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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신라 산성

여주 파사성 : 파사이사금의 흔적을 찾아서

<2011년 6월 11일>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AD 80년에 탈해에 이어 파사(婆娑)가 이사금에 등극한 것으로 나온다. 범어로 ‘파사’란 ‘진리의 현존’, ‘이사금’은 ‘대왕’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파사이사금은 ‘진리를 구현하는 최고의 통치자’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활동 반경은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 주변이 아니라 서라벌과는 수 백리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사적 제251호로 지정되어 있는 파사성은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의 경계에 있는 파사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서쪽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 석축산성이다. 산성이 자리 잡은 파사산의 해발 고도는 230.5m로 결코 높지 않다. 그러나 주변 일대가 대부분 낮은 구릉성 산지여서 상대적으로 우뚝 솟아 보이며, 멀리 이천 방면에서 바라보면 정상부가 원추형으로 솟아 있다. 그래서 파사성에서 보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남한강 유역이 잘 조망된다. 남한강 수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쪽 남한강을 경계로 술천성이 자리 잡은 태봉 주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방의 시야가 확 틔어 전망이 아주 좋으며, 맑은 날씨에는 북쪽으로 양평의 용문산까지 조망된다.

 그런데 비록 전설이긴 하나 파사성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신라 파사이사금 대에 축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파사성의 유래를 삼한 소국의 하나인 파사국의 존재에서 찾기도 한다. 당시 서라벌이 이곳 남한강 하류 유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되기도 전에 파사이사금은 범어로 ‘진리의 현존’을 의미하는 ‘파사’라는 칭호를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분명하다.

 필자는 파사이사금을 신흥 고구려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반도로 남하한 낙랑군 세력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유리이사금 14년(37)에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쳐서 없애니 그 나라 사람 5천여명이 투항하여 와서 6부에 나뉘여 살았다는 기사가 있다. 파사이사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낙랑인들은 이미 불교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파사성의 전설은 낙랑인이 남한강을 따라 백두대간을 넘어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까지 유입되는 과정상의 흔적으로 조심스럽게 추론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파사이사금을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필자는 실제 가야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와 동계로 추정한다. 그들은 동시대에 북방에서 남하한 사람들로 김수로는 낙동강 하류 유역을, 파사는 낙동강 중상류 유역을 복속시킨 낙랑인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서라벌 건국 초기 낙랑인들이 끊임없이 금성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바, 필자는 낙랑인들이 결국 서라벌을 정복하고 신라를 탄생시킨 주역으로 이해한다.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 낙랑국 조>에서 신라인들은 스스로를 낙랑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본조(고려)에서도 신라인들의 낙랑 호칭을 존중하여 왕건이 맞이한 신라 왕족 여인을 낙랑군부인,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김부에게 시집 보낸 자신의 딸을 낙랑공주로 불렀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남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파사이사금을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씨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일본서기>는 이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서기>는 천황의 계통을 만세일계로 기록하고 있다. 즉 만대가 흘러도 하나의 계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일본서기>보다는 솔직한 역사서이다. 적어도 두번의 역성에 의한 정권 교체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를 독해해 보면, 서라벌에서는 박석김 이외에도 세번의 역성에 의한 정권 교체가 확인된다. 그 중의 하나가 파사이사금이다.

 고대의 정복 과정은 전 왕조를 배제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포용하는 통합의 과정이다. 초기 낙랑인들은 서라벌의 박씨에게 흡수되어 그들의 성씨가 아닌 박씨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성제도가 그러하다. 그리고 박혁거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해야 그 일대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기에 유리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추모(주몽)가 북부여의 동명왕 해모수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실제 추모가 해모수의 아들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부여 유민들을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명백한 역사 왜곡이며 고구려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는 고대 정치의 관습이며 실제이다. 고구려가 안정되자 추모의 후손들은 해모수의 고유명사인 동명왕의 칭호조차도 추모에게 붙여 동명성왕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북부여의 해모수보다는 실제 자신들의 조상인 추모가 중요해진 것이다.

 <일본서기>가 만세일계로 변질된 이유도 동일하다. 식민지 시절 일본인 학자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기록에 대하여 허구라며 무수히 비판하였다. 서라벌 왕조의 초기 계통이 불확실하다는 것이 대표적인 주장의 근거였다. 그런데 되짚어보면 <일본서기>의 만세일계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보다 왜곡이 더욱 심하다. 필자가 보기에 <일본서기>를 그대로 두고 <삼국사기>를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같다.

 고대 역사서는 왕조의 계통에 관해서 왜곡이 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 정치의 관습과 실제를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의 이면을 해명함으로써 오히려 풍부한 역사적 진실을 목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이러한 점에서 여전히 대륙의 동북방과 반도 및 열도의 고대사에 대한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30도를 오르내리는 초여름 오후 2시. 몸은 몇 분만에 지치지만 파사성에 오르면 이같은 역사적 상상과 추론이 떠올라 마음은 풍요로와진다. 혹 여름에 답사하실 분이 계시면 이른 아침이나 해가 기울어가는 시간에 오르면 좋을 것 같다. 양평읍에서 여주읍 가는 3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양평군 개군면 소재지 지나 이포대교 직전에 파사성 공용주차장이 나온다.

 

 

파사성 안내판

 

 주차장에서 정상까지는 860m. 파사성 산책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여름 산보 코스로는 거리도 적당하다.

 

입구

 

이포대교 북쪽으로는 향후 MB만의 기념물이 될 남한강 여주 이포보 공사가 한창이다. 표현은 보라고 하였지만 실제 보면 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포보 아래에서 작년(2010년) 11월 육군 보트가 전복되어 군인들이 희생된 곳이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임기말까지 4대강 공사를 마무리하느라 밤샘작업을 포함한 무리한 속도전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의 희생도 2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더운 여름날 파사성을 오르면서 MB의 기념물을 만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허허. MB는 가끔 이런 야길 한다. 공사가 끝나면 국민들은 자신의 뜻을 이해할거라고... 건방진 시끼. 선구자인척하는 이 말만 안했어도 그냥 넘어갈랬는데...이포보를 보니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나 4대강 사업을 좀 언급해야겠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단상

 

 4대강 및 지류 정비 사업에 들어가는 총 사업비는 얼추 32~37조 가량이다. 즉 비용(Cost)이 32~37조가 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혜택(Benefit)은 얼마일까? 측정 불가이다. 필자의 추론(?)으로는 유무형 이익으로 비용의 절반 가량인 한 15조 쯤 될 것 같다. 근거는 지금도 한해 유지비용으로만 수백억씩 드는 청계천복원사업을 보면서 추정한거다. 비용이 좀 든다고 해도 인구가 집중된 도심에 공원을 조성하고 개발독재 시절 희생당한 수도 서울의 하천을 복원한다는 취지에서 MB의 단순무식한 결정은 그런대로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한반도 남쪽의 4대강 한가운데 박아 놓은 MB의 흉측스런(?) 기념물들이 완공되면 MB는 만사를 제쳐두고 축사하러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조중동은 용비어천가를 불러댈 것이다. 하긴 조중동은 모르겠다. 집권 말기라 MB에게 게길런지도...

 사실 비용이 40조 가량 들어도 혜택은 15조 정도 나온다. 이것이 문제다. 어떤 일이든 비용이 얼마가 들었든간에 혜택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이를 두고 표면상으로 국민들은 잘했다고 말할 가능성도 있다. 사업상으로는 완전 꽝이라도 말이다. MB가 노리는 건 이것일 가능성이 높다. 40조 들여놓고 15조 가량 혜택 나오면 표면상으로 업적으로 보이니까? 헐! 4대강 사업의 실체는 이러하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향후 20년 안되어 MB의 기념물은 철거될 듯하다. 예전에 청계천 복개한 것을 철거하듯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4대강 보조댐을 가보면 맑은 물을 보기 어렵다. 강 아래는 썪고 있다. 그리고 향후 유지 비용을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MB는 우리 사회에 짙은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내년이면 퇴장한다. 어두운 그늘이란 거대한 재정적자의 문제이다. 해방 이후 근 40년 동안 국민의 피를 먹고 탄생한 민주주의는 긴 세월 망각한채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독재자의 후예에게도 다시 기회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들은 재정적자라는 씻을 수 없는 함정(trap)을 국민에게 선사했다. 독재자들의 후예가 사탕발림처럼 내뱉는 선심성 공약에 드는 돈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며 피흘린 이땅 다수의 국민들이 땀으로 이룩한 재산이다. 그것들을 함부로 사용하며 미래의 재산까지도 댕겨서 탕진하는 독재자들의 후예를 지켜보아야 하는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더 이상 기회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주지말았으면 한다. 필자는 내년에 그들의 마지막 퇴장을 조용히 지켜보며 박수치고 싶다.

 

 

중간에 파사산 전경이 보인다.

 

오르는 좌측으로 수로도 보인다.

 

 

 

 

 

 

 

주차장에서 오른지 10여 분 남짓. 이정표 부근에 남문과 남벽이 보인다.

 

 

 

 

 

수풀에 뒤덮인 남벽

 

남문 우측의 남벽을 파노로마로 찍어 보았다.

 

남문(정문)

 

남문 좌측의 성벽

 

파사성의 성벽이 웅장하게 보인다.

 

남문 우측의 성벽을 측면에서 조망하였다.

 

세로로 찍어 보았다.

 

 

 

남문. 파사성의 정문인데, 방위상으로는 파사성의 서쪽이지만 산성의 구조상 서와 남이 만나는 극점에 있어 남문으로 칭한 것 같다.

 

이정표

 

남문 부근 평탄지이자 동문 가는 길

 

좌측 정상가는 길

 

안내판

 

파사성 조감도

 

주변의 기와 조각들

 

남문 좌측의 서벽은 복원 공사를 하였다. 남한강이 조망된다. 대기중의 가스가 시야를 흐려 못내 아쉽다. 서남쪽의 남한강 상류 방향.

 

강 건너 서쪽은 산지이다.

 

포루2 오르는 길

 

이포대교. 남한강 상류 방향.

 

이포대교 부근의 이포는 고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이포대교 남쪽으로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수변 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여주군에만 3개보가 설치된다.

 

포루2

 

 

 

북쪽의 남한강 하류 양평읍과 팔당호 방향

 

이포대교와 이포보. 이포대교 건너편은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수부마을이다. 이 마을 뒷산이 태봉(183m)인데 정상 부근을 중심으로 일부 구간에서 석축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곳 태봉산성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술천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여주읍과 양평읍이 이 일대의 중심지이나, 고대에는 파사성과 술천성이 있는 이포 부근이 중심지였다. 이 일대는 신라가 점유하기 전까지는 고구려의 술천군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여주읍과 양평읍은 술천군의 영현으로서 각각 고구려의 골내근현과 양근현으로 불렸다. 고대에는 이포 부근의 술천군을 중심으로 지금의 여주읍과 양평읍을 속현으로 거느리며 행정 군사체계를 이룬 것이다. 혹자들은 파사성과 술천성이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척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필자는 술천성과 파사성이 동시에 술천군의 핵심 방어 시설로 생각한다. 앞으로 술천성을 조사하고 성의 규모가 확인되면 그 결과에 따라 파사성이 술천군의 치소가 될 수도 있다. 파사성은 규모로 보아 술천군의 치소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현재 여주군 금사면에 남아있는 지명들 예컨대 기천서원, 천양마을, 수부마을 등으로 추정컨대 이포리 일대가 술천군의 치소로 보인다. 사진에서는 건너편 산 최고봉이 태봉으로 보인다. 실제 답사를 하지 않아 대략적으로 산성을 추정할 뿐이다.

 

 

 

남한강 상류 양평읍 방향

 

파사성 서쪽

 

남서쪽

 

포루2 부근에서 서쪽의 남한강 일대를 파노라마로 조망하였다. 좌측이 남쪽의 여주읍 방향의 남한강 상류, 이포대교 부근의 중간 산지가 태봉 및 술천성, 우측이 양평읍과 팔당호 방향의 남한강 하류. 

 

포루2를 지나면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바위 절벽이 보인다. 좌측(북동방)으로 봉긋하게 예쁘게 솟은 산이 추읍산(582.9m)이다.

 

산성 정상

 

추읍산과 마애불

 

정상가는 석축

 

남한강 하류 방향이 조망

 

태봉과 술천성

 

무지 더운 여름 오후다.

 

 

 

양평군 개군면 소재지 일대

 

성내부에서 석축오르는 계단

 

남한강 하류 방향과 개군면 소재지 일대

 

 

 

 

 

 

 

 

 

 

 

 

 

 

 

 

 

정상(235m)

 

파사성 서쪽 술천성 방향.

 

남쪽의 남한강 상류 일대. 거대한 모래톱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곳을 수변공원을 만든다고 난리다.

 

정상에서 남한강 일대 조망.

 

북쪽으로 추읍산이 보인다.

 

서쪽 남한강 건너 술천성 방향

 

파사성의 동남쪽인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와 송촌리 일대.

 

북벽으로 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마애여래입상을 보러 갔다.

 

북벽 아래 안내판

 

북벽

 

마애여래입상 가는 길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곳에서 조망한 남한강

 

마애여래입상

 

나이는 중3이나 고1처럼 보이는 앳된 학생이 조그만 암굴(?)에서 법복을 입고 나와 인사하며 팜플랫을 건넨다. 하늘도깨비 물 한모금 얻어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였다.

 

 

 

이천 설봉산성 아래 영월암 마애여래입상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천은 고구려 술천군의 서쪽으로 고구려의 남천현이며, 신라의 남천주이기도 하였다. 이 일대의 불교 문화 양식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번잡하지 않고 간결한게 인상적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불심을 끌어내려 한점이 좋다. 바로 옆 남한강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번잡하게 추진하고 있는 이포보 공사와 대비된다. MB가 방문해서 한번 봐야 할텐데...^^ 북방의 간결한 기풍. 이는 아마도 고구려의 영향일 것으로 사료된다.

 

여래불이 천년 이상을 지긋이 바라보았을 남한강. 다행히 이포보 공사 현장이 보이지 않아 좋다.

 

 

마애여래불을 뒤로 하고 다시 파사성 동문지로 향했다.

 

 

정상에서 동벽 구간 내려가는 길

 

되돌아본 동벽 구간

 

동문지

 

동문지 우측 석벽

 

동문지를 나와 산성 바깥에서 동문지 우측 석벽을 바라보다.

 

 

 

천서리 내려가는 산책로. 5년 전 겨울에 이곳으로 올라왔던 기억이 새롭다.

 

동문지 좌측 석벽

 

 

 

동문지에서 서문지 가는 길

 

동문지 부근의 평탄지

 

 

 

되돌아 동벽 구간을 조망하다.

 

남한강 상류 방향의 수변 공원

 

 

 

 

 

 

 

되돌아본 남동벽

 

남문지 가는 평탄지

 

남벽과 남문지 부근

 

원점 회귀

 

주차장 부근

 

편의점에서 시원한 음로수를 마시며 파사산을 바라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