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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백제 산성

논산 외성리산성 : 남부여 황산벌을 보호하라

<2009년 2월 7일>

 

 

대전 방면에서 탄현으로 추정되는 금남정맥 상의 계룡시 양정고개를 지나면 논산시 연산면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남부여의 황등야산군이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따르면, 황등야산군에는 속현이 둘인바, 진현현과 진동현이다.

진현현의 치소는 지금의 대전시 유성구 교촌동 진잠향교 주변 일대이다. 남부여 시절 황등야산군에서 양정고개(금남정맥)-계룡시-유성구 세동 계곡-진치-성북동 계곡-성북동 산성을 거쳐 남부여 진현현의 치소에 이른다. 이곳에서 대전-옥천 방향으로 해서 신라로 나갈 수 있다.

한편 진동현의 치소는 지금의 금산시 진산면 읍내리 일대이다. 황등야산군에서 황룡재(금남정맥)를 넘으면 논산 벌곡면 한삼천리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신라로 가는 2가지 루트가 있다.

하나는 벌곡천(갑천 상류)을 따라 내려가면 대전 서구 흑석동 흑석동 산성이 나오고 호남선 가수원역 가기 전에 원정림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원안영 마을로 빠지면 사정동 산성이 나온다. 사정동 산성은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백제 동성왕 20년(498년) 7월 사정성을 쌓아 한솔 비타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다는 기사가 바로 그 대목이다. 이로 추정컨대 백제 시절 황등야산군에서 이곳 사정성에 이르는 지금의 남대전 루트를 굉장히 중시하였던 것 같다. 사정성-비파치 산성-계현산성-옥천 성치산성을 거치며 옥천 관산성 일대와 대치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논산 벌곡면 한삼천리에서 벌곡천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남부여 진동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진산면 읍내리 진산성이 나온다. 진산에서는 복수-추부를 거쳐 옥천에 이르거나 진산성-복수 곡남리산성-만낙리산성-소리니재(식장지맥)를 거쳐 금산-영동 양산까지 진출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부여 황등야산군은 사비성 남부를 통해 신라로 가는 모든 루트의 출발지이다. 그 결과 남부여 중에서 황등야산군의 위상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부여 의자왕이 계백에게 수도방위군 5천명을 주어 황등야산군의 황산벌로 진격케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황등야산군이 돌파된다면 남부여의 도성인 사비성은 완전 상대방에게 노출되는 것이다. 황등야산군은 또한 두 속현인 진현현과 진동현에서 미리 적들을 방어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탄현의 위치 비정도 진현현에서 황등야산군으로 들어오는 고개인 계룡시 양정고개이거나 아니면 진동현에서 황등야산군으로 들어올 수 있는 황룡재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금남정맥상에 있는 고개를 탄현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금남정맥의 지맥인 대전 동방을 휘감아 분수를 이루는 식장지맥은 남부여의 전방격으로 이곳의 주요 고개 중 하나를 탄현으로 추정하는 것은 신라 침공의 시간적 간격이 있어 설명이 부자연스럽다.

논산 부적면 외성리 산성은 황산벌로 쏟아져 들어오는 신라군을 막아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러나 남부여 황등야산군 일대 산성들은 신라군이 제 산성들을 우회하여 사비 도성으로 직행하는 바람에 전술적 우위를 뒤로하고 평지인 황산벌로 내려와서 피로써 남부여를 지켜내야 했다. 남부여 최후가 이토록 처절했던 이유는 남부여가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번창하였기 때문에 사비성까지 진격하는데 전술적 우위의 산성들이 효과적으로 도성을 방어할 체계가 지리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김유신의 과감한 산성 우회 전략 때문에 남부여군은 평지로 내려서서 황산벌에서 최후의 전쟁을 벌인다.

이 피비린내나는 역사적인 황산벌 대회전의 현장을 외성리 산성을 지켜야만 하는 몇몇 수비병들만은 눈물을 삼키며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남부여군이 학살을 당하고 있어도 의연히 자리를 지켜야만 했던 군인들을 떠올리며 외성리 산성 답사를 시작한다.

논산 외성리 산성은 연산면 소재지에서 논산 시내 방향으로 가는 1번과 4번 국도가 중복되는 구간상에 존재한다. 연산면 경계를 막 지나기 전에 황산벌 자동차 극장이 나오는데, 이곳으로 들어가 천주교 공동묘지 구역에서 외성리 산성으로 오를 수 있다.

 

 

황산벌 자동차극장, 자동차 극장 뒷산길로 오르면 외성리 산성의 남쪽 성곽을 만나게 된다.

 

 

20여분 오르면 산성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

 

 

 산성 내부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산성 외부로 나와 바라본 성곽(북벽)

 

 

 성곽(북벽)

 

 

나무가지 사이로 계룡산이 멀리 보이고... 바로 앞 황산벌도 보이고...외성리 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남북의 들판이 황산벌 전쟁의 현장이다. 지금은 산성 남쪽이 탑정저수지로 변했지만 옛 황산벌이다. 이곳에 백제군사박물관과 계백장군 묘로 전해지는 말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큰 전쟁터 자리에는 큰 호수가 생긴다고 하더니...

 

 

 맨 뒤로 보이는 산이 계룡산, 우측 능선은 금남정맥

 

 

 한컷 더

 

 

 정면이 노성산. 남부여 웅천주의 속현인 열야산현의 치소인 노성산성이 있다.

 

 

 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 결사대는 학살을 당하였고, 어쩔 수 없이 외성리 산성을 지켜야만 했던 수비병들은 분루를 삼키며 묵묵히 지켜보아야 했을 것이다.

 

 

 산성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계룡산과 노성산 사이에 있는 탑산, 좌측이 노성산, 우측이 계룡산

 

 

 오른쪽 산이 노성산. 노성산 왼편은 평야지대로 사비 외성까지 거칠 것이 없다. 남부여군 5천은 어쩔 수 없이 김유신의 5만 군대를 평야 지대인 황산벌에서 사람의 성을 쌓고 막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편으로 보이는 금남정맥의 능선들. 이 맥의 일부가 계룡시 엄사면 향적산으로 분기하여 주산성과 황산성으로 이어진다. 이 맥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금남정맥의 천호산 일대와 남북으로 평행하게 달리면서 긴 계곡을 펼쳐 놓았다. 남부여는 이 평행 능선상에 황등야산군의 산성들을 축성하여 신라군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탄현으로 추정되는 양정고개 마루에서 상대하지 않고 산성에서 기다리다 김유신의 산성 우회 및 도성 직행 전략에 휘말려 남부여 군은 몇몇 수비병만 제외하고 평지로 나와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남부여가 도성을 포기하고 장기 항전 전략으로 갔으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사비 도성으로 직행할 수 있는 드 넓은 황산벌, 이곳은 외성리 산성 북부 들판으로 연산천이 흐르며 옥토를 적시고 있다.

 

 

 높은 산성 북벽

 

 

산성 외부 산책로를 따라 서쪽 성곽 지역으로 갈 수 있다.

 

 

 

 

 

서쪽 토루

 

 

산성 내부

 

 

 외성 산성 표지비 (산성 내부)

 

 

 산성 남벽에 세워진 산성 안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