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3일>
단풍놀이 겸 해서 제천 월악산을 오르기로 했다. 월악산 덕주사 입구 가기 전, 충주 수안보면 미륵리 미륵리사지와 제천 한수면 송계리 사자빈신사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제천과 충주로 행정 경계는 나뉘어 있지만, 수안보면 미륵리는 송계계곡의 상류이며, 한수면 송계리는 송계계곡의 하류이다.
표지사진-미륵리 석불입상
미륵대원터
미륵대원터는 고대 백두대간 남북교통로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이 계립령 동쪽 고개에 있다고 한점을 보면 신라의 계립령은 지금의 백두대간 상의 하늘재가 아니라 미륵대원에서 수안보면 사문리로 넘어가는 지릅재일 가능성이 높다. 지릅재에서 보면 동쪽 고개가 지금의 하늘재이며, 미륵대원은 하늘재가는 계곡 입구에 있기 때문이다.
미륵리 사지 전경
미륵리 사지 귀부(龜趺)
어깨부분에 작은 거북이 기어 올가가는 형태를 양각하였다.
부(趺)는 책상다리할 부이다.
미륵리 사지 5층석탑
미륵리 사지 석등
미륵리 사지 석불입상. 미륵불은 아니다.
밝은 태양 아래라서 석불의 흰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너무 희어 몸체의 돌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마치 머리부분이 없어진 것을 다시 올린 것처럼 보인다.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 사연에는 마의태자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북쪽 송계계곡 중류 쯤에 덕주사 마애불이 있는데, 덕주사 마애불은 남향하고 있어 이곳 미륵리 석불 입상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다. 덕주사는 마의태자의 여동생인 덕주공주가 세운 절이다. 덕주공주가 송계계곡 월악산 영봉 아래 거대한 절을 창건한 것으로 추정컨대 덕주공주는 이곳 중원경의 유력한 가문에 시집와서 살았던 재지세력으로 보인다.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자 이에 반대한 마의태자가 세력을 규합하고자 여동생이 있는 중원경까지 들어왔으나 결국 실패하고 남한강 뱃길로 양평 용문사를 거쳐 인제에서 최후로 저항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미륵리 사지 석불입상은 마의태자가 중원(지금의 충주) 일대에서 벌인 저항운동이 실패하고 떠나면서 남긴 유적으로 본다. 즉 석불입상은 신라 부흥을 꿈꾼 마의태자의 형상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덕주사 마애불은 떠나가는 오빠를 바라보는 덕주공주의 염원을 형상화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석굴의 흔적1. 석불입상은 석굴의 주존불이었으나 목조건축물이 불탄 후 그대로 둔 것이다. 마의태자의 저항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목조건축물이 불탔을까? 복원하지 않은 것은 마의태자의 비애를 그대로 두고자 했던 덕주공주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석굴의 흔적2
석굴의 흔적3
석불입상에게 염원을 비는 우리네들...
마의태자의 염원을 담아 통일된 나라가 되게 해주소서...
석불입상 앞에서 바라본 미륵리 사지 전경
석등과 오층탑
내려오다가 좌측 개울을 건너면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 바위가 있다.
공기돌 바위 전설로 미루어 보건대 이곳 계립령 일대가 고구려와 신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기돌 바위 밑을 지키고 있는 백구. 하늘도깨비 명명하기를 '온달이'라고 부르마... <삼국사기 온달열전>을 보면 온달이 최후의 전장으로 나갈때, '계립령과 죽령 이서지역을 얻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였다. 결국 온달은 평강공주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아단성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계립령 부근 공기돌 바위 주변을 온달의 혼이 떠돌다 이 백구로 환생해서 평강공주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백구에게 '온달이'로 불러보았다. 암놈이면 온달장군을 기다리는 '평강이'가 맞겠지.
귀부 전경
다시 미륵대원터를 찍어본다. 미륵대원터 옆길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하늘재가 나온다. 하늘재를 넘어면 문경읍 관음리가 나온다. 이 일대 고대 남북 교통로는 고려때까지만 해도 백두대간상의 죽령과 하늘재(학계에서는 하늘재를 계립령으로 본다)가 간선도로였다. 신라 경주에서는 주로 죽령을 통해 고구려와 교통하였다. 반면 하늘재는 신라의 상주 부근에서 중원으로 가는 지름길로 죽령의 보조도로였다. 그런데 신라와 고구려간에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대회전이 벌어지자 신라는 계립령(필자는 지릅재를 계립령으로 추정한다)을 통해 수안보 방면으로 나가 달천 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장악한 것이다. 이를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회복하기 위해 직접 계립령까지 원정온 것이다. 계립령을 장악하여야 계립령 이서 지역의 신라군의 보급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다.
문경 새재(조령)는 조선조에 들어와서야 영남대로의 간선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이곳 하늘재와 계립령이 이 일대 주 도로였다. 고려때까지는 절과 숙박할 수 있는 원(院)을 동시에 두었다. 천안 성환읍의 1번 국도 변에 있는 봉선 홍경사와 광연통화원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승군을 자체 보유하여 절과 원을 보호하였다.
미륵리 사지 입구의 용도 불명의 바위
미륵리 사지에서 송계계곡을 조금 내려오면 좌측으로 사자빈신사지 이정표가 보인다.
사자빈신사지 석탑
명문
보살님이 잘 보이지 않네...우주인같이 생겼다. 확인 요 ^^
뒷모습은 잘 보이네...
빈신사지 맞은 편 산
보일듯 말듯...
빈신사지 옆집
덕주사 가는 길
덕주산성 동문(덕주루)
조선시대 쌓은 성으로 위기시 이 지역 주민과 관군이 장기 농성하며 외적과 싸울 목적으로 축성하였다. 산성의 규모는 내외 5겹의 성벽으로 둘러져 있어 길이가 무려 9,800m에 이르는 거대한 산성이다. 5겹의 성벽은 축조연대가 각기 다르다. 고대에는 현재의 규모 보다 적었을 것이다. 덕주계곡에는 조선시대에 쌓은 내성과 외성(외성의 동문이 바로 이곳 덕주문이다) 사이에 중성의 흔적이 있다. 아마 고대 산성의 흔적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3겹의 산성에다가 덕주계곡 바깥의 송계계곡 남북의 차단성까지 합해 내외 5겹의 산성이라는 말이다. 고대에는 송계계곡을 통해 신라에서 고구려의 중원까지 갔다. 그리고 신라가 계립령을 통해 달천 유역의 고구려 땅을 장악하자 신라 입장에서는 계립령을 보호하려고 송계계곡을 차단하여 고구려군을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 송계계곡의 북쪽 하류에는 북문(북정문)이 있고 남쪽 상류에는 남문(월악루)이 있다. 물론 신라 입장에서는 이중의 차단성을 쌓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선은 송계 계곡의 폭이 제일 좁은 곳을 골라 차단성을 쌓았을 것이다. 지금의 송계계곡 남쪽 상류인 남문터가 유력한데, 더욱이 남문(월악루)터 동쪽은 망폭대가 있어 축성하지 않더라도 자연 암벽이 성벽 역할을 하므로 신라 입장에서 보면 축성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곳이다.
동문 남쪽의 성벽
동문 북쪽의 성벽
덕주산성은 덕주계곡을 차단한 거대한 포곡식 산성이다.
단풍객들로 덕주계곡은 넘쳐났다.
덕주사 전경
월악산 영봉을 동양의 알프스라고 부른다네.
산양이라도 불 수 있을라나. 산양의 특기가 바위위로 올라가 천적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는 곧 월악산이 험한 바위산(암산)이라는 것이다.
중성의 흔적
중성은 고대 산성일 것으로 사료된다.
덕주산성의 초축이 시작된 곳으로 사료된다. 물론 지금의 동문터가 외성이 되고 이곳이 내성일 수도 있다.
조선조에 이르러 신축한 내성(혹은 상성)
덕주계곡 뒷쪽은 거대한 바위지대이므로 후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도 풍부하므로 식량만 비축해두면 장기 농성전에 유리하다. 조선조 때는 임란 호란을 거치며 전국에 이러한 장기 농성을 많이 구축해 놓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장기 농성을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 당국하면 없고, 대비해 놓으면 쓸 일이 없는 것이 무슨 이치인가?
자, 이제 본격적인 월악산 영봉 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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