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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신라 산성

영동 신흥리토성 : 신라 소라현의 치소

<2014년 1월 26일>

 

 

<표지사진 - 신라 소라현의 치소였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흥리 토성이 소재한 황주동 일대 전경>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를 보면, 신라 길동군(吉同郡)의 영현(領縣)은 둘인데, 조비천현(助比川縣)과 소라현(召羅縣)이 그것이다. 길동군은 지금의 영동읍 일대, 조비천현은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과 학산면 일대, 소라현은 지금의 영동군 황간면 일대로 비정된다. 따라서 신라 길동군의 영역은 대체로 지금의 충북 영동군 일대와 일치한다.

 

오늘은 영동군 일대 소재했던 신라 군현들의 치소를 답사하였다. 먼저 소라현의 치소였던 영동군 황간면 신흥리 토성이 위치한 황주동 일대를 둘러보았다. 소라현은 신라 경덕왕(757)물이 채워진 골짜기라는 뜻에서 황간현(黃澗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까지 그 지명을 쓰고 있다.

 

신흥리 토성이 소재한 황주동은 지금의 황간면사무소에서 보면 동북쪽 한가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 고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현의 치소가 였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금석문이 하나 있다. 이른바 '회도석(回櫂石)'이다. 회도석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비석으로 황주동이 오래전부터 현의 치소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다.

'회도석'이 언제 유실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치되어 있다가, 1995년 8월 당시 신흥리 이장이던 조남근씨가 마을 하천변에 묻혀 있던 비석을 발견 면사무소에 신고하고, 1996년 8월 윤주헌 황간면장이 지역 유지들의 뜻을 모아 복원하여 제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비석이 '회도석'이란 걸 몰랐다가 옛 영동군지를 검토한 결과 "황간현감 이운영이 황간면 신흥리 서쪽에 세웠고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순채(蓴菜)와 금붕어가 살았다"는 귀절을 발견하고 '회도석'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무튼 황간면으로서는 역사적인 기념물을 복구한 것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로 평가된다.

 

 

 

회도석과 월류봉

 

 

회도석(回櫂石) - 영동군 황간면사무소 홈페이지에서 인용

 

회도석이란 '황간면 신흥리 서쪽에 있으며 석면(石面)에 전자(築字)로 황간 현감 이운영(李運永)이 이렇게 이름지었고 박시화(朴時華)가 했다.' 라고 영동군지 750쪽과 영동향교지 699쪽 등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석면에는 회도석(回權石) 3자만이 음각되어 있을 뿐이다.

이운영(李運永) 현감은 지금부터 217년 전에 황간 현감으로 근무하면서 무술년(戊戌年,1778)에 가학루(驚鶴樓)를 중수(重修)하였고, 이 무렵 회도석을 세워서 현민(燃民)들의 애향심을 북돋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선정(善政)을 베풀고 당시 지역 산업 발전에 힘쓰는등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으로 1781년까지 근무했던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박시화(朴時華)는 전기한 이운영 현감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자는 영백(英伯)이고 병조참의 채()의 후손으로 시부(詩賦)가 능했고, 필법(筆法)이 탁월하여 황학루액과 회도석을 제()했다. '고 영동향교지 인물편 548쪽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운영 현감과 박시화 문예인(文藝人), 이들 두 분은 매우 조화로운 만남이었던 듯 싶다.

회도석의 '()'자는 로 음각되어 있고,'돌아오다'의 뜻이 있다. '()'자는 도(棹)와 같은 뜻을 가진 글자로 선진목(船進木) 즉 배를 젓는 ''를 뜻한다. ''()은 돌이다. '물위에 배를 띄워 노를 저어 나가다가 (뜻한바 있어) 다시 되돌아오다. '는 뜻으로 풀이되며,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가지 말고 되돌아 오라', '가긴 어딜 가십니까? 빨리 되돌아 오시오.' 라고 하면 되겠다.

이곳 황간골의 지형, 즉 풍수설에 의하면 커다란 호수(湖水)형인데 거기에 배가 떠 있는형국이며 그 배가 '들어오는 배가 아니고 떠나가는 배'의 형국이라고 한다 어느 지관(地官)의 설()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리도 신통스럽게 보았는지 실로 감탄할 만하다 그래서 떠나가는 배를 다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한 인위적(人爲的)인 지형지물을 만들었음이 쉽게 짐작이 간다. 결국 월류봉(月留蝶) 근처 강 한가운데 배바우가 지금도 있는데 그 배바우와 연관지어 호수 대신 연못을 파고, 거기에 회도석을 굳건히 세워 놓음으로써 우선 마음의 회도석을 세우고, 풍수적인 회도석을 세우고, 나아가 지역 발전의 내실(內實)있는 다목적 회도석이 되게 하였던 선조(先祖)들의 지혜와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없다.

이렇듯 이 고장 수호석(守護石)이요,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귀한 회도석이, 그 후 2백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잘 보존되어 있다.

 

 

회도석 유래비. 너무 높아 보기 어려운 게 단점이다.

 

이 비석은 가로 50, 세로 130, 두께 40의 화강석에 전서체로 `回櫂石'이라고 음각돼 있다.

 

 

황간의 애향비 회도석(回櫂石)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6월호)

 

황간(黃澗)은 본래 신라의 소라현이다가 지금의 이름을 경덕왕 때 얻었다. 민주지산 (해발 1242)에서 발원하는 물한계곡의 물과 삼봉산(해발 930)에서 발원하는 고자리의 물이 장교천을 이루며 황간을 지나 달도 쉬어 간다는 명승 월류봉에서 송천에 몸을 싣는다. 그 장교천의 물빛이 누렇다 하여 예로부터 황간이라 하였으니 황계 (黃溪)와 더불어 모두 이미 신라 적 이름이다.

 

장교천이 반야사를 지나 흘러온 송천과 만나기를 저만치 앞두고 희한한 푯돌이 하나 서 있으니 이름하여 회도석이다. 말 그대로 풀어 뱃머리를 돌리라는 뜻이다. 영동군지를 보니 황간 현감 이운영이 18세기 무렵에 세우고 글씨는 충주 사람 박시화가 썼다. 여느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비석도 그렇거니와 전서 또한 까막눈으로 보아도 아주 잘 쓴 글씨다. 회도석의 사연인즉, 광교천에 배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배가 내처 하류로 흘러가니 황간의 기운을 밖으로 실어내는 꼴이다. 또한 풍수의 눈으로 보면 황간 땅이 이미 떠나가는 배의 형국이라 회도석을 세워 그 뱃머리를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회도석은 근처에 버려져 있다가 얼마 전에 제 자리를 찾은 모양이다. 흘러가는 산 천의 배를 비석의 주술로 돌린다는 옛이야기도 그럴 듯 하지만 사람들은 다만 너나 없이 대처로 떠난 고향의 젊은이들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정성스레 회도석을 복원했다 한다. 덕분인지 한 동안 늘어만 가던 버려진 논밭이 차츰 줄어들고 있단다. 그리 하여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귀향을 두고 황간 사람들은 꼭 시절 탓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먼길 떠나간 이들이여! 부디 뱃머리를 돌리시길.

 

 

월류봉과 초강

 

회도석에서 바라본 초강 상류부. 초강과 장교천이 만나는 합수부

 

회도석에서 바라본 초강 하류부

 

신흥리 뒷산인 왕산.

 

황주동과 왕산. 신흥리토성은 토축성이다. 토축 흔적을 확인할 수 없어 황주동 전경만 담아본다. 장교천을 자연해자로 삼아 오랫동안 현의 치소로 기능해왔을 것이다. 소라현은 백두대간 이서의 땅인 중화지역과 백화산 금돌성에서 구비구비 돌아온 송천과 삼도봉과 민주지산에서 발원한 초강이 만나는 합수부에 위치한 요지다.신흥리토성의 고대 이름은 소라성이다. 신흥리는 신흥(역말)과 황주동(黃州洞)이 있다. 신흥리에는 조선조 때 율봉역(栗峰驛) 소속의 가장 남쪽에 있던 신흥역이 있었다.

 

좌측 바위산 넘어 송천이 초강에 합류한다.

 

장교천 하류와 월류봉

 

장교천 상류부. 장교천은 신흥리토성의 자연해자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고대를 상상하면 소라성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일 듯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