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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신라 산성

영동 성재산성 : 신라 조비천현의 치소인가?(1)

 

<2014년 1월 26일>

 

 

<표지사진1 - 영동 대왕산성과 성재산성 사이에서 바라본 성재산성 전경>

 

 

- 조천성은 7C 중반 신라와 남부여간의 최대 화약고이다

 

필자는 <조천성전투(2011.3.11 답사)> 글에서 조천성 전투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655년 남부여와 고구려는 신라를 일시에 공격한다. 일종의 군사공조였다. 이때 신라는 33성이 함락되어 위기를 맞는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한다. 당나라는 화답하고 곧바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에 신라는 대 고구려 전선에서 평화를 찾고, 곧바로 남부여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한다. 그것이 바로 조천성 싸움이다. "

 

조천성 전투의 기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조천성 지역이 당시 '남부여와 신라간의 최대 화약고'라고 평한 바 있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조천성 전투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 열전에 그 단편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김흠운 열전><취도열전>을 보면, 남부여와 고구려에게 33성을 빼앗기고 난 후 무열왕이 우선적으로 조천성을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대 남부여 전선 중에서 조천성 지역이 최대의 화약고임을 유추케 한다."

 

 

 

<표지사진2 - 원당천과 대왕산성>

 

 

<성재산성과 대왕산성의 위치도>

 

 

- 조천성은 어디인가?

 

그런데 당시 필자는 <조천성전투> 편에서 조천성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다. 사실 잘 몰랐기 때문이다. <전국문화유적총람>을 보면 일반적으로 조천성은 대왕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아평(鵝坪)마을 북방 약 1km경 대왕산(大王山, 337.8m) 산정을 감고 있는 석축 산성으로 완전 붕괴되었으며 신라와 백제계의 토기편과 기와편 이외에 고려 토기, 자기(磁器)와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激戰地) 조천성(助川城)에 비견되며, 둘레는 약 657m이다. 송호리(松湖里) 일대의 옛 양산지역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이 산성은 북동남서방향으로 뻗은 산등성이의 남서쪽 끝 2개의 산봉우리를 감싸고 구축한 마안형(馬鞍形) 석축 산성이다. 이 산은 송호리 쪽을 향한 북쪽이 절벽을 이루었고 남쪽 학산 쪽으로는 다소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이 산성은 석축 위에 토축한 소위 토석축성인데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돌무더기를 따라 전체의 윤곽을 살필 수 있는데 지금은 수풀이 무성하여 조사에 어려움이 있다. 성벽의 축조는 외벽만 석축하고 안쪽은 주로 산허리를 깍아 내탁한 것으로 보인다. 토량이 많이 무너진 부분에는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데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곳에서는 폭 56m의 성벽부를 확인할 수 있다."

 

대왕산성이 조천성일 것이라는 견해는 조천성이 조비천현의 치소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적절한 규모로 짐작된다. 당시 삼국 군현의 치소는 대부분 둘레가 500m 정도였다. 앞서 답사하였던 화령고성이나 중모고성 같은 신라계 군현의 치소의 둘레가 600m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대왕산성은 657m로 역시 현의 치소 규모로는 적당하다.

필자는 대왕산성이 당시 조비천현의 치소인 조천성이라는 데 이의는 없다. 다만 처음부터 대왕산성이 조천성이라고 비정하는 것에는 견해가 다르다.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는 영동 양산면 원당리에 소재한 성재산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양산면 원당리와 학산면 박계리 경계의 해발 약 180m의 야산으로 속칭 성재라 불리는 낮으막한 구릉지에 있는 소규모 석루이다. 1)원당천이라 불리는 소하천을 사이에 두고 대왕산성(大王山城)1km 정도의 거리에 마주보고 있는 위치이다. 이 성재산 산성은 1970년대 초에 조사되어 2)백제의 조천성(助川城)으로 비정되는 대왕산성의 부성(副城), 또는 신라의 김흠운(金歆運)이 백제 조천성을 치기 위해 유영(留營)하였다가 전사한 곳으로 추정된 바 있다. 석성의 흔적은 대왕산성 쪽인 성재산의 남동쪽 구릉지 위에 구축되어 있는데 서쪽으로는 산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동쪽은 원당천을 향하여 급한 경사를 이루었다. 3)성의 둘레는 실측 결과 약 234m로 확인되었으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남북쪽에 2개소의 성문터가 추정될 뿐으로 특별한 시설은 발견되지 않는다. 성을 쌓은 석재는 화강석으로 주변에서 채취하여 사용한 듯 한데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았다. 성 주변에는 파괴된 고분이 있으며 토기편과 기와편이 흩어져 있는데 토기편은 대부분 신라토기이고 기와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가 직접 답사한 바로는 <전국문화유적총람>에 기록된 성재산성의 설명이 조금 잘못된 것으로 보였다. 

 

1) 원당천이라 불리는 소하천을 사이에 두고 대왕산성(大王山城)1km 정도의 거리에 마주보고 있는 위치이다

 

실제 성재산성과 대왕산성 간의 직선거리는 2~300m 불과하다. 지근거리에 두 개의 산성을 쌓았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남부여와 신라가 원당천을 사이에 두고 비교적 오랫동안 대치했거나 아니면 필요에 의해 둘 중의 하나는 먼저 쌓았는데 단점이 있어 산성을 이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후자로 생각된다.

 

2) 백제의 조천성(助川城)으로 비정되는 대왕산성의 부성(副城), 또는 신라의 김흠운(金歆運)이 백제 조천성을 치기 위해 유영(留營)하였다가 전사한 곳으로 추정된 바 있다

 

성재산성을 대왕산성의 부성 내지 신라 김흠운 장군이 유영한 곳으로 이해한 것은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다.

"영휘(永徽) 6(655) 태종대왕(太宗大王)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분하게 여겨 이를 치고자 도모하였다.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大監)으로 삼았다. 이에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에 도달하여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나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

 

일반적으로 양산은 대왕산으로 비정한다. 양산 아래 군영을 설치한 까닭이 무엇인가? 이는 바로 김흠운이 신라군을 이끌고 조천성인 성재산성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는 뜻이다. 즉 당시 대왕산에는 산성을 축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신라가 조천성으로 비정되는 성재산성을 무너뜨린 후, 성재산성의 단점을 보완하여 대왕산에다 산성을 축조한 후 조천성을 이전한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로 양산을 비봉산으로 해석하면 비봉산성이 조천성이 된다. 그런데 당시 현의 치소를 너무 높은 산정에 둘리는 만무하다. 비봉산은 높이가 482m에 이른다.

 

3) 성의 둘레는 실측 결과 약 234m로 확인되었으며

 

성재산성은 결코 소규모 석루가 아니다. 높지도 않은 구릉지에 감제 기능의 보루를 만들 까닭이 없다. 그랬다면 차라리 대왕산 산정에다 보루를 만드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필자의 보폭을 감안해서 걸어보아도 적어도 둘레가 400m 정도는 된다. 필자는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 말하는  실측 결과 약 234m로 확인되었다는 설명에 동의할 수 없다.

더욱이 성재산성 북서쪽으로 낮은 골짜기를 감안한다면 당시 조그만 현의 치소로는 충분히 기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천성 전투의 발발이 신라가 쌓은 조천성을 남부여가 침탈하자, 이에 대한 보복전으로 감행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훗날 신라는 성재산성의 단점을 보완하여 대왕산에다 다시 조천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는 필자의 추론이다. 대왕산성과 비봉산성을 답사한 후면 또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표지사진3 - 남부여와 신라군이 접전을 벌이며 피를 흘렸을 원당천. 필자는 원당천을 조비천으로 해석한다. 원당천을 사이에 두고 좌측 낮은 산이 성재산성이고, 우측 높은 통신탑이 서있는 곳이 대왕산성이다.>

 

 

아무튼 조천성 전투는 신라와 남부여 양자에게는 불퇴전의 전투였다. 신라 승려 도옥이 이름을 취도라고 개명하고 기꺼이 조천성 전투에서 목숨을 버린 것을 보면 조천성 전투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는 바다.

 

태종대왕(太宗大王)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 쳐들어오자,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때에 도옥이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승려가 된 자는 위로는 학술에 정진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다음은 도()의 쓰임을 일으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모습만 승려와 비슷할 뿐이고 한 가지 좋은 것도 취할 만한 것이 없다.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승복(法衣)을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고 이름을 고쳐 취도(驟徒)라고 하였다. 달려가서 보병()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병부에 나아가서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였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지에 나갔다. 깃발과 북소리의 진격 명령에 따라 창과 긴 칼을 가지고 돌진하여 힘껏 싸워 적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삼국사기 취도열전>

 

양산벌에서 피를 흘렸던 남부여와 신라군 군사들의 원과 척이 풀리기를 기원한다.

 

 

영동읍에서 양산면 원당리 가는 도중 바라본 외마포 전경. 지금은 도로가 나 있지만 당시에는 합수부로 거대한 늪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길동군(지금의 영동읍)에서 조비천현(지금의 양산면과 학산면)으로 가기 위해선 학산면소재지에서 원당천을 따라 양산벌로 들어서야 했을 것이다.

 

마포에서 바라본 대왕산 능선

 

 

필자는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 대왕산성과 성재산성의 거리가 1km라는 설명에 원당리 너그말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할 수 없이 원당리 마을회관에서 주민의 설명을 듣고 성재산성을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주민들도 산성이 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성재라는 말에 혹시 그쪽을 찾아보면 될 것이라고 언질을 준다.

필자는 확신할 수 없어 그냥 동네 산보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우고 대왕산을 주시하면서 산성이 있을만한 구릉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눈에 띠는 산길 하나가 보였다.

 

 

 

 양산면소재지에서 학산면 박계리 넘어가는 고개(505번 지방도) 직전의 영동산골오징어 입간판

 

 

입간판 다음 원당리 가는 포장 임도. 성재산성 가는 길이다.

 

 

박계리 가는 길

 

양산면소재지 가는 길

 

임도 오르는 길

 

돌아보면 비봉산 서쪽 능선 끝이 보인다.

 

 

 

 

 

 

저 모퉁이를 돌면

 

 

무덤으로 올라서는 길이 보인다.

원당리 가는 길

 

무덤 부근에서 대왕산 능선을 바라본다.

 

 무덤 옆 등산로

 

 동남방으로 대왕산성이 보인다.

 

 

동쪽으로 대왕산 능선이 보이고...

 

동북방의 원당리

 

 

 

 

 

 모퉁이에서 좌측으로 내려 가야 한다.

 

 모퉁이에는 삼기의 묘가 있다.

 

 

 

건너편 대왕산성

 

원당리에서 박계리로 가는 고개

 

고개에서 북쪽 골짜기를 바라본다.

 

 

 

고갯길에서 오르는 구간인데, 올라서면 성재산성의 흔적이 나타난다.

 

무덤 뒤가 축성구간이다. 하지만 처음 진입했을 땐 몰랐다. 나중에 석축을 확인하고 성벽을 둘러보았다. 처음엔 산성이 없어 조금 실망스러웠다. 

 

석축을 확인하는 순간.

 

다 허물어져 석축은 낙엽속에 숨겨져 있다. 낙엽 속의 돌을 밟으며 얼마나 기뻤는지. 마치 인디애나 존스가 된 기분이다. 하늘도깨비 복 받은 날이다.

 

 

낙엽 속에 감추어진 석축. 그 밟는 소리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즐겁다.

 

지금은 무덤자리지만 내부 평탄지로 당시에는 건물지였을 것이다.

 

 

 

 

 

 

사진만으론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직접 와서 석축의 흔적을 밟아보면 놀라운 기분을 느낄 것 같다.

 

동남벽 구간

 

 

동벽과 남벽의 모퉁이

 

반대편에서 남벽 구간 조망

 

 

동남벽 무덤 아래에서 석축의 흔적을 만나다.

 

 

 

동남벽 모퉁이 아래 급경사

 

 

동북벽 구간에서는 석축의 흔적이 완연하다.

 

 

북벽 외곽. 이곳도 성지로 보이나 실상은 석축 외곽에 있다.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산성의 돌을 사용한 것 같다.

 

 

 

북벽의 석축

 

 

 

답사를 끝내고...

 

성재산성과 대왕산성을 조망하기 위해 다시 원당천 사이로 나왔다. 성재산성 전경.

 

대왕산성 전경.

 

원당천

 

서로가 칼을 겨누었을 원당천 일대. 좌측이 성재산성, 우측이 대왕산성이다.

 

원당천. 당시 양 군사들의 피가 원당천에 뿌려져 북쪽의 금강으로 흘렀을 것이다.

 

대왕산성 바로 아래 원당천.

 

우측이 성재산성

 

대왕산성. 원당천을 건너면 바로 성재산성이다. 조천성 전투 때 신라군은 대왕산 아래에 진을 치고 성재산성 즉 조천성을 노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신라 김흠운 장군이 전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당천과 대왕산성

 

원당천 상류 방향. 학산면소재지 가는 길이다.

 

대왕산성

 

좌측이 성재산성, 우측이 대왕산성. 지근거리다. 직선으로 200m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성재산성에 대한 감흥으로 오늘 답사를 마무리한다.

 

돌아오는 길에 외마포 부근에서 금강 하류를 조망하다.

 

건너편 송림 뒤가 양산면 봉곡리 자라벌이다.

 

우측도로는 505번 지방도로 영동 심천면 가는 길이다.

 

 

자라벌 송림

 

멀리 북방으로 사루봉과 어류산이 보인다. 금강은 북류하는 반역의 강이다.

 

<끝>

 

답사 후기 : 성재산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답사한 것이 아니라서 사진을 시간 순이 아닌 공간순으로 배치하였다. 기억을 되살리다보니 장소 고증이 조금 헷갈린다. 허나 대체로(?) 맞을 것 같다. 혹 제 글을 보고 답사하실 분이 있다면 참고만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