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2일>
반도의 중부지방 동서 교통로는 남에서 북으로 주행하는 한남정맥을 중심으로 1) 남한강(충주)~달천(남한강의 지류)~성황천(달천의 지류)~한남정맥(모래재)~보강천(미호천의 지류)~미호천(금강의 지류)~금강(군산)와 2) 섬강(원주, 남한강의 지류)~남한강(법천사지)~청미천(남한강의 지류)~죽산천(청미천의 지류)~한남정맥(녹배고개)~안성천~아산만 혹은 안성천~진위천(안성천의 지류)~독산성(오산)~남양만(당성)의 동서로 흐르는 주요 하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안성 비봉산성은 신라 입장에서 보면 남한강 중류지역에서 아산만과 남양만으로 진출하려는 한남정맥 서쪽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안성 비봉산성은 처음에는 남부여나 북부여가 축성하였으나 결국 신라가 장악하고 말았다. 그 시기는 553년 진흥왕이 백제의 동북변경을 탈취하고 신주(지금의 진천)를 설치한 이후로 사료된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 점유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안성 비봉산성은 신라 백성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바,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따르면 신라 백성군은 본래 고구려의 나혜홀이었다고 한다. 이로 추정컨대 신라는 한남정맥을 넘어 고구려의 나혜홀을 직접 공격하여 안성 비봉산성 지역을 장악한 듯하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다시 백제로부터 빼앗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신라는 553년 신주를 거점으로 대 고구려 전쟁에 주력하다가 554년 백제와 관산성 전쟁에서 승리한 후 555년 10월 경에는 진흥왕이 북한산까지 순행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557년에는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한다. 아마도 이 근간에 안성 비봉산성도 신라의 수중으로 들어간 듯하다.
비봉산성 가는 길은 안성시청에서 안성향교 지나 약수사로 올라가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있다.
비봉산성 내성의 장군바위 (표지 사진)
안성 비봉산성 가기 전에 천안 대성산성 흔적을 보기 위해 천안시 풍세면에 도착했다. 풍세면 소재지 뒷산인 태화산(455.3m) 정상.
풍세면 남관리 지나 아산시 배방면 세교리로 들어갔다. 지금의 아산, 천안 일대는 남부여의 최전방으로 당시에는 탕정군(지금의 아산시 탕정면)과 대목악군(지금의 천안시 목천읍)이 중심이었다. 최전방인 탕정군에서 남부여 수도인 금강 유역의 웅진성 혹은 사비성까지 가는 주요 루트는 지금의 39번(아산~부여)국도와 23번(천안~공주)국도와 비슷하다. 39번 국도는 금북정맥 상의 각흘고개를 넘었으며, 23번 국도는 금북정맥 상의 차령을 넘었다. 그리고 보조 루트로 천안시 풍세면에서 출발하는 지금의 629번 지방도를 따라 웅진까지 남하하는 루트가 있었다. 풍세면 남관리와 아산시 배방면 세교리의 대성산성은 지금의 곡교천 상류를 거슬러 금북정맥을 넘는 23번 국도 루트와 629번 지방도 루트를 비호하는 산성이다. 또한 대성산성은 대목악군의 속현인 감매현의 치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보루성인 구룡리 산성도 있어 남부여 시절 곡교천(고분다리천) 상류인 감매현이 고대 교통 루트상 매우 중요한 입지를 점유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대성산성으로 추정되는 아산시 배방면 세교리 일대
세교리 산직마을 고개. 이 고개를 중심으로 남부여 감매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대성산성이 자리 잡은 듯하다.
산직마을 고개
천안 대성산성의 대략적인 예비 답사를 마치고 곧바로 안성 비봉산성으로 향했다.
안성 비봉산 전경
안성향교 부근에는 약수사로 오르는 길이 많다.
하늘도깨비는 이 길로...
남쪽
서쪽
서북방
안성 시내(남쪽)
남쪽
호젓한 산책로
약수사 부근 산행 안내도. 비봉산성은 내외 이중성이다.
청소년수련원 방향이 내성 가는 길이고, 보개약수터 방향이 외성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내성가는 산책로
내성 오르는 길
내성의 석축 흔적들
평탄지
산성의 동쪽 벌판. 벌판 너머로 보이는 산줄기는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다. 비봉산성 정동쪽이 칠장산(492.4m)으로 한남점맥과 금북정맥이 분기하는 곳이다. 좌측 능선이 한남정맥으로 북으로 주행하며 우측 능선이 금북정맥으로 남으로 달려나간다.
장군바위. 장군바위 아래는 수풀이 아니라 무덤이었다. 산행갔다 되돌아오니 불과 30분만에 벌초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요렇게...
동쪽 방향. 뒷 능선 정동쪽이 칠장산이다.
장군바위 뒤에는 염원을 비는 촛불이 사그라들줄 모른다.
우리는 민간신앙으로 바위에 대한 믿음도 대단한 듯하다.
장군바위에는 글씨도 많이 새겨져 있다.
알욕존이 존화양이. 욕망을 끊고 이치를 보존하고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 한말의 위정척사파의 정치 구호를 이곳 장군바위에다 새겨 넣은 듯하다.
장군암에 새겨 넣은 글자에 대한 해석 안내판
비봉산성 안내판
내성 내부 산책로 한가운데 박힌 바위
장대지인가?
칠성바위
내성의 북쪽 끝
석축의 흔적
북벽 전경
이 아래로 비봉터널(38번국도)이 지나간다.
안부의 고갯길
등산을 위하여 조금 더 걷기로 마음먹었다.
시민들의 휴식처. 비봉산은 안성 시민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이 정도에 비봉산성 내성을 보호할 요량으로 보루 정도는 쌓았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가파르게 북쪽으로 고도가 낮아진다. 여기서 발길을 돌려 되돌아 나온다.
되돌아 나오며 바라 본 비봉산성 내성 북벽 전경
북쪽 보루에 있는 칠성바위. 되돌아오며 비봉산성을 복기하는 듯하다.
중간 장대지의 석축 흔적들. 건물지인 모양이다.
건물지 전경
내부 평탄지
내부 평탄지
장군암
동녁의 벌판과 한남정맥
굴기. 벌떡 일어나라.
내부 평탄지로 건물지임
투구봉 근처의 망루로 오른다.
바위를 쪼개며(?) 자라고 있는 강인한 생명.
투구봉 망루터
망루 근처의 기와 조각들
망루 전경
외성 서문터로 내려 가는 길
서문터로 내려서서 비봉정으로 향하는 길
비봉정. 비봉정 부근은 비봉산성 외성 장대지가 있었다. 시야가 너무 좋다.
삼각점
해발 193인지 198인지 불분명하다.
비봉정에는 먼저 점유한 그룹이 있어 등산객들이 모두 양보한다. 영어회화 동아리 같다.
비봉산 남쪽의 안성천과 서운산(547.4m). 서운산은 금북정맥 상에 있다. 서운산에도 산성이 있다. 뒤 산줄기 오른쪽 끝자락에 서운산성이 있다. 서운산성은 초축은 백제이나 고구려가 점유하다가 신라가 지금의 진천 대모산성 부근에 신주를 건설하면서 최종적으로 신라가 장악한 듯하다. 신라는 신주를 설치한 이후 금북정맥 상의 엽돈재를 넘어 비봉산성이 치소인 고구려의 나혜홀을 점령하여 한강 이남의 고구려 영토를 탈취하였을 것이다.
남쪽의 금북정맥. 앞 능선 좌측 산이 금광산성이다. 비봉산성과 금광산성 사잇길이 신라 중부지방 주요 동서 교통로이다. 이 길을 통하여 신라는 대당 교통로인 아산만이나 남양만 일대로 진출할 수 있다.
비봉정 정남으로 보이는 계곡으로 들어가면 금북정맥의 배티고개를 넘어 신라의 신주로 들어간다. 금광산성은 배티고개로 넘어오는, 서운산성은 엽돈재로 넘어오는 적들을 감시하고 방어할 목적에서 축조되었다. 한동안 신라와 고구려는 이 일대에서 대치하다가 결국 고구려가 무너지고 한강 이남 지역을 상실한 듯하다.
비봉정의 동남방
비봉정의 서쪽
비봉정의 남쪽
비봉정의 서남방으로 안성 시내 중심이 보인다.
비봉정의 남쪽. 서운산 일대.
비봉정의 서남방 일대로 정중앙 끝자락에 안성천 너머 사산성이 있다. 사산성은 백제와 치열하게 대립한 곳이다.
비봉정의 서편
안성천 너머 서운산
비봉정의 동방. 우측 제일선의 산이 금광산성이다. 금광산성은 신주에서 배티산성으로 나오는 적들을 감시하고 방어하였던 산성이다.
약수사
다정한 부자간의 산행.
하산하며 안성 시내를 바라 본다.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북정맥상의 부수문이 고개를 지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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