라본 저성

 

 

 만경강 제방 안의 논. 들판인지 강인지 구분이 안된다. 고대에는 이곳도 습지로 강안이다.

 

 

만경강 제방 도로에서 바라본 저성

 

 

 만경강과 갈대밭

 

 

 목천대교. 23번 국도로 익산시로 향한다.

 

동지산리 토성도 남부여 시절에는 내리아현의 보루성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신창진이라는 포구도 있어 수군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만경강을 도하하려는 적들에게 강위에서 맞불을 놓을 심산인 것처럼 남부여 부흥군의 눈은 이글거렸을 것이다.

 

 

 동지산리 토성과 만경강.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는 해발 28.9m의 나즈막한 산을 테머리식으로 두른 토성지이다. 산 이름은 '척산(尺山)' 곧 우리말로 '잣뫼'를 뜻하며 바로 옆에 신창진을 거느리고 있다.

 

 

 동지산리 토성

 

 

 동지산리 토성 앞의 만경강. 갈대 밭으로 채워져 있다.

 

 

토성 내부,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소나무 한그루가 운치있게 토성을 지키고 서 있다.

 

 

만경강 변으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척산마을을 물과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산성 내부에 조그마한 흙 구릉이 있는데, 혹 고대 무덤은 아닌지 모르겠다.

 

 

 동지산리 토성에서 왼쪽의 저성과 오른쪽의 이성이 보인다. 지금은 두 성 사이로 21번 4차선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김제 청하면 동지산리 척산마을

 

 

 토성 내부. 지금은 계단식 밭으로 이용되지만, 고대에는 성곽일 수도 있다.

 

 

토성 전경

 

 

 동지산 마을에서 바라본 토성 전경. 좌측이 만경강이다. 신창진이라는 포구도 있었다고 한다.

 

청하면 경계를 넘자마자 서쪽으로 입석산이 나타난다. 입석산 너머는 강이라고 하기에는 넓은, 바다라고 하기에는 좁은 만경강의 밀물과 썰물이 시간의 진공을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메우고 있다. 입석산에는 입석산성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남부여 두내산현의 관할이다. 입석산성은 두내산현성의 만경강 외곽 보루성이다. 두내산현은 현성이간 하지만 만경강 연안과 무척 가까워 만경강 1차 방어선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지금은 석소제방으로 바닷물을 막고 있지만, 고대에는 깊은 만을 이루어 만경강 제1의 포구라 칭할 만하다. 그러나 전쟁시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경강 어귀의 망해사 부근에 수군을 배치하여 만경강의 적선 침탈을 방어하였다. 지금도 전선포라 하여 마을 이름에 남아있다. 후대에 왜를 막기위해 수군을 배치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남부여 부흥군이 신라와 당나라 군대의 수군을 막기 위해 전선이 상주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김제 청하면에서 만경읍 가는 도로 중간에 입석산이 보인다. 입석산(61.7m)은 청하면 장산리와 만경읍 소토리 경계상에 있다. 입석산은 남쪽으로 와석산(56.2m)와 바로 연결되어 일체의 성을 이루고 있다.

 

 

 

 

 

입석산

 

 

입석산성 원경

 

 

입석산 아래 청하면 장산리 신금마을. 정면은 신금교회.  

 

 신금마을

 

 

 입석산과 와석산이 연결된 지점의 성터

 

 

 

 

 

 와석산 남쪽의 율산

 

두내산현은 지금의 만경읍 소재지에 치소가 이었다. 만경읍 두산을 중심으로 쌓은 퇴메식 산성이다. 지금은 주민들의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입석산성에서 만경읍까지는 자동차로 3분이면 족하다. 만경읍내 들어오기 전 좌회전해서 들판에서 남부여 시절 두내산현성이 소재했던 만경읍사무소 뒤산인 두산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두내산현성 옆에 아파트가 더 높이 올라갔다.

 

 

 좌로부터 율산, 와석산, 입석산이 보인다. 입석산성은 두내산현성의 외곽 방어성이다.

 

 

 동쪽에서 바라본 두내산현성

 

 

 동문 방향

 

 

두내산현성 옆의 능제, 능제 건너편 남쪽이 김제 성덕면으로 남부여의 무근촌현성이 있다.

 

 

 만경초등학교 옆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능제, 동쪽 건너편에 김제시가 자리잡고 있다. 남부여 벽골군 치소가 있었다.

 

 

 오늘은 다리를 못건너겠네! 바쁘다 바빠!

 

 

 두내산현성 내부로 진입하니 모자상이 있다.

 

 

 체육시설

 

 

팔각정에서 바라본 능제

 

 

 

 

 현성의 건물터 자리는 농구장으로 변신하고,

 

 

 

 

 

 

 

 

 

 

 건물터는 밭으로 변모하고,

 

 

 

 

 

 

 연화사 대웅전, 절로 변신하고,

 

 

 

 

 

 

 

 

 동문 입구에는 폐가가 보이고,

 

 

 만경초등학교 뒤로 능제가 보이고,

 

 

 

 

소나무 산책길, 사색하다 보면 아파트가 보이고,

  

 

 두내산현성의 서녁, 만경창파로세!!

 

 

 북쪽 성곽

 

 

 북쪽 성곽터를 내려오면 69년에 새겨 놓은 '휴암' 자국이 선명하다. 남부여의 고단한 병사들이여! 두내산에서 영원히 휴식을 명하노니 그대들 손에 쥔 창칼을 휴암에 내려놓고 어머니 품 같은 고향들로 내 닫게나!

 

 

1969년산 휴암, 남부여 부흥 전쟁은 AD 663년에 끝났는데, 남부여 병사들에게 휴식은 1969년에 명한 걸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석소제방 방면인듯, 만경창파의 진수를 보는구려!

 

 

산성과 아파트, 신구의 기념물이 아이러니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