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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신라 산성

영동 읍성(부용리산성) : 신라 길동군의 치소

<2014년 1월 26일>

 

 

<표지사진 - 신라 길동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영동읍성 후면부 서벽구간>

 

 

필자는 영동 유곡리산성(고반대)을 보고 바로 영동읍으로 향했다. 영동읍에는 신라 길동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영동읍성이 있다.

영동읍성은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산 45-3번지 속칭 성안이라고 부르는 구릉상에 위치한다. 영동향교 뒤편의 해발 181.2m 봉우리를 중심으로 동쪽의 경사면을 좌우에서 감아 돌며 축조하여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방형(方形) 내지 제형(梯形-사다리꼴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현재 서쪽의 일부에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1997년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성벽의 둘레는 약 1,125m로 확인되었다. 성벽 축조방식은 3가지가 확인되는데, 먼저 외면을 석축하고 내측을 할석이 섞인 토축으로 처리한 구간, 둘째 내탁다짐부의 안쪽에 순수 판축부가 있는 구간, 세째 석축과 토축이 교대로 축조된 구간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축조 양상은 영동읍성이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곳 군의 치소로 기능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읍성 안팎에서 원삼국 및 삼국시대 토기편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류, 고배, 고려시대의 기와편과 청자편,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 등 각 시기의 유물이 다양하게 수습되고 있어 영동읍성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더욱이 읍성 주위에는 지명과 연관된 연원이 오래된 신라시대의 설화들이 남아 있어 영동 읍성 터가 바로 고대 길동군의 치소였다는 것을 확신케 한다.

 

- 어서실의 유래 (영동읍사무소 홈페이지에서 발췌) -

 

어서실은 작곡산성(昨谷山城) 부근에 있는 한 골짜기에 불과한데 여기에는 삼국시대 국경분쟁이 자주 일어나던 때 한 군주와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산성을 중심으로 한 신라, 백제의 싸움은 연일 그칠 사이 없이 일어났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날이 갈수록 신라군은 백제군에게 밀리는 입장이 되었다. 작곡산성(昨谷山城)을 맡고 있는 신라장군은 서울(지금의 경주)로 사람을 보내어 왕의 독려를 요청했다. 날이 갈수록 군사의 사기가 시들어가는 신라군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 왕은 곧 서울(경주)을 떠나 국경지대로 향했다. 왕이 작곡산성의 신라군을 독려하기 위하여 서울을 출발했다는 소문은 인근 산성에도 알려 졌다.

인근 산성을 맡아 싸우던 장군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에게 청을 넣었다. 기왕에 서울을 떠나 국경으로 나오신 왕이시니 이번에 우리 산성에도 들러 장병들을 위문해 달라는 청이었다. 왕은 참으로 난처하였다. 국경지대를 빼어 놓지 않고 모조리 살피고 돌아 다니는 일은 무엇보다도 왕이 해야 할 일이었으나 그렇게 되면 서울의 나라 살림은 누가 맡아서 한단 말인가? 처음 서울을 출발할 때보다 왕의 발걸음은 바빴다. 신라왕이 작곡산성일대 신라 백제 양군의 격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인근 산성에서도 치열한 양국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왕은 산성 안에서 잠시 앉았다가 곧 일어나서 다음 산성으로 수레를 재촉하였다.

그 뒤부터 산성 안 사람들은 왕이 잠시 앉았다 간 자리를 어좌실(御座室)이라 불렀다. 이 어좌실은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차츰 바뀌어 어서실 혹은 어제실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며 지금은 군 탄약창으로 인하여 완전 소멸되고 말았다.

 

어제실은 한자 '작곡(昨谷)'으로 표기한 듯하다. 작(昨)은 '어제 작'이다. 한글과 한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 것이다. 아마 일제 때 마을 이름들을 자기들이 알기 편한 한자로 고치면서 어원을 무시하고 벌어진 일이리라. 1992년에 어서실로 가는 철도가 생기면서 성지철교 및 성지굴(철도굴)이 생기게 되었다. 작곡동 즉 어서실은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이 외에도 부용리 역말 북쪽에 중갱이골이라 불려지는 골짜기에는 신라의 명장 품일 장군의 아들인 화랑 관창의 명복을 빌었다는 유서 깊은 절이 있다. 그 절의 원래 이름은 품관사다. 지금 읍성 서쪽 골자기에 위치한 금성사가 품관사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양가동에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고, 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와 을곡 간에는 화강암을 12층 내지 15층에 걸쳐 질서 정연하게 쌓은 석실고분이 있으며, 양가동 동북방과 서북방 2개소에 25기의 고분군이 있다. 고대 신라 조정에서 이곳 길동군으로 파견된 지배층의 무덤으로 사료된다.

 

이처럼 많은 사실들이 영동읍성이 고대 신라 길동군의 치소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4번 국도변 구릉에서 바라본 영동읍내 전경. 서북쪽으로 영동읍성과 금성산(부용산)이 조망된다. 아래로 경부선 철도가 보인다.

 

동쪽으로 4번국도, 경부선, 고속철이 보인다. 영동읍은 고대나 지금이나 한반도 간선 교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다.

 

 

 

금성사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곤 경내를 둘러보았다.

 

 

금성사 안내판. 햇빛에 반사되어 판독하기 어렵다.

 

 

 

금성사(錦城寺) -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 인용 

 

주 소 :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산 7-2

지정사항 : <지정사항 없음>

시 대 : 삼국시대

종 류 : 사원 사찰

참고사항 : 청주대학교 박물관, 1992, <<영동군 문화유적>>, 57. 

 

금성사는 부용산 일명 금성산(錦城山)의 이름을 딴 절로서, 신라 무열왕 때 품일(品一)장군과 아들 화랑 관창(官昌)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할 때 이 곳 중강곡(中江谷)에서 야숙하게 되었고 관창은 황산벌에서 전사하였으나 품일 장군은 개선하여 돌아올 때, 이 곳을 지나며 관창의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사찰을 건립하여 '품관사(品官寺)'라 이름짓고 금성산을 품관산(品官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1946920일 박남파(朴南波) 스님과 같이 협력하여 4칸 법당을 창건하고 '금성사'라 하였는데 1953813일 김침허(金枕虛) 화상(和尙)이 주지로 부임하여 대웅전 10, 요사 9, 객실, 창고 등 12평을 창건하고 4.8m의 금강석탑을 건립하였다. 경내에 약수가 있어 수심 1m, 1.2m로 가뭄에 마르지 않고 홍수에 넘치지 않아 많은 영동읍민의 아침 등산의 요람이 되고 조용하고 아담한 사찰이다. 금성사 주변에서 고려시대의 기와편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죽주범초근수□□□흥국칠년임□□년근수(竹州凡草近水□□□興國七年壬□□年近水)'라는 명문와편이 발견된 바 있어 주목된다. 명문의 판독에 의문점이 있으나 대략 '태평흥국칠년임오(太平興國七年壬午)' 즉 고려 성종 1(982)에 기와를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어 고려초부터 이 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신라 무열왕 때 품일(品一)장군과 아들 화랑 관창(官昌)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할 때 이 곳 중강곡(中江谷)에서 야숙하게 되었고 관창은 황산벌에서 전사하였으나 품일 장군은 개선하여 돌아올 때, 이 곳을 지나며 관창의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사찰을 건립하여 '품관사(品官寺)'라 이름짓고 금성산을 품관산(品官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영동읍성 서벽구간

 

금성사와 금성어린이집 뒷편으로 금성산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약수터. 먹을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금성산 등산로 안내판. 정상까지 1.1km라니 가벼운 산보 정도다.

 

 

 

이정표

 

이정표 부근에서 바라본 영동읍 전경

 

영동읍성 후면부

 

 

 

다시 금성산을 향해

 

금성산(錦城山) 전경. 금성산의 다른 이름은 부용산(芙蓉山)이다. 부용이란 이름은 비옥한 들판과 이수의 맑은 내를 앞두고 있는 마을의 한복판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이 못에 핀 연꽃의 향기가 온 마을을 덮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앞서 품일과 관창의 설화를 따서 품관산이라고도 한다.

 

 

영동읍 전경

 

 

 

 

 

좌측으로 어서실 고개 가는 길이다.

 

금성산 정상은 우측으로

 

정상 오르는 길

 

마치 성벽처럼 보이나 실제 금성산 정상에는 산성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영동군의 산성 중에 금성산성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성산성은 어디에 있을까?

 

 

금성산성(錦城山城) -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 인용

 

주 소 :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산 45-1

지정사항 : <지정사항 없음>

시 대 : 삼국시대

종 류 : 성곽 보

참고사항 : 청주대학교 박물관, 1992, <<영동군 문화유적>>, 24.

 

영동읍 부용리 산 45-1번지 해발 436.5m 금성산(錦城山)의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테뫼형 석축 산성이다. 읍성지에서 서쪽으로 똑바로 올려다 보이는 산봉우리에 쌓여진 석축 산성으로 규모가 작고 동쪽 읍성지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다. 성 주위에 많은 민묘가 들어서고 수목이 우거져 성벽을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남쪽면 일부에만 높이 약 58cm의 석축이 남아 있다. 동쪽으로 영동읍 맞은편의 주곡리 노고산성(老姑山城)과 백마산성(白馬山城) 그리고 멀리 백화산성(白華山城-금돌성)이 조망되며 서쪽으로 무주·금산 방면의 교통로와 여러 산성들이 통망되어 낮은 야산에 구축된 읍성을 보완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약간 있다.

 

<전국문화유적총람>을 보면 금성산성은 실제 금성산 서쪽 1km 정도 떨어진 해발 436.5m의 산정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라고 한다.

또한 <한국의 성곽과 봉수>에서는 작곡부락(昨谷部落-어제실) 서방 약 540미터 지점의 석성으로 둘레 약 450미터이며 대부분 붕괴된 상태다. 성 가운데에는 항상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으나 주인이 명당이라 하여 메우고 묘를 썼다. 주위에서 쇠붙이와 기와 조각이 출토된다.”고 하였다. 이는 <문화유적총람>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한다.

지금 작곡동은 군 부대의 탄약창고로 사용되고 있어 작곡동으로 해서 상기 금성산성을 답사하긴 어렵다. 하여튼 금성산 정상에는 금성산성이 없다.

실제 금성산성은 성산 혹은 산성산으로 불리는 해발 436.5m의 산정에 있다. 금성산성의 흔적을 찾으려면 이곳 산성산을 올라야 한다. 산성산은 영동군 심천면 명천리 양지말에서 포장된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법곡저수지 부근에서 좌측 능선을 타고 오르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필자도 아직 답사하진 못했다.

산성의 내부에서는 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발견됐고, 남서쪽 기슭에 고분군이 있다고 한다.

 

 

 

 

금성산 정상

 

정상에서 바라본 영동읍내

 

 

 

 

 

정상 서쪽 방향

 

금성산성이 있는 산성산이 어디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서북방으로 금돌성이 있는 백화산이 보인다.

 

어서실 고개 방향으로 내려오다 서쪽을 조망하며 산성산을 찾아 보았다.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비로소 산성산이 고개를 내민다. 좌측의 산정이 평평한 산이 바로 산성산이다.

 

산책로

 

금성산. 부용산. 갑자기 부용산을 떠올리니 안치환의 '부용산' 노래가 생각나서 스마트폰으로 들어보았다.

 

 

부용산

 

부용산 오리길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 사이로 /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 너는 가고 말았고나 //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은 누이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일종의 제망매가이다.

이 노래말을 쓴 박기동 선생님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해방 후 벌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여동생 박영애가 18살에 시집을 가서 24살에 병으로 먼저 가게 되고 그 누이를 벌교 부용산에 묻고 되돌아와서는 글로서 그 슬픔을 쓰니 그 글이 바로 부용산 노래말이 되었다.

그 후 박기동 선생은 목포 항도여중(현 목여고)으로 전근을 오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문학 천재소녀 김정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김정희도 백일장 전국대회 대상을 수상하곤 항도여중 3학년때 병으로 죽게 된다. 그 슬픔을 당시 음악 담당인 안성현 선생님('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이 부용산 노랫말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용산'은 금지곡이 되었다.  해방후 빨치산들이 많이 불렀다는 이유로 더 이상 불리여질수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어서실 고개 하산길에서 바라본 산성산. 산성산 너머에는 금강이 남북으로 흐른다. 산성산에서는 신라 조비천현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일대가 다 조망된다.

 

산성산

 

수문통골

 

영동읍성 후면부에 자기 파편이 뒹굴고 있다.

 

영동향교 옆의 읍성 장대지 가는 길

 

영동향교 명륜전

 

 

 

 

 

영동향교 정문

 

 

 

영동향교 대성전

 

읍성 안내판

 

읍성 정상부

 

향교와 읍성 전경

 

이 전체가 영동읍성이며, 또한 고대 신라 길동군의 치소성터였다.

 

성안마을

 

 

 

현감들의 영세불망비. 설마 탐관오리는 아니었겠지. 

 

난계국악당

 

영동천. 고대에는 영동천이 이곳 길동성(읍성)의 자연해자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내려가는 길. 이곳도 성벽으로 추정된다.

 

홍살문 뒤로 향교. 이 일대 전부가 읍성터다.

 

금성사 가는 길의 안내판.

 

금성사 가는 길로 좌측이 읍성의 서벽 구간이다.

 

금성사로 다시와서 안내판을 찍어도 햇빛에 반사되어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금성 어린이집 주차장에서 바라본 영동읍성(신라 길동군의 치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