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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라 강따라/산따라 강따라

충북 영동 : 초강의 태고가 스며있는 보배로운 땅

<2012년 2월 25일>

 

 겨울의 끝자락에 영동의 초강 일대를 둘러보다.

 

 

표지사진 - 벼랑(망경대) 위 영동 황간면 반야사 문수전

 

 

반야사 앞길

 

반야사 대웅전

 

반야사 삼층석탑

 

 

 

극락전

 

 

 

극락전 앞 500년 묵은 배롱나무

 

 

 

 

 

반야사 앞 문수전 가는 길

  

 

 

반야사 앞 석천. 석천은 초강의 주요 지류이다. 석천은 백두대간 화령 부근의 상주시 화서면 봉황산에서 발원하여 중화지역을 적시며 남류하다가 황간면 월류봉 부근에서 초강에 합류한다. 초강은 백두대간 삼도동(충청북도, 경상북도, 전라북도의 남한 세 북도가 맞나는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과 민주지산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월류봉 부근에서 석천과 만나 규모가 커진다. 월류봉에서 초강은 뱀처럼 사류하며 서진하다가 영동 심천면 소재지 앞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문수전 가는 산책길

 

망경대 문수전 아래 석천 상류 방향

 

석천을 거술러 북류하면 백화산 계곡을 감싸안은 금돌성이 나온다. 금돌성에서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대백제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대회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금돌성은 삼한통일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금돌성은 궁성의 위격을 갖추고 있다. 신라 대왕이 서라벌 도성을 나와 금돌성에 묵으며 삼한통일에 전력을 기울인 흔적이다. 금돌성에서 석천을 따라 반야사로 내려오는 길이  당시의 대백제 진격로라 할 수 있다.

 

문수전을 오르며 바라본 석천

 

문수전이 보인다.

 

 

 

 

 

가끔 우리 산하의 절을 다니다 보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 무척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긴 부처님 사리가 석섬(?)이나 나왔다니 많기도 하겠지만, 이 또한 종교의 물신화 현상이 아니겠는가? 눈 앞에 보여야 믿는 세상이 되었으니...... 하늘도깨비 씁쓸. 반야사의 행태를 비판한 건 아님.

 

반야사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의 풍경

 

 

 

 

 

 

 

 

 

 

 

 

 

 

 

석천 아래에서 바라본 망경대와 문수전

 

 

 

 

 

 

 

반야사를 둘러보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황간 월류봉이다.

 

 

 

 

 

 

 

 

 

 

 

 

월류봉 맞은편 한천정사

 

 

 

 

 

 

한천정사를 둘러보고 느낀 소회

 

한천정사는 우암 송시열이 조선 숙종 대 환국으로 실각하고 자연으로 돌아와 제자를 가르치며 권토중래하던 곳이다. 환국은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국을 주도하던 조선 숙종 대의 정치현상을 말한다. 숙종은 환국을 이용하여 신권 위에 왕권을 두려고 하였다. 허나 왕권을 우위에 두려던 남인이 패배하고 신권을 통해 왕권을 견제하려던 서인이 결국 집권합으로써 왕권은 급속도로 약화되어 사도세자의 죽음과 아들 정조의 독살(?)을 거치며 훗날 세도정치의 싹이 형성된다. 세도정치란 흔히 삼정의 문란으로 대별되듯 피지배층 입장에서는 숨조차 쉬기 힘든 삶의 질곡이었지만, 지배층의 입장에선 파라다이스 그 자체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를 한국 기득권 내지 보수주의의 원형으로 이해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왕권 강화를 통한 변법을 추구하였으나, 이 또한 태생적 보수성과 폐쇄성으로 인해 근대국가로의 진입에는 실패한다. 결국 대원군은 명성왕후 일파에 의해 청군에게 붙잡혀 청으로 압송되는 비운을 겪는다. 명성왕후는 지배층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을 무참히 진압하고, 피지배층(농민)이 일으킨 갑오농민전쟁에 긴장하여 청군을 부르다가 그만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일본군은 청군을 격퇴하고 농민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다. 명성왕후 시해 사건도 이러한 경과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가끔 명성왕후를 떠올리면 무능한 지배층의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든다. 국모가 제 백성을 죽이고자 외국 군대를 불렀으니 그녀가 과연 국모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여자라는 약한 이미지와 왕후라는 고귀한 존재,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성이 혼합된 국모살해사건의 신화는 한꺼풀 벗겨보면 추악한 지배층의 자기 대가를 치룬 것 뿐이다. 다만 조선의 왕후가 살해되었으니 조선의 백성으로서는 자존에 입은 상처를 회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간의 역사를 고찰하면 그것은 값비싼 동정일 뿐이다. 그렇다고 일본제국주의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만약 일본국왕의 왕후를 조선의 무사들이 살해했다면 일본인들은 어떤 역사적 심정을 가졌을까? 역지사지로보면 답은 명확하다. 우리 정부는 국모살해사건에 대해 역지사지를 언급하며 일본제국주의를 질타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일본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세도정치를 구축했던 지배층은 구한말 일본제국주의가 노골화되자 이씨 왕조를 버리고 친일파로 재빠르게 변신한다. 도대체 그들에게 조선과 민족은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오로지 기득권 유지를 위한 기회주의의 극치로 달려가고, 해방이 되자 다시 친일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 반공주의자로 거듭난다. 대를 이어가며 변신하는 기회주의자들은 오늘날 보수주의라는 이념적 구호를 외치며 숙종 대 서인들이 꿈꾸던 그들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송시열이 지금의 보수주의의 뿌리로 보는 것은 사고의 비약이 아닐까 하고 반문할런지 모르겠다. 물론 송시열은 왕권의 견제로 신권을 주장한 정도전의 사상적 흐름을 이은 사림의 진정한 계승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행태였다. 묘하게 신권을 주장한 자들은 기득권이었으며, 정치 행태는 붕당을 벗어나 일당 독재로 흐르며 정여립 사건 같은 무수한 역모사건과 쿠데타(인조반정), 심지어 왕과 세자(소현세자. 경종, 사도세자, 정조 등)까지도 독살하였다. 이처럼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은 행태는 우리 기득권이 그대로 물려받은 유산이다.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것이 우리 기득권의 행태이며 오늘날 보수주의로 행세하는 기회주의자들의 악행이다. 서인의 유습은 오늘날에도 기득권의 유전자에 그대로 각인된 듯하다.

 <천박한 역사적 지식으로 두서없이 찌걸여 보다>

 

 

다음은 영동 심천면의 난계박물관으로 향했다.

 

 

 

 

 

 

 

 

 

 

 

 

 

 

 

 

 

 

 

 

 

 

 

 

 

 

 

 

 

 

 

 

 

 

 

 

 

 

 

 

 

 

 

 

 

 

 

 

 

 

 

 

 

 

 

 

 

 

 

 

난계박물관은 우리 국악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는 유용한 교육장이다. 모르는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