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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천안 광덕산성, 신라군 드디어 만뢰지맥을 넘어 병천 일대에 교두보를 쌓다

<2010년 5월 9일>

 

 

동성산성 답사를 마치고 만뢰산성 가는 길로 애마를 몰았다. 6번 시도로를 타고 광기천을 거슬러 오른다. 천안 병천면 봉항리 석항마을에 이르러 더 이상 만뢰지맥을 넘는 아스팔트 길은 없다. 석항 마을 뒤 시멘트 도로를 따라 석항소류지로 오른다. 더 이상 애마가 오를 수 있는 길은 없다.

 

애마가 멈춘 곳. 정면이 바로 만뢰산성 부근이다. 이 계곡을 타고 신라군은 언제든지 광기천 일대를 주름잡고 병천까지 즉 남부여의 대목악군을 언제든지 삼킬 기세다. 따라서 남부여는 동성산성, 도원산성과는 별도로 작성산성이 필요했다. 광덕산성과 이곳 만뢰산성에서 동시에 내려오려는 신라군을 막기 위해서는 작성산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계곡을 내려오는 길

 

 

 계곡을 오르는 길. 계곡 사이로 보이는 산이 만뢰지맥이다. 신라의 만뢰산성이 있는 곳이다.

 

 

 계곡

 

 

 조금 더 내려오면 석항 소류지가 있다.

 

 

석항 소류지의 옆의 농원

 

 

 

 

 

 

 

 

 뒷 봉우리가 만뢰지맥의 봉우리이다.

 

 

노인병원 입구에서 바라 본 만뢰산성

 

 

 만뢰산성과 석항마을

 

 

 한컷 더

 

 

 만뢰지맥 돌목이고개 가는 길

 

 

 노은정 앞 광기천. '광기'는 '넓은 터'라는 의미이다. 저 끝 산 능선이 만뢰지맥일터. 만뢰지맥은 미호천의 지류인 병천을 동남방으로 감싸안은 산맥으로 금북정맥 엽돈재에서 분기하여 진천과 천안의 경계를 이루며 경부고속도로 옥산휴게소가 있는 청원 옥산면 뒷산까지 흐르다가 병천과 미호천이 합강하는 옥산 신촌리 덕촌들에서

맥을 다한다. 만뢰지맥은 고대 신라와 남부여간의 국경지대로 치열한 격전지 중의 하나다.

 

 

 돌아오는 길에 동성산성 아래 광터골 마을의 노은정에 들렀다.

 

 

 안내석

 

 

노은정 전경

 

 

한번 비틀어도 보고

 

 

 

 

 

 

 

 

 

 

광기천은 노은정 앞을 흐르고

 

 

 광터골 마을

 

 

 

 

 

 

 노은정 감상 끝 ~~

 

이제 애마는 광덕산성을 향했다. 병천면 로타리에서 21번 국도를 타고 동면과 진천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동면 소재지 천동초등학교를 지나자마자 광덕리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언덕 위 고개를 지나자 군량들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지명도 군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하늘도깨비는 직감한다. 어느 시대에. 바로 신라와 남부여 시절이지. 아마 신라군의 곡식 창고가 있었던 것 같다.

 

광덕리 일대 지형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깨우친 사실인데, 광덕리는 넓은 구릉지대로 군사 요새화하기에 알맞은 지형이다. 적어도 신라군 몇 천명이 주둔하여도 넉넉한 지형으로 은폐와 능선간 신속한 이동이 가능하다. 따라서 광덕리 일대의 신라군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동성산성과 도원산성 같은 거대한 동벽의 구축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산성의 효율적인 이용면에서는 신라군이 우월하였다. 광덕리는 타원형의 군사 요새로 힘의 응집과 분출이 가능한데 비해, 동성산성과 도원산성은 남북의 긴 장벽으로 한곳이 뚫리기라도 한다면 산성 전체의 기능이 마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광덕산성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동면 행암리, 광덕리, 광덕산, 광덕산의 정상에 있음. 퇴폐되어 겨우 토루의 흔적을 남길 뿐, 주위는 약 150간’이라 하였고, <전국유적목록>에는 ‘광덕산의 정상에 있음. 토루이고 주위 약 150간’이라 하였으며, <문화유적총람>상에는 ‘광덕성지, 광덕산의 정상에 있으며 토루이고 주위가 약 270m이다. 산 상봉에 성을 쌓고 성인(聖人)이 도학을 연구하여 천하에 널리 알렸다 하여 광덕산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산 상봉에 성을 쌓고 성인(聖人)이 도학을 연구하여 천하에 널리 알렸다 하여 광덕산이라 칭하였다'고 한 대목에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산 이름에 한자 '덕 덕'자가 붙는 경우는 산세가 원만해서 붙이는 경우가 많다. 광덕산 일대는 매우 원만한 구릉지대가 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 성인이 도학을 연구하여 천하에 널리 알렸다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호사가의 설변인 듯하다.

 

그리고 현재 산성의 규모면에서도 광덕리 절골마을 뒤편의 토루만을 지칭해서 주위 270m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광덕리 전체가  군사 요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금 산성 분류에서 도원산성과 동성산성을 분리하지만, 사실 두 산성은 거대한 하나의 동벽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절골마을 뒤편의 토루만이 구축물로 확인된다고 해서 광덕산성을 이곳에 한정하기는 무리가 있다. 행암리의 군평마을이나, 광덕리의 군량들마을은 광덕리 일대가 군사 요새였기에 붙여진 지명이다. 결론적으로 광덕리 일대 전체를 지표조사해 보면. 거대한 산성의 규모가 밝혀질 것으로 사료된다.

 

광덕산성은 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의 거리에는 ‘절골’이라는 20여호의 작은 마을 뒷산인 광덕산(해발 297.7m)에 있다. 산성의 형태는 퇴뫼식으로 둘레는 약 300m이다. 성의 북벽은 흙과 돌로 섞어서 쌓았으며 지금은 그 윤곽만이 뚜렷하고 높이는 추산하기 어렵다. 남벽은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고 있으며, 주로 삭토(削土)하여 성의 내부는 평평하게 잘 다듬었고 그 파낸 흙으로 성벽을 보축한 듯 하다. 동벽과 서벽은 모두 북벽과 같은 형태로서 토석(土石)혼축이며 문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동벽의 가운데에 깊이 약 3m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성 남쪽으로 서림산성, 북서에 작성산성, 서쪽에 동성산성과 마주하고 있다. 성안에서는 뚜렷한 유물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다만 격자문이 있는 토기 조각 몇 점을 주웠을 뿐이다. 이상은 광덕산성에 대한 일반적인 현황으로 참고자료로 올린다.

 

 

 군량들 마을

 

 

 군량들 마을 삼거리에서 바라 본 오른편 광덕산 줄기와 그 아래 절골 마을

 

 

 군량들 마을

 

 

 절골 마을 보호수와 좌편 광덕산성

 

 

 광덕산성과 아래 절골마을

 

 

광덕산성 전경

 

 

 보호수 전경

 

 

 광덕산성

 

 

 한컷 더

 

 

 광덕2리 버스정류장에 있던 안내도를 찍은 사진. 절골 뒤의 광덕산성과 동성산성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군평마을 이름도 보인다. 한편 광덕산성은

병천면 관성리 명성마을 부근에서 작성산성과도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다.

 

 

 

 

 

 

 

 광덕2리 버스정류장에서 바라 본 광덕산. 저 산 뒤편이 병천면 관성리 명성 마으로 작성산성과 대치하고 있다.

 

 

 광덕리의 넓은 구릉지대. 멀리 서림산이 이터를 지켜보고 있구나! 광덕산성의 신라군은 남부여의 서림산성,도원산성, 동성산성, 작성산성들에 의해 반원으로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만큼 광덕산성은 신라군의 요새였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광덕산성의 신라군들이 남부여 이곳 성들을 함락시킨다면 남부여의 대목악군은 해체되고 남부여의 동부전선은 병천 너머까지 형성될 운명이다.

 

 

 광덕이라 불릴만한 넓은 구릉지대

 

 

 광덕산 전경

 

 

 광덕리 두촌 마을 가기 전 고개 부근에서 바라본 광덕산

 

 

고개 지나서 바라본 광덕산

 

 

 광덕리 두촌마을

 

 

광덕산. 주위가 원만한 언득들로 가득하여 신라군은 이곳 일대를 군사 요새화하였을 것이다.

 

 

 광덕리에서 화계리로 내려오면서 밤고개 소류지 직전에서 바라본 동성산성

 

 

동성산성. 철탑들이 지나고 있다.

 

 

 

 

 

 

 밤고개소류지에서 바라본 동성산성 전경

 

 

 

 

 

동면 소재지에서 21번 국도를 타고 진천으로 방향을 돌린다. 애마는 이제 만뢰지맥의 장교현을 넘고 있다. 저 고개만 넘으면 신라의 만노군 지금의 진천 땅이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의 야망이 숨쉬던 곳이기도 하며, 신라 최고의 전사인 김유신이 삼한 통일의 꿈을 키우던 곳이기도 하다.

 

 

만뢰지맥상의 장교현. 길에는 지난 겨울 눈이 올때 뿌렸던 모래들로 가득하다. 이 모래가 씻겨 나가기 전에 이미 여름은 오고 있는 듯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차 안은 답답하기 이를데 없다. 왠 구제역 방역이 이리도 많은지...

 

 

 보탑사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바로 태령산 줄기가 맞이한다.

 

 

 

 

 

 

 

 이정표

 

 

 김유신 장군 탄생지

 

 

 

 

 

 태령산 줄기

 

 

 안내판. 김유신은 살아서는 태대각간, 죽어서는 흥무대왕으로까지 추봉된 것으로 보아 김서현이 만명을 데리고 이곳 만노군까지 도바리친 것은 일단 성공적인 시도로 보인다.

 

 

 

 

 

 

흥무대왕 김유신 영(?)허비

 

 

 태령산 오르는 길. 이곳에서 비사 즉 날으는 뱀 발견. 지는 지 갈길, 나는 내 갈길. 그렇게 바삐 가는 뱀을 본 적이 없네. 어디 쥐라도 잡으러 가시나!

 

 

 

 

 

비사 출현 15초전!

 

 

 비사 출현 5초전! 여기를 지나 올라가려는데, 언덕위에서 쏜살같이 내려오는 놈 발견. 하늘도깨비한테 덤비는 줄 알았는데, 허 지갈길 가버리네!

 

 

 국궁장

 

 

 국궁장 뒤로 태령산 오르는 길

 

 

 

 

연보정에서 흘러내린 물이 연못을 이루고... 보은 삼년산성의 아미지와 같은 구조로 산성 내 물관리를 하고 있다. 우물에서 흘러내린 물을 버리지 않고 연못을 만들어 산성내 필요한 물을 공급받고 있다. 이는 이곳 태령산성이 장기 농성의 구조를 갖춘 곳임을 반증해준다. 김서현 시절 이곳은 신라 만노군(진천) 치소로 백제 대목악군 (천안 목천읍)공격의 전방 사령부였다. 이곳에서 만뢰산성과 광덕산성을 통하여 백제 공격의 영을 내린다. 후일 신라가 삼한통일 이루고 난 후 만노군은 흑양군으로 개칭하는 바, 이때 치소는 진천읍 평지 구릉성인 대모산성으로 이전한 듯하다. 대모산성은 고구려의 금물노군의 치소로도 이용된 적이 있다.

 

 

 

 

 이중의 저수지로 물관리를 하고 있다. 한방울의 물도 아낀 신라인들!

 

 

겹으로 된  저수지 구조물. 이런 탁월한 건축 구조는 유래를 찾기 힘들 것 같다. 사실 이러한 건축술은 국보급으로 대우 받아도 손색이 없다. 우리는 그냥 지나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연대로 축조한 기념물 아니런가? 쥐바기 4대강 사업도 운보정과 그 저수지 축조술의 정신을 본 받아야 할텐데... 말로만 친환경사업 어쩌구 저쩌구...아, 천박한 대한민국의 토목철학이여! 어째 고대보다 후퇴만 하는가?

 

 

 태령산 가는 길

 

 

 미니 연보정

 

 

7~80년대까지 마을이 있었던 듯...돌담이 완연하다. 그리고 고대에는 만노군의 건물들도 있었을 터...

 

 

 

 제법 넓은 건물터.

 

 

삼년산성 아미지처럼 연못의 이름을 붙였으면 좋겠다. 아, 아름다운 신라인의 축조술이여! 그림같구나!

 

 

 

 만노군 치소를 방어하는 내성의 형태도 갖쳤구나. 이걸두고 다목적이라는 것이네?

 

 

물기 오른 버드나무와 제2의 아미지. 방문 강츄!

 

 

 연보정 앞의 연못

 

자, 이제 신라 축조술의 백미인 연보정을 감상할 시간입니다. 이런 아담하고 예쁜 우물을 보신 적이 있나요?

 

 

 연보정

 

 

연보정 계단

 

 

 연보정 수로

 

 

 

 

 

 

 

 

 연보정과 연못 전경

 

 

 

 

 

 

 

 

 

 

 보물이 연이어 있는 우물. 연보정!

 

 

 

 

연보정 안내판

 

 

 연보정 상단의 건물터. 만노군의 치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령산 가는 길. 정상에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있다.

 

 

 태령산

 

 

 내려오면서 국궁장 뒷편의 산성곽터

 

 

 건너편 산 투구바위

 

 

사석삼거리 성암초등학교 뒤로 문안산(412m)이 보인다.

 

 

성암천. 만뢰산에서 발원한 강은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거쳐 진천 문백면 소재지를 지나 청원 오창읍 소재지 앞에서 미호천으로 흘러든다.

 

 

 21번 국도는 문안산과 봉화산 사이의 잣고개를 거쳐 진천읍내로 간다. 처음 신라가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대에 이르러 미호천을 건너 고구려의 금물노군을 접수하고 신주를 설치한다. 이곳 성암천 일대는 백제와 고구려가 접경하던 격전지였는데, 어느새 미호천변에 이른 신라는 오창읍내에 있는 장자성을 함락시키고 성암천을 거슬러 이 일대를 장악하고 역으로 고구려의 금물노군의 치소가 있던 대모산성을 탈취하여 결국 신주를 건설한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의 대목악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케 된 것이다.

 

 

 좌가 문안산, 우가 봉화산. 두 산다 산성이 존재한다. 고구려가 초축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백제군에 맞서 금물노군을 지키던 고구려 산성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주 침공로도 진천읍을 접수하고 이곳 문안산과 봉화산 사이의 잣고개를 향해 한국군을 공격하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사실 한국전쟁 당시의 대규모 전투도 고대 삼국간의 주 전쟁터와 일치한다. 이는 삼국 시절과 1950년 당시의 교통로나 지형이 크게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암천은 문백면과 오창읍을 거쳐 미호천으로 흐른다.

 

 

 

 

잣고개 넘기 전에 불쑥 나타난 문안산과 문안산성

 

 

 문안산 전경. 지금도 군부대가 있다.

 

 

 잣고개 부근에서 바라본 문안산.

 

 

 잣고개

 

 

잣고개 쉼터에서 바라본 잣고개

 

 

 6.25격전비에서 바라본 문안산

 

 

6. 25 격전지비 안내판

 

 

 격전지비

 

 

 

 

 건너편 문안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천 대모산성에 들렀다. 대모산성은 중부고속도로 진천 나들목 가기 전 진천 여중 맞은 편 구릉상에 존재한다. 대모산성은 최초 고구려 금물노군의 치소였다가, 신라가 점령한 후 만노군의 치소로 이전하였다가 삼한 통일 후 다시 이곳에 흑양군의 치소가 있었던 듯하다.

 

 

진천읍에서 진천나들목 가기전 도로상에서 바라본 대모산성

 

 

 대모산성

 

 

 평지 구릉의 성이다. 평화시에 적합한 성이다.

 

 

 

 

 

대모산성 안내판

 

 

 

 

 대모산성의 동북벽. 진천나들목을 통해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