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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경상도)/함양,거창,합천

합천 대야성 : 남부여가 낙동강 중류 연안으로 진출하다

<2010년 9월 20일>

 

고향가는 길에 합천 대야성을 들렸다. 대야성은 합천읍내 황강 북안의 조그만 산 구릉에 축조한 토성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답사해보니 대야성으로 알려진 이곳은 한때 대야주를 두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규모면에서 군주의 치소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북안에서 황강을 감시할 목적에서 축조된 보루성 정도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진짜 대야성은 어디였을까? 이곳에서 황강 남안을 보면 대야성산(271m) 줄기 남쪽 봉우리(해발 약 180m)가 보인다. 이곳 정상부에는 테뫼식 석성이 하나있다. 바로 합천 고소산성이다. 산 줄기 이름도 대야성산이거니와 산정에 직경 약 10여 m의 연못 흔적도 있어 식수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즉 고소산성은 황강 북안의 보루성과는 달리 장기 농성전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고소산성 동쪽 기슭에 합천 대양면 정양리 고분군이 분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야주의 치소인 대야성은 아마도 고소산성일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황강 북안의 보루성은 진짜 대야성의 보조성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고소산성의 보조성은 하나 더 있다. 고소산성 서쪽 정양지 너머 황강 남안의 절벽을 따라가면 용주면 성산리 갈마산(232.3m)이 나온다. 이 산정에 갈마산성이 있어 황강 상류에서 진격해오는 남부여군을 감시하다가 대야주인 고소산성에 바로 보고했을 것이다.

 

 

 

 표지사진 - 황강 북안인 함벽루에서 바라 본 구 합천교인 남정교 방향. 남안 절벽을 따라가면 갈마산성이 나온다.

 

대야성 함락은 신라에게 경악 그 자체였다. 무왕 17년(616) 남부여 달솔 백기는 군사 8천을 거느리고 모산성을 함락시킨다. 모산성은 남원 아영면 성리산성으로 남원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교통로 요지에 자리잡은 백두대간 상의 산성이다. 물론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는 남부여군이 모산성을 함락시켰다는 기사는 없다. 단지 공격하였다고만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무왕 25년(624)에 신라의 속함성을 비롯한 6개성을 함락시켰다는 기사가 나온다. 속함성은 지금의 함양이다. 그렇다면 모산성은 무왕 17~25년 사이에 남부여군이 함락시켰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물론 남부여군이 모산성 북쪽인 육십령을 넘어 속함성을 함락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남부여군이 육십령을 넘었다면 모산성은 고립될 소지가 있다. <삼국사기>에 달솔 백기가 공격하였다고만 하였으므로 두 견해 모두 유력하다고 본다.

의자왕 2년(642) 8월에 윤충이 남부여군 1만을 이끌고 대야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대야성 도독 품석 부부와 사지 죽죽과 용석 등이 죽었다. 대야성은 지금의 합천으로 낙동강 지류인 황강 중류 연안을 방어하는 성이다. 황강 유역은 고대 가야 폴리스 다라국의 터전이었다가 대가야(통합 가야)에 합류한다. 따라서 대야성은 가야인들이 초축하였다가 신라인들이 수축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대야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낙동강 서안 연안이 남부여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이는 남부여군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 턱밑까지 치고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553년 금강 서안의 관산성 전쟁에서 성왕이 전사한 이래 남부여는 만 90년만에 신라의 낙동강 서안까지 치고 들어오는 쾌거를 이루었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따라서 대야성 함락은 신라 왕조와 신라인에게는 굉장한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남부여군이 옛 대가야 영토에서 이토록 성과를 거둔 것은 남부여에 대한 대가야 유민들의 심정적 동조도 일조했으리라 추측된다. 관산성에서 남부여와 대가야는 연합하여 신라와 전쟁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대가야는 신라에 의해 도성이 비참하게 난도질 당하였다. 이처럼 연원이 깊은 대가야 유민들의 반 신라의식은 <삼국사기 죽죽열전>을 보면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려고 성문을 열어주는 행동들에서 간접적으로 유추된다.

이에 신라는 대 고구려 전선의 군사를 남하시켜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면서 김유신을 압량주(지금의 경산시 일대로 낙동강 동안 유역 방어의 총 사령부) 군주로 삼아 남부여군의 낙동강 도하의 저지선을 구축하였다.

 

 

 신라 충신 죽죽의 비 안내판. 황강 북안의 유서깊은 정자인 함벽루 가는 길에 신라 충신 죽죽의 비가 세워져 있다. <삼국사기 죽죽열전>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당시 대야성 내에는 혼란이 있었고 이는 대가야 유민들의 반신라적인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황강 연안 주민들은 대가야 유민의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신라 충신 죽죽의 비 안내석

 

 

 신라 충신 죽죽의 비

 

 

 신라 충신 죽죽의 비

 

 

 신라 충신 죽죽의 비

 

 

 

 

 

 신라 충신 죽죽의 비 옆에 삼일운동 기념비도 있다.

 

 

 국궁장 동북방으로 황강이 흘러가고 있다. 신 합천대교.

 

 

 국궁장

 

 

 

 

 

 대야성 안내판

 

 

 

 

 

 

 

 

 

 

 

 

 

 

 산성 오르는 중에 바라본 대야성산.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뒷 능선 좌측 산줄기를 따라 가면 나온다.

 

 

 산성 오르는 길

 

 

 대야성산 줄기와 황강. 앞 능선 좌측으로 따라가면 대야성으로 추정되는 고소산성이 나온다.

 

 

 산성 오르는 산책로

 

 

 산성의 동쪽

 

 

 

 

 

 대야성으로 불리는 정상부가 보인다.

 

 

 토성 오르는 길

 

 

 토성 좌측길

 

 

 토성 우측길

 

 

 정상은 평탄지가 있어 건물지로 보인다. 그런데 산성의 규모가 작아 보루성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가야시대 즉 다라국 시대에는 제천의식이나 제사터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고 대야주를 설치하면서(진흥왕 26년, 565년) 대가야 토성은 보루성으로 수축하고

그 대척되는 황강 남안에 대야주의 치소인 대야성을 석축한 듯하다.

 

 

 정상의 평탄지. 평탄지 규모가 너무 작고, 우물터도 보이지 않아 642년 대야성 전투의 장소로 보기에는 합리적이지 않다.

 

 

 산성의 남쪽을 조망하였으나 수풀에 가려 시야가 좋지 못하다. 남쪽은 합천 대양면으로 진주가는 33번 국도가 지나간다.

 

 

산성의 서쪽 또한 조망이 좋지 않다. 갈마산성 방향으로 남부여군의 침공로이다.

 

 

 산성의 서북방 하산 길

 

 

 산성의 북벽 산책로

 

 

 

 

 

 산성의 남벽 산책로에서 바라본 앞 능선 좌측의 대야성(고소산성)과 뒤의 대암산(591m).

 

 

 산성의 남벽 산책로

 

 

 산성의 정상부

 

 

 산성의 남서벽에서 함벽루로 내려가는 길

 

 

 함벽루 안내판

 

 

 함벽루 가는 길

 

 

 함벽루. 푸르럼에 젖은 누각.

 

 

 바위에 새긴 함벽루

 

 

 황강과 남정교. 갈마산성 방향.

 

 

 고소산성. 이곳이 대야성으로 추정된다.

 

 

 갈마산성 방향

 

 

 서쪽의 갈마산성 방향. 남부여군의 진격로이기도 하다.

 

 

 황강 남안

 

 

 황강 남안의 대야성(고소산성)

 

 

 황강 남안의 고소산성은 대야주의 치소 대야성으로 사료된다.

 

 

 

 

 

 황강에 달빛이 어른거린다.

 

 

 함벽루 전경. 옛날에는 처마의 빗물이 바로 황강으로 떨어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