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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가야 폴리스 기행

고성 송학동고분 : <일본서기>에 나오는 반파국(伴跛國) 수장들의 무덤인가?

<2012년 2월 11일>

 

 

<표제사진 - 고성 송학동 고분 전경>

 

 

* 소가야와 반파국에 대한 시론적 글이라 산만하다. 다소 인내심을 가지고 본다면 흥미로운 텍스트 정도는 될 듯싶다.

 

<일본서기>는 백제 멸망 후에 쓰여진 사서이다. <일본서기>를 읽을 때 화자가 누구인지 상기해야 올바른 독해가 가능하다. 지금의 일본 천황가는 백제 개로왕계나 곤지왕계의 후손들로 추론되는데, 그래서 고대의 야마토 왜는 백제의 동조(東朝, 동쪽 조정)로 불리고 여겨지기도 했다. 곤지왕은 개로왕의 아우로 백제에서 군군을 지내며 차기 실권자로 군림했으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배제되어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를 차지한 야심만만한 인물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화자는 백제의 유맹들로 추론된다. 물론 <일본서기>의 편찬을 주도한 이들도 백제 유민들이었다.

백제는 6C 초반에 섬진강 유역을 경략하려고 시도하였다. 삼한을 일통하기 위해선 백두대간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해야 했는데, 중부지방은 삼년산성과 금돌성에 가로막혀 있었고, 남부지방은 덕유산과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으로 가로막혀 돌파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무령왕은 섬진강 중하류를 경영하여 남해에서 진한(신라)과 변한(가라)의 근저를 침식하려고 작정하였다. 그 첫 대상이 임나(가라)의 4현이었다.

 

 

계체천황 6(512)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4현을 청했다. <일본서기>

 

 

당시 임나는 고령의 대가야로 추정되는데, 위 기사에 나오는 임나 4현은 섬진강이나 금강 상류 유역으로 사료된다. 관산성 전투 이전까지 대가야는 백두대간 이서의 남원, 진안, 장수, 무주는 물론 지금의 충남 금산까지 영역을 뻗치고 있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참고로 임나 4현을 김정학은 섬진강 하구에서 낙동강 유역에 이르는 가야와 백제 사이의 완충지대로 보았고, 천관우 낙동강 상·중류 방면에 비정하였으며, 일제 관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전남 서부로 보았다.

필자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왜를 백제의 동조라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 왜는 백제와 교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으며 당시 정치외교적 이해관계는 교루 루트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백제와 왜는 공동 운명체이자 공동 의사체라 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비록 백제가 청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실제는 군사 공조를 요청하여 백제와 왜의 교류 루트를 확보하고 안정화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나중에 본조인 백제가 망하자 마치 과거에도 백제가 동조였던 왜의 제후국으로 묘사하고 서술한 것인데, 이는 왜의 입장에서는 자존적인 서술이다. 본조가 망했으니 이제 동조인 왜가 본조라는 자부심이고, 백제의 고토를 차지한 신라를 의식한 역사 인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물론 임나 4현은 가라의 땅이지 왜(동조)의 땅은 아니었다. 마치 백제가 임나 4현을 청한다고 왜가 순순히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건 백제와 왜가 가라와 일대 전쟁을 치루고서 획득해야 할 땅이다. 백제가 임나 4현을 청한다고 한 것은 왜와 군사공조로 교역 루트를 확보하자는 뜻이다. 아무튼 백제가 임나 4현을 차지하자 임나(가라)의 하나인 반파국이 곧장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계체천황 7(513) 여름 6월 백제가 수적압산(穗積押山)에 딸려 오경박사 단양이를 보낼 때,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과 주리즉이(州利卽爾) 장군도 함께 보냈다. 장군들은 따로 아뢰기를 "반파국이 저희 나라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반파국이 백제의 기문을 공격하여 빼앗는다. 그러자 백제 무령왕은 장군 2명을 동조로 파견해 다시 군사 작전에 들어간다. 당시 백제의 무령왕과 왜의 계체천황은 둘 다 곤지왕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같을 것으로 사료된다. 참고로 백제 동성왕은 역시 곤지왕의 아들이나 어머니는 다르다. 따라서 무령왕, 계체왕, 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로 서로 동복이나 이복 형제가 된다. 그처럼 당시 백제와 왜는 본조와 동조의 관계로 같은 부여 왕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계체천황 7(513) 겨울 11초하루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과 사라의 문득지(汶得至), 안라의 신이해(辛已奚)와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己汶)과 대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이 달 반파국이 즙지(戢支)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일본서기>

 

 

<일본서기>는 513년 11월 왜는 반파국의 기문은 물론이고 대사까지 백제에게 사여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는 백제의 군사 공조에 왜가 응했다는 것이 기사의 진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 기문과 대사를 둘러사고 대치하는 국면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기문과 대사에 대한 이해 실리는 반파국 뿐만아니라 주변의 사라(신라), 안라 등도 같이 한다. 즉 변진한의 안정에 크게 위협이 되므로 앞다투어 왜에게 백제와 군사 공조를 말라고 연대하여 요청한다. 당시 기문과 대사는 국제적인 분쟁 지역인 셈이다. 반파국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어 사신과 뇌물을 통해 왜를 설득했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위 기사 또한 마치 동조의 왜가 모든 것을 주재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동조인 왜가 백제가 망하자 자신들이 본조라는 의식의 소산에서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에서 기인한다. 즉 본조 백제가 망한 마당에 과거 백제의 영광을 주창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현존하는 왜가 신라를 의식하여 우리가 한때 임나 즉 가라에서 변진한을 주도한 것이라고 <일본서기>에서나마 큰소리 한번 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우리가 쓴 역사서에 우리 입장에서 기술하는 데 뭐 큰 잘못이라도 있단 말인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일본서기>는 작금의 역사 서술 태도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한편 기문과 대사는 어디인가? 기문은 섬진강 중류인 지금의 임실, 곡성, 남원 일대로 비정되고, 대사는 섬진강 하구인 하동이나 광양 일대로 추정된다. 기문의 비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데, 이는 당시 가라와 백제의 전장을 섬진강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낙동강으로 볼 것이냐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대사는 섬진강 하류가 분명하다.

 

 

하동군은 본래 한다사군(韓多沙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영현은 셋이다. 성량현은 지금의 금량부곡(金良部曲)이다. 악양현은 본래 소다사현(小多沙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하읍현은 본래 포촌현(浦村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상세치 않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신라 하동군 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하동 일대가 한다사(큰 다사), 소다사(작은 다사) 등 다사(多沙)로 불렸는데, 이는 대사(滯沙)와 상통하는 지명으로 추론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지명으로 유추하여 종합해보면 임나 4현, 기문, 대사는 낙동강 유역이 아니라 섬진강 유역을 둘러싼 삼한의 갈등으로 보인다.

이처럼 당시 섬진강이 국제적인 화약고가 된 것은 섬진강이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발원하여 남류하여 남해로 흘러들어가는 유일한 강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즉 섬진강은 백제에서 왜에 이르는 가장 빠른 남북의 육로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백제가 섬진강 하구를 장악한다면 남해 일대는 백제의 안방이 될 것이고 그러다간 변진한 제국의 근저가 모두 백제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계체천황 8년(514) 3월 반파가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와 이어서 봉수와 군창(軍倉)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에 걸치게 했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계체천황 9(515) 2월 사도도(沙都嶋)에 이르러 반파인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물부련은 수병 5백 명을 이끌고 곧바로 대사강(帶沙江)으로 나아갔으며 문귀 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 4월 물부련이 대사강에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반파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했다. 옷을 벗기고 가지고 간 물건들을 빼앗고 막사를 모두 불태우자, 물부련 등이 두려워 도망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문모라(汶慕羅)에 머물렀다.

 

계체천황 10(516) 5월 백제가 전부(前部)의 목라불마갑배(木刕不麻甲背)를 보내어 물부련 등을 기문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끌어서 나라로 들어왔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옷과 부철(斧鐵)·옷감을 내어 국물(國物)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놓고 은근하게 위로했으며 상과 녹이 매우 많았다. 9월 백제가 주리즉차(州利卽次) 장군을 보냈는데 물부련을 따라 와서 기문의 땅을 내려준 것에 사례하였다.

 

위 기사들을 보면 백제와 왜의 군사들이 기문은 회복하였으나, 대사 지역은 반파국의 강경한 저항에 막혀 끝내 복속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체천황 17(523) 5월 백제의 왕 무령이 죽었다.

 

무령왕의 삼한일통의 꿈은 섬진강 하구인 대사에서 멈추고 만다. 이는 사비로 천도하고 남부여를 주창한 성왕 대에 이르러 대사를 복속시키므로써 재개된다.

 

6가야 중에서 고성이나 진주 일대는 소가야로 불린다. 허나 고성의 송학동 고분의 규모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결코 소가야로 치부할 정도로 미미한 세력이 아니었다. 소가야로 불린 것은 대가야의 상대적 개념이다. 6가야 중에서 대가야 다음으로 가장 닮은 가야가 소가야인 것이다. 마치 국도가 있으면 부도가 있듯이 대가야는 섬진강 일대의 부도의 이미로 소가야로 불린 것이다. 결코 미미하여 작은 가야로 불린 것이 아니다. 이때 소(小)는 버금 내지 흡사 준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위대한 근초고왕은 초고왕을 본받아 불린 것처럼, 소가야는 어쩌면 대가야를 능가하는 또 하나의 대가야인지 모른다. 이를 <일본서기>는 소가야의 원래 이름 반파국으로 불렀을 것이다.

 

무령왕 때 대사 지역을 끝까지 지킨 반파국의 수장들의 안식처가 지금의 고성 송학동 고분이다.

 

 

고성읍 송학동 고분

 

 

고분의 동쪽 거류산이 보인다. 거류산에는 산성이 있다. 소가야(반파국)의 고대 산성으로 추정된다.

 

 

 

 

 

 

 

 

 

거류산과 거류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