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4일>
표지사진 - 용천산성 남벽 외부 27번 국도변에서 바라 본 동남방의 군산시 임피면 소재지 일대. 건너편 높은 산이 임피면 남산으로 남산성이 있다.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소류지 건너 낮은 언덕이 임피현성으로 보인다.
남부여 때 시산군(屎山郡)은 지금의 군산시 임피면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고대에는 시산군을 피산(陂山)·소도(所島)·흔문(忻文)·실오(失烏)라는 지명으로 불리었다. 삼한 통일 후 신라가 757년(경덕왕 16)에 시산군을 임피군으로 개칭하면서 임피라는 지명이 현재까지 남게 되었다. 남부여 대 이래 시산군이 관할하던 영현은 3곳이었다. 지금의 익산시 함열읍 일대로 추정되는 감물아현, 군산시 옥구읍 일대로 추정되는 마서량현, 군산시 회현면 일대로 추정되는 부부리현이 그것이다. 사실상 금강 하류 이남과 만경강 하류 이북의 전 지역이 시산군 관할 지역으로 명실상부 시산군이 남부여 서해 해상 관문을 지키는 중추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 이후 임피군은 임피현으로 강등되었으나, 임피현에는 고려의 12개 조창(漕倉) 중의 하나인 진성창(鎭城倉)이 있어 전라도 조운(漕運)의 요충지로 기능하였다.
필자는 익산 어래산성 답사를 마치고 남부여 서해 해상 관문의 중추인 시산군의 치소로 비정되는 군산 용천산성을 올랐다. 참고로 진포문화예술원 향토문화연구회 <답사보고서>를 전게한다.
<진포문화예술원 향토문화연구회 용천산성 답사보고서>
용천산성(혹은 예산성)은 임피면 취산리 교동마을 앞 취산제의 서편에 자리잡은 용천산에 위치한다. 임피면 교동에서 나포면에 이르는 고개의 좌측에 자리잡은 용천산은 그 형세가 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새모양의 몸통과 양날개에 산성이 위치하고 있어 포곡형에 가까운 산성이라 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예산은 진산(鎭山)으로서 그 형상이 봉황과 같고 옛 성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적조사자료」에는 둘레가 1,417m의 토성이며 예산성이라고 적고 있다.
용천산은 취성산의 남쪽에 자리잡은 해발 141m의 적은 규모의 산인데 용천산보다 더 높고 규모가 큰 바로 옆 취성산에 산성을 만들지 않고 용천산에 자리잡은 이유는 용천산의 정상에 오르면 쉽게 알 수 있다. 용천산성은 지리적으로 금강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성산을 지나 금강에 적이 상륙했을 경우 이곳 용천산만 넘으면 익산에 다다를 수 있는, 서(西)로는 금강이 보이고 동(東)으로는 미륵산이 한 눈에 보이는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남쪽에는 고려시대 12조창(漕倉)의 한 곳인 진성창이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2㎞ 전방에 임피읍성과 그 앞 1.5㎞상에는 남산산성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
용천산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기어 지금의 익산에 나라를 세운 후 준왕이 만들었다는 말이 전하는데 산성의 모습이 익산을 등지고 금강을 방어하는 모습으로 전설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은 듯 싶다. 주변의 임피읍성이나 남산산성 보다는 축조 연대도 오래되고 그 기능도 본래는 임피읍성의 외성 역할이나 진성창 방어용이었다기보다는 순수한 익산의 최전방에 자리한 금강 방어용 성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산성은 이 지역에는 드믄 포곡형 토성 형태로 추정된다. 성벽의 높이는 2.5~3m정도였고 회랑의 넓이는 1.5m정도 였으며 삭토법과 판축법을 병행한 토성으로 용천산 봉우리에서 시작하여 새의 양날개와 같은 양쪽 능선을 따라 흘러내려 서쪽에서 양쪽 능선이 만나고 바로 그 부위에 성문이 만들어져 있는 형태로 보인다. 40m정도의 남쪽 평지는 논으로 개간되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나 본래는 판축양식의 성벽 혹은 목책이 성문과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은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는데 그 모습이 복주머니의 안쪽과 같으며 군시설과 민가가 있었으리라 추정되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성의 네곳에 문루의 흔적이 보이고 성의 북쪽 정상 문루에는 석축의 흔적이 보이고 바로 밑에는 건물 자리의 흔적 또한 발견된다.
용천산성은 그 모습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 마한시대의 성으로 추정되며 임피읍성과 남산산성이 모두 한 지역에 모여 있어 관광자원으로 개발 보전해야 함이 절실한 곳으로 성내에 대한 발굴 조사가 요구된다.
군산시 임피면 소재지에서 나포면 소재지 가는 11번 군도를 따라 승용차로 3분여 가면 취산제가 나온다. 취산제에서 북쪽을 바라 보면 11번 군도가 지나가는 고개가 나온다. 그 고개 좌측이 용천산(141m) 가는 금남정맥 등산로이다.
취산제
취산제 부근에서 바라 본 남쪽의 임피면 남산(157m). 임피현성이 평지성이라 외적의 침입을 받을 때를 대비한 장기 농성으로 남산 위에 산성을 축조하였다.
나포면에서 임피면 넘어가는 고개로 금남정맥 상에 위치한다.
용천산 가는 등산로 입구. 여름에는 수풀에 덮이므로 금남정맥과 용천산성 답사는 대체로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하는게 안전할 듯하다.
용천산 가는 등산로
금남정맥길
고개에서 5분여 오르면 금남정맥 등산로를 막아선 벽이 나온다. 이 벽이 바로 용천산성 성벽(북벽으로 추정됨)이다. 용천산성은 토축 포곡식성으로 산성이라는 인식이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따라서 토성 답사시에는 전체 지형을 그리며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한다. 필자도 용천산성 답사하면서 그 점에 주의하였다.
북벽 등산로. 북벽 망루로 추정됨.
망루 아래 평탄지
망루 부근으로 추정됨
북벽 부근 산성 내부. 용천산성은 용천산을 중심으로 좌우 날개에 산성을 배치한 포곡식 산성이다. 좌측 날개는 북벽을 이루고 우측 날개는 남벽을 이루다가 동문터 부근에서 서로 만난다. 따라서 북벽과 남벽 아래 산성 내부도 경사가 가파르다. 대부분 건물지는 지금은 전답으로 개간된 골짜기 부근의 평탄지에 집중되어 있고, 산성의 북벽과 남벽 부근은 회랑도 정도의 평탄지만 존재한다.
북벽 부근 산성 내부 평탄지
북벽 부근 산성 내부 평탄지로 군마가 이동하는 회랑도로 사료된다.
회랑도로 추정되는 북벽 부근 평탄지
회랑도로 추정
정맥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산성 외부로 나오게 된다. 산성 외부에서 바라 본 서북벽.
서쪽으로는 나무들 사이로 우곡(옥곡)저수지가 보인다. 이 우곡저수지에서 서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창안토성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고려 12조창 중의 하나인 진성창이 있었던 곳이다. 진성창에서 용천산성까지 직선거리는 2Km 정도에 불과하다.
산성 서벽 아래 등산로
서벽 산성 내부로 들어와서 평탄지를 둘러 보았다.
서벽 부근 평탄지는 넓어서 건물 몇 채는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벽 구간
서벽 구간 중 민묘 근처에서 서방을 조망하다. 아래는 군산 시내로 향하는 27번 국도이다.
서쪽 멀리 남북으로 달리는 서해안고속도로가 보인다.
27번 국도 서쪽으로 금남정맥이 남류하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산이 금남정맥 상의 망경산(129m)으로 사료된다.
서남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가 뻗어 있다.
남류하는 금남정맥 전경
민묘 부근의 서벽
서벽 구간 아래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산성의 윤곽을 확인하였다.
서벽 아래 등산로를 민묘 방향으로 되돌아 보았다.
서벽 구간 중에 산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고개 길. 문터로 보이지는 않고 주민들이 사용한 산길로 보인다.
서벽 아래 산길
서남벽 부근 망루로 보이는 언덕
서남벽 부근에서 27번 국도로 내려갈 수 있는 철계단 방향으로 나오니 남쪽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군산시 임피면 소재지 전경
건너편 높은 산이 임피면 남산으로 남산성이 있다.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소류지 건너 낮은 언덕이 임피현성으로 보인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고려때까지 이곳 용천산성이 임피군의 치소로 기능하다가 어느때인가 평지성인 지금의 임피현성으로 이전한 듯하다.
동남방
다시 서벽 고개길로 돌아와 산성 내부로 들어갔다.
산성 내부에서 바라 본 고개 길
고개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현재는 전답으로 방치되고 있는 산성 평탄지까지 이어진다.
산성의 중심으로 치소 건물이 있었을 평탄지. 후대에는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다가 밭으로 개간된 듯하다.
산성 중심에 있는 용샘
용샘과 석불에 얽힌 이야기
용천산성의 중심에는 맑은 물이 넘쳐 흐르고 있는 샘이 하나 있다. 바로 사진 속의 용샘이다. 용샘은 오랜 세월동안 산성안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수가 되어 왔을 것이다. 용천산(龍泉山)은 그 가운데 한자를 천(天)으로도 기록한다. 용천(龍天)은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용천(龍泉)과 용천(龍天)을 함께 부르는 것은 용이 샘에서 나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단어 속에서 이곳 산성 주민들이 고대부터 용천산과 용샘 모두를 신성시여겼다는 생각의 편린을 읽을 수 있다. 옛부터 용은 무궁한 신비의 조화를 부리는 영물로 믿어 왔다. 그런데 어느 시대인가 그 용이 승천한 듯하다. 그 결과 용천산성도 영화를 뒤로한 채 쇠락한 것이 아닐까? 반역을 도모한 용이든 권력을 도모한 용이든 역사적으로 그 용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용샘 옆에는 입석불(立石佛)의 하반신이 땅속에 묻힌 채 서 있었다고 한다. 그 신비의 인물이 팔척석불로 남은 것인가? 모를 일이다. 이 석불(石佛)은 속칭 팔척석불(八尺石佛)로 불려졌는데 석불의 높이가 팔척(八尺)이나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이 팔척석불은 용천산성의 어구에 있는 취산리(鷲山里) 교동(校洞)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팔척석불이 용샘 가에 모셔진 것은 조선 중기의 일이라고 전해 온다. 조선초 태조의 개국공신인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의 후손인 유씨(劉氏) 부부가 이 산성안에 살았을 때의 일이다. 그들 부부는 늦도록 아들이 없어 아들 낳기가 평생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부부는 교동(校洞)에 세워져 있었던 팔척석불을 이 용샘 가에 모셔놓고 100일 동안 정성스럽게 공양한 결과 승호, 성호 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두형제 모두 팔척장신의 장사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팔척석불의 기운이 이 형제에게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 부부의 묘는 용샘 가에 서 있었던 입석불(立石佛)의 윗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입석불의 아랫부분은 묻혀 있고 머리는 떨어졌다가 다시 시멘트를 발라 복원하였다고 한다. 석불은 오랜 세월동안 풍우(風雨)에 시달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풍화(風化)되었다고 한다. 섬세한 예술미는 없으나 고졸(古拙)한 소박미가 느껴진다고 한다. 머리와 옷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며, 불상의 주변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석탑의 일부분인 옥개석 조각 2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후대 절로 변모하였다가 폐사된 모양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도난당하여 더 이상 팔척석불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석불 또한 신비의 인물처럼 승천한 것일까?
산성 내부 전경. 용천산성의 정문은 동쪽으로 나 있다.
용샘에서 발원한 물은 아래 고랑따라 흐른다. 조그만 용샘에 맑은 물이 항상 고인 것을 보니 용천산성은 물 걱정 없이 사시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북벽에서 이어진 산성이 이곳 동벽 부근에서 마무리 된다.
남벽에서 이어진 산성이 이곳 동벽 부근에서 마무리 된다.
동문 근처에서 바라 본 산성 내부 전경. 동문터는 논둑으로 사용되어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동문터 부근
사진에 보이는 논둑 정도에 동벽과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산성 내부 전경
산성 답사를 마치고 마을 부근으로 나오니 금남정맥의 취성산(205m)이 보인다.
취산저수지
취성산성 전경. 앞 능선이 산성의 동북벽이며, 뒤 능선이 동남벽이다. 용천산성은 동으로 난 골짜기를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최초 답사를 시작한 고개
고개 넘어 나포면 내려오며 바라 본 취성산
<다음 사진들은 용천산성 내 절터에서 발견된 석불과 기와 및 자기편에 대한 자료들입니다. 군산 동국사 주지이신 종걸스님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자료들입니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합니다.>
1995년 이후 도난당한 예산석조여래불입상
산성 내 용천사지 전경. 적색은 불상이 있던 자리, 황색은 용천사 명문 기와편 출토지.
O泉寺 명문 기와편
O泉寺 명문 기와편
O泉寺 명문 기와편
O泉寺 명문 기와편
용천사지 도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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