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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 (충청도)/아산, 천안

천안 동성산성 : 신라 신주의 군대를 막던 구리 성문은 어디에 있을까?

<2010년 5월 9일> <2021년 1월 23일>

 

<표제사진 - 광터골(도원2리) 마을에서 바라본 동성산성 전경>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신주 방면 행군 총관이 되어 일찌기 군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 여명의 목을 벤 일이 있고,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만노군 태수가 되어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데리고 함께 가버렸다. 당시 신라 골품제하에서 가야 왕족 출신임을 감안하여 진골로 대우받았던 김서현과 신라의 완전한 성골 가문인 만명의 결합은 야합으로 비난받았다. 야합은 말 그대로 들에서 개들처럼 남녀가 교합하는 것이다. 김서현의 노골적인 정략 결혼에 대해 신라 조정과 언론은 그야말로 야합이라며 비난을 금치 않았다. 이러한 비난과 신라 왕실 및 귀족들의 천대에도 굴하지 않고 김서현은 만명과의 정략 결혼을 일 방편으로 하고 아버지 김무력처럼 신라 국경의 확장을 통해 가문 번창의 기회를 꿈꾸는 야심가였다.

 

오늘 답사를 계획하는 백제의 동성산성은 이러한 김서현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바로 김서현에게 신라 왕이 부여한 만노군 태수는 다름아닌 전방 총 사령관이다. 아버지 김무력이 개척한 신주를 발판으로 아들인 김서현도 만노군(지금의 진천) 태수로서 백제의 대목악군(치소는 지금의 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 주창장 자리인 남화리토성)을 쓰러뜨리고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자신의 가문을 번창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신라군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는 천안시 병천면 광기천과 동면 녹동천 일대에 거대한 장벽을 쌓았는 바, 그 중심성이 바로 천안 동성산성이다. <전국유적목록>에는 ‘동성산의 정상에 있으며, 토루와 석루로 이루어져 있고, 주위가 약 500간이다.’라고 하였으며, <문화유적총람>에는‘동성산의 정상에 성을 쌓고 성문은 동으로 만들었다 하여 동성 혹은 '구리성'이라 한다고 전한다. 길이 800m 정도이며 일명 농성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동성산성은 '구리 동'자를 써 일명 '구리성'이라고도 한다. 이는 구리로 성문을 만든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구리성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다.

 

성의 주향은 동향으로 이는 만노군의 신라군을 방어할 목적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산성의 내부에는 50×20m의 경작지가 있고 이곳에서 무수히 많은 백제시대의 토기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던 자리라고 생각된다. 문자리는 동벽의 중간 부분에 현재 2m정도의 흔적이 있으며, 꼭대기 부분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산 등성이 위에 또 하나의 문자리가 있다. 성 내부에서 승석문·격자문·파상문등의 백제토기 조각이 많이 나왔다.

 

한편 산성의 꼭대기에서 남향한 산등성이에는 백제시대의 토기조각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으며 거의 완형에 가까운 토기들도 주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도깨비는 몇 개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의 남향에는 백제시대의 옛 무덤군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는 그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아무튼 김서현은 자신의 야심을 다 이룬 것 같다. 만노군(지금의 진천) 치소에서 삼한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이 태어났고(AD 595년), 백제의 대목악군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여 영역 확장에 성공하였으니 말이다.

 

 

 

광덕2리 버스정류장에 있던 지도. '구리성이'라는 마을 지명도 보인다. 이는 동성산성의 입구가 지금 '구리성이' 마을 방향이란 것을 암시한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광덕산성과 동성산성이 대치하고 있었다는 간접 증거다.

 

 

순대로 유명한 병천면 소재지에서 6번 시도를 타고 광기천을 따라 가다 보면 광터골 가는 도원교가 나온다. 뒷산이 화계리(도원리)산성이다.

 

만뢰산의 남쪽 능선 중 하나가 광기천의 동쪽으로 흐르며 몽각산-광덕산-동성산을 이룬다. 이곳 동성산 근처에 이르러 제법 넓은 들이 나오는데 이곳이 광터골이다. 한자로 광기라고 부른다. 광기천을 따라 산성들이 즐비한 것을 보면 삼국시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국경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광터골(도화2리) 숲

 

숲에서 바라본 동성산성 전경, 아래마을이 광터골.

 

숲에서 바라본 도원리산성
병천면 도원리에서 동면 화계리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 있는 약수터. 유량이 풍부하고 5월 땀을 식히기엔 차다.

 

고개 가는 진입로

 

 

 농가 창고를 지나 나타나는 진입로.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하였으나 인공 구조물일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광터골 고개는 천안 병천면 도원리와 동면 광덕리를 잇는 고개이다. 과거에는 통행량이 많았을 듯하다.

 

 

돌무더기. 아마 남부여는 동성산성과 도원리산성을 잇는 허리로 광터골 고개를 중시하여 인공 요새화하였을 가능성이있다. 동쪽의 강력한 적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남북의 산 능선을 산성화하는 경우는 노동력 낭비일 것이다. 따라서 동편의 동면 광덕리에 소재한 광덕산성에 신라군이 진주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 답사하려는 동성산성이 동쪽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광터골 고개. 좌로 진행하면 동성산성, 우로 진입하면 도원리산성이다. 오늘은 동성산성만...

 

 

 5분여 오르면 무덤이 나타나고 그 뒤로 계속 오르면 된다.

 

 

된비알을 오르고 나면 나타나는 봉우리. 바닥이 평탄하여 장대지였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산성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무심히 지나쳤다.

 

 

북으로 계속 나가면 동성산 가는 길이다.

 

 

 30번 철탑  부근에서 바라본 작성산. 작성산성이 있다.

 

 

 광터골 마을. 오른쪽으로 광터골 숲이 보인다.

 

 

 광터골 들

 

 

철탑들이 이어진 곳으로 모습을 드러낸 도원리산성

 

 

29번 철탑에서 바라본 병천면 소재지 일대. 들판 한가운데 산이 병천면 소재지 뒤산. 그 뒤로 좌측에는 세성산성이 있는 세성산(218.0m). 그 뒤로 이어진 능선은 금북정맥으로 천안시를 동쪽으로 감싸 남쪽으로 이어진다.

 

 

 좌편 도원산성, 우편 뒤 세성산성, 맨 마지막 능선이 금북정맥

 

 

중앙에 있는 산이 병천면 소재지 뒷산

 

 

 

 

 

 산성 내부 산책로

 

 

 토기 조각

 

 

30번 철탑

 

 

30번 철탑 부근에서 바라본 동북방. 정면 보이는 산너머 우측으로 나무가지에 살짝 가려진 산이 천안 동면 광덕리 절골마을 뒷산으로 광덕산성이 소재하고 있다.

광덕산성을 신라군이 접수하지 않았다면 동성산성과 도원산성으로 이어지는 긴 장벽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 뒤 능선이 금북정맥의 지맥인 만뢰지맥으로 그 너므로는 지금의 진천군이다. 고구려(북부여)의 금물노군이던 곳을 신라가 점령하여 만노군으로 삼았던 곳이다. 신라군은 만노군을 전방 사령부로 하여 동쪽의 만뢰지맥을 넘어 이곳 광덕산성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덕산성과 동성산성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 철탑들이 만뢰지맥을 너머 진천으로 가고 있다.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광덕산성. 현대판 위장술인가? 신라군이 보이게 아래 나무를 베거라.

광덕산성과 동성산성 사이의 산도 산성이나 보루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석루의 흔적

 

 

 두릅인가?

 

 

 

 

 

 30번 철탑 공사하면서 나온 석재 부산물인가? 아니면 석루의 흔적인가?

 

 

 동성산 정상의 건물지 가는 길

 

 

 자기 조각(내면)

 

 

 

 

 자기 조각(외면)

 

 

 30번 철탑 부근에서 바라본 남쪽의 서림산(316.6m). 백제(남부여) 서림산성이 있다. 서림산성은 만뢰지맥상의 장교현을 넘어 신라군이 서쪽으로 침입해 왔을 때 방어하는 산성이다.

 

 

 동성산성 북부 주변에는 내성을 쌓았다. 내성터의 무덤.

 

 

 내성은 잡목들로 뒤덮혀 있어 지나기가 만만치 않다.

 

 

 잡목으로 가득한 내성

 

 

 

 

 

 

 

 

내성에서 외성으로 내려서면 건물터가 나온다.

 

 

 외성 건물터

 

 

 

 

 

 

 외성벽(서북벽)

 

 

 

 

 

 

 

 

 북벽 토루

 

 

 동벽 구간

 

 

 

 

 

 

 동벽 구간에서 바라본 내성벽

 

 

 

 

내성을 외성벽에서 한바퀴돌아 30번 철탑 원위치로 복귀.

 

 

 이 철탑을 이어가면 만뢰지맥을 넘어 진천으로 간다.

 

 

 

 

다시 되돌아 나간다. 처음 올때에는 산성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나 내성과 외성을 보고 산성의 연속으로 보고 있다. 광터골 고개까지 이어지고 도원산성까지 거대한 동쪽 장벽을 치고 있다. 광터골 고개 또한 요새화시켜 방어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금북정맥. 그 너머 천안 시가지가 있다. 정맥 앞 오른쪽 산이 목천읍(독립기념관) 뒷산인 흑성산지맥이다. 흑성산(504m)에는 흑성산성이 있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주차장은 남부여 대목악군의 치소가 있었던 남화리토성이 있다. 신라의 만노군(진천의 대모산성)과 남부여의 대목악군(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 주차장인 남화리토성)은 국경지대로 그 사이 동성산성과 광덕산성은 치열한 격전지였음이 분명하다.

 

 

 맨 뒷 능선이 금북정맥

 

 

 도원산성

 

 

병천들

 

 

 산불이 났는지 어린 나무들로 산책길을 채우고 있음

 

 

 불에 탄 나무가 시간이 지나 내부가 허물어 뿌러지고...

 

 

 예비군 참호

 

 

 '구리성이' 마을 부근인듯. 동성은 말그대로 구리성이다. 성문을 구리로 만들어 튼튼히 하였다는 뜻에서 '구리 동'자를 써 동성이다.

 

 

남쪽 장대지

 

 

 광터골 고개로 내려와 화계리쪽(올라올 때의 반대 방향)으로 나와 보았다. 건너편 산이 광덕산 줄기로 이 산 능선을 경계로 신라와 남부여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구리성문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구리성이 마을 계곡. 산불 이후 누군가 목장을 만들 요량으로 나무를 다 베어냈다. 이장 공고도 이와 유관한 듯하다.

 

 

'구리성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마을이 아니라 축사만 있다.

 

 

 맞은 편 마을은 동면 화계리 감절마을. 뒤 능선이 서림산성이 있는 서림산. 만뢰지맥상의 장교현을 넘어 지금의 녹동천을 따라 침입한 신라군을 남부여군대는 서림산성과 도원산성에서 방어하였을 것이다. 만약 이곳을 돌파하여 녹동천과 병천의 합류지점에서 솔림산성(청원군 오창읍 성재리와 천안시 병천면 송정리 경계)과 마주쳐야 한다. 

 

 

 도화산성으로 가는 철탑들.

 

 

요새화한 광터골 고개. 이는 하늘도깨비의 추정이다.

 

 

고갯길의 석축물

 

 

 단순한 고개길 이상의 토축물. 과연 우연히 생긴 지형일까?

 

 

외성의 흔적과 성문터. 물론 필자의 추론이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가려야 할 것 같다. 

 

 

 광터골 사거리에서 바라본 광기천 건너편의 작성산성

 

 

 동성산성 (오른쪽부터 28번, 29번, 30번 철탑)

 

 

오른쪽 길이 광터골 고개가는 길이다.

 

 

 도원산성

 

 

 동성산성과 그 아래 노은정

 

 

 동성산성과 그 아래 숲이 우거진 왼쪽 정자가 노은정이다.

 

 

 광기천에서 바라본 관성리 명성마을. 그 뒷산이 광덕산성이 있는 광덕산이다.

 

 

광덕산 맞은 편의 작성산성이 있는 작성산(497.0m). 작성산 아래에는 버드우드 C.C가 있다.  작성산성은 광기천을 사이에 두고 광덕산성과 대치하고 있다.

 

 

명성마을 뒷편의 광덕산 줄기. 광덕산성은 실사는 못하였지만 실제 산 전체가 요새화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