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8일>
<표지사진 - 홍길동굴 위에서 바라본 공주시 정안면 일대>
금북정맥이 차령을 지나면서 금강의 지류인 정안천과 유구천을 동서로 완전히 가르는 지맥이 하나 있다. 이를 산꾼들은 '무성지맥'으로 부른다. 지맥 상 무성산이 제일 높아 무성지맥으로 부르는 것 같다. 무성지맥의 끝자락은 공주시 북안에 이르러 그 맥을 다한다.
무성산은 공주시 우성면과 사곡면 경계 중 해발 약 614m 정상부를 일컫는다. 그런데 무성산에는 정상부를 530m나 둘러싼 미니 포곡식 산성이 있다.
<삼국사기 잡지 제5 지리3>을 보면 백제 웅천주에는 영현이 둘이 있다. 웅천주는 웅진으로 한때 백제의 도성으로 지금의 공주시와 금강 지류인 정안천 연안인 의당면, 정안면 일대로 사료된다. 영현 둘은 열야산현과 벌음지현이 그것이다. 열야산현은 웅천주 남쪽으로서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 일대로 추정된다. 치소는 노성산성이다. 한편 벌음지현은 웅천주 북쪽으로 금강 지류인 유구천 일대로서 지금의 공주시 유구읍, 신풍면, 사곡면 일대로 비정된다. 치소는 공주시 신풍면에 있는 신풍산성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성산성은 백제 당시 군현의 경계와 치소로 보면 매우 애매한 곳에 위치해 있다. 사곡면에서 마곡사 가는 골짜기 동쪽 능선 정상부에 산성을 축조한 것이다. 매우 한가한 궁벽한 곳에 산성을 쌓았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마곡사 골짜기에서 북방으로 가려면 고개를 두 번이나 넘어야 한다. 만약 백제가 방어성을 쌓아야 한다면 그 고개 언저리에 퇴뫼식 산성 정도 축조했을 것이다.
한편 무성산성은 고대 교통로 상에서도 한참 떨어졌다. 그렇다면 무성산성의 주용도는 위기시 장기 농성에 적합하다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성산은 물이 풍부하다. 정상 8-9부 능선에서도 돌틈 사이로 물이 솟구친다. 그래서 긴 포곡식 산성을 쌓을 필요도 없이 퇴뫼식에 가까운 미니 산성을 쌓더라도 수원은 쉽게 구할 수 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농성으론 최고이다.
그렇다면 무성산성은 삼국시대보단 고려때 왜구의 침입을 대비한 농성으로 추론 가능하다. 특히 바로 인근에 마곡사라는 큰 절이 있어 승병과 관련지어 무성산성의 존속 이유를 알 것 같다. 참고로 마곡사는 지금도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다. 말사로 계룡산의 갑사, 동학사, 신원사 등을 거느리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마곡사의 위상이 지금보다도 더 컸다. 고려시대 무성산성은 마곡사와 반드시 관련이 있다.
대체로 무성산성은 고려시대에 축조되어 마곡사 승병과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왜구의 침입시 마곡사 승병의 책임 아래 지역 농성의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필자는 무성산성에 대한 다른 역사적 추론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는 1)무성산성이 재축되었다는 것, 2)치성의 흔적, 3)오누이 힘겨루기 축성 전설 때문이다.
무성산성은 일명 '홍길동성'으로 불린다. 홍길동이 이 산성을 근거로 공주 일대에서 활약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전남 장성군에서도 홍길동 생가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등 홍길동을 두고 공주시와 장성군이 지역 문화 콘텐츠화에 열두하고 있어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홍길동성 전설 - '티지털공주문화대전'에서 발췌>
- 내용
공주시 우성면과 정안면 그리고 사곡면의 경계에는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일러 무성산이라고 한다. 이 산의 상부에는 예전에 쌓은 석성(石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산성을 무성산성 또는 홍길동성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 이 산속에 홍길동과 누나 그리고 어머니가 살았다. 홍길동 오뉘는 힘이 장사였는데 자주 다투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오뉘에게 힘겨루기를 시켜 이기는 쪽만 살아남기로 하였다. 길동은 쇠 신을 신은 채 송아지를 끌고 한양을 갔다 오는 것이고, 누나는 무성산에 성을 쌓는 내기였다.
내기가 시작되자 쇠신을 신은 길동이 송아지를 몰고 한양으로 내달렸고, 누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을 날라 성을 쌓았다.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성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길동의 소식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성을 다 쌓으면 아들인 길동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날이 지나서 성이 거의 다 완성되어갔다. 어머니는 초조한 나머지 한 꾀를 생각해냈다. 그리고는 죽을 쑤어가지고 딸에게 가서 “얘야, 죽을 쑤어왔는데 먹고 하렴.” 하고 말했다. 딸이 “돌 하나만 걸쳐놓으면 성문이 다 되는데요.”라고 하자, 어머니는 “죽 먹고 기운내서 하거라.” 하며 어머니가 다그쳤다. 누나는 마침 배도 고프고 하여 뜨거운 죽을 입으로 불어 식혀가면서 퍼먹었다.
죽 한 그릇을 비우고 일어서려는데, 어느 사이에 골목 저쪽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닳은 쇠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며 길동이 도착한 것이다. 어머니와 딸이 동시에 ‘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오누이의 힘겨루기는 동생인 길동이 승리하였다. 약속대로 누나는 나무에 목을 매고 숨졌다. 지금도 무성산의 돌성은 성문이 완성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 있다고 한다.
- 모티브 분석
'홍길동성 전설'의 중심 화소는 오누이 힘겨루기이다.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은 우리나라 축성 전설의 한 유형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해 있다. 아들과 딸의 힘겨루기인 이 전설의 내용은 아들의 승리로 연계된다. 아들의 불리한 상황을 어머니의 계략에 의해 역전시킨다는 것이 하나의 전형이다. '홍길동성 전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홍길동과 그의 누나라고 하는 구체적 인물의 설정이 다른 지역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과 다른 점이다.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은 우리나라 축성 전설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의 공통점이 북방계 특히 부여나 고구려 축성 전설로 이해했다.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의 특징은 축성자와 그 실제 주인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부여나 고구려가 삼한(남방)으로 진출해서 성을 축조하고 난 후 빼앗기게 되는 과정에서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이 생겨났으리라고 추정한다. 충북 청원군 구녀산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무성산성 또한 고구려 계통의 산성일까? 재미있는 건 무성산성에서 5개의 치성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치성의 흔적이 곧 고구려 계통의 성이라는 것은 아니다.
과연 고구려 군대가 백제 도성인 웅진 바로 머리 위인 이곳 무성산 일대까지 진출했을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원군 금강 남북안 일대의 성들(남성골산성과 소문산성 등)과 대전 월평동 산성이 고구려 계통의 산성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아마도 이들 산성과 무성산성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시기는 대략 한강 유역의 위례성이 무너지고 난 후로 사료된다. 백제 위례성이 무너지자, 고구려 군대가 금강 연안까지 백제를 위협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후 동성왕과 무령왕 대에 이르러 백제가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을 때 무성산성은 백제의 산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마곡사가 번창하고 승병을 보유했을 때, 무너진 무성산성을 재축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다만 성내에서 토기나 기와 조각이 없어 산성의 축조 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과연 마곡사 깊은 골짜기에 산성을 축조한 까닭이 뭘까?
공주시 우성면 한천리 상영천 마을 회관 앞 등산로 안내도
무성산 정상
한천리 골짜기
송림이 잘 가꾸어져 있다.
무성산 전경
무성산 가는 임도는 좌측으로
임도삼거리1
임도가는 길
한천약수터 가기 전 무성산 홍길동성 가는 길.
도깨비는 임도로...
한천약수터
굽어보니 정안면과 우성면을 가르는 산 능선이 보이고...
홍길동 굴로 오른다.
홍길동굴 가는 길
홍길동굴의 입구는 막혀 있다고 한다.
다음은 홍길동굴 위 반석에서 조망한 사진들이다.
한천리 일대
정안면 일대
우성면 한천리와 정안면 평정리 경계 능선
한천리
드디어 무성산성이 보인다.
남벽
성 내부 평탄지
장대지
장대지
장대지 위에 무성산 정상석이 있다.
삼각점
서방으로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일대
장대지 지나서 본 성 내부
마곡사 일대 조망
서벽 구간
성 외곽에서 본 서벽 구간
무성산성의 성벽은 무너졌지만 그 흔적은 뚜렷하다. 전체적으로 매우 잘 만든 미니 포곡식 산성이다.
북벽 가는 길
북벽 내부 회랑도
북벽에서 바라본 성 아래. 등산로이다.
성벽은 작은 골짜기 아래까지 뻗어 있다.
수구문 입구는 동쪽으로 나 있다. 저수시설은 저 아래 평탄면에 있을 것이다.
동벽 구간의 평탄지
북벽으로 이어지는 동벽구간
저 어디쯤에 저수시설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확인은 못했다.
수구문에서 바라본 한천리
수구문 아래 골짜기
남벽으로 올라가는 구간
다시 되돌아 나오며
장대지 바로 인근 민묘 부근에서 바라 본 정안면 일대
다시 정상에서 사곡면 마곡사 방향을 바라보다
다시 남벽
이번에는 남벽 구간에서 수구문 방향을 바라본다.
하산은 사곡면 계실리 가는 임도삼거리2로 향했다.
무성산 일대에는 헬리포트가 많다. 무성산 정상도 헬리포트가 있다. 여긴 헬리포트2.
좌측이 계실리 방향
임도삼거리2
해가 지자 멧돼지들이 임도 바로 아래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도깨비 살금살금 내려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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