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성기행(경상도)/고령,성주

고령 주산성 : '황성 옛터'의 쓸쓸함만 남은 대가야 도성

<2014년 4월 6일>

 

 

 

 

 

 

고령읍의 진산은 주산(311m)이다. 주산 정상부와 능선에 내성과 외성의 이중성이 바로 고령 주산성이다. 내성은 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9부 능선에 축조된 타원형으로 둘레는 약 711m이다. 외성은 내성의 남북 양끝에서 시작하여 산 아래 6부 능선을 따라 성벽을 둘렀고 둘레는 약 1,035m이다.

주산성 건물지 주변에서는 6C 초 대가야 양식의 통형기대, 발형기대, 장경호 등이 확인되었고, 남쪽 구릉으로는 지산동 고분군과 연결되어 있어 축성 주체는 대가야로 판단된다.

한편 주산성 동쪽 구릉의 말단부에 전 대가야 궁성지가 입지하고 있어 대가야 또한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 방어 개념에 충실했던 것 같다. 즉 평화시에는 평지성인 궁성에서, 위기시에는 산성인 주산성에서 외부 침입에 대비했을 것이다. 더욱이 주산성은 동북방인 가야산 일대로 대피할 수 있는 비상 탈출로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들로 추정컨대 주산성은 대가야 멸망과 함께 바로 폐성되지 않고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이용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에 대가야 멸망의 기사가 나온다.

 

진흥왕 23년(562) 가을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할 때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토지와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왕이 굳이 주므로 이에 받아서 포로는 풀어 주어 양인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TV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어릴 때 사랑했던 연인이 사다함으로 나오는데, 그 사다함이 5천의 기병을 이끌고 대가야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당시 사다함은 10대의 미소년었다. 대가야 궁성 정문인 전단문으로 백마를 타고 들어오는 10대 사다함을 바라보는 풍광이 선연하다. <화랑세기>에도 미실과 사다함의 관계는 확실치 않다. 극적 효과를 위해 연결지은 것 같다. 사다함은 같이 죽기로 맹세한 친구 무관랑(武官郞)이 병으로 죽자, 7일만에 따라 죽었다. 그때 사다함의 나이가 17세였다고 한다. 이러한 광경은 당시 서라벌에 동성애의 풍조가 만연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나, 어쩌면 사다함은 궁정의 권력 암투에서 자결을 강요받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무튼 관산성 전쟁(544)에서 대가야도 합류한 남부여 연합군이 대패한 후 대가야는 신라에 복속되었다가, 562년 대가야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이자, 신라는 대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관산성 전쟁 발발 18년 후의 일이다. 이후 신라와 남부여는 무주공산인 대가야를 두고 땅 따먹기에 몰두한다. 낙동강 서부 유역은 신라가, 섬진강과 금강 남부 유역은 남부여가 차지하게 된다. 결국 삼한 중남부에는 신라와 남부여 둘만 남게 되었고, 남부여 멸망인 663년까지 두 나라는 새로운 백년 동안 골육상잔의 대회전으로 치닫는다. 대체로 삼한 남부에서는 백두대간을 두고, 삼한 중부에서는 금강 유역을 두고 대회전이 벌어진다.

 

대가야 고분군을 지나 주산성을 마주하니, 불현듯 '황성옛터'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황성(荒城)은 '황폐해진 고성'이라는 뜻이다. 주산성 답사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쓸쓸히 남은 대가야 궁성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다.

 

 

 

 

 

고분이 끝나는 지점의 안내판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충혼탑으로 코스를 정한다.

 

 

 주산 정상 가는 길

 

 

충혼탑 가는 길

 

 

 

 

 

 

 

 

박묵월 시인의 시탑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충혼탑 가는 길에서 외성 진입 구간

 

 

외성 동벽 오르는 구간

 

 

돌아본 외성벽

 

 

정상 9부 능선까지 외성벽이다.

 

 

 

 

 

 

미숭산에서 이곳 주산까지 산행했다고 한다.

 

 

외성벽(동벽) 구간

 

 

 

 

내성과 외성이 만나는 9부 능선

 

 

 

 

 

 

정상

 

 

산책로에 모두 이름을 붙여 놓았다.

 

 

 

 

북쪽 중화저수지

 

 

 

 

 

 

아리송하다

 

 

북쪽 의봉산(551m). 의봉산성이 있다.

 

 

중화저수지

 

 

 

 

 

 

 

 

 

 

 

 

 

 

 

 

서북방으로 가야산이 보인다.

 

 

 

 

 

 

 

 

 

 

 

 

 

 

 

이 안내판에서 다시 내성과 외성이 합류한다.

 

 

가야산

 

 

 

 

우륵기념탑 및 우륵박물관 가는 니문의 가얏고 길

 

 

 

 

 

 

 

 

외성 내려가는 길

 

 

동쪽 금산성 일대. 사다함이 5천 기병을 이끌고 온 길은 어디일까?

 

 

의봉산

 

 

외성으로 내려가지 않고 내성 주위를 둘러본다.

 

 

 

 

내성 동벽 아래

 

 

고령읍내

 

 

 

 

 

 

 

 

 

 

 

 

 

내성 동벽 구간

 

 

 

 

 

 

 

 

내성과 외성이 만나는 구간. 회귀지점.

 

 

다시 내성으로 진입한다.

 

 

 

 

 

 

 

 

내성과 외성이 만나는 구간

 

 

내성

 

 

미숭산 가는 등산로

 

 

 

 

 

 

 

 

 

 

 

 

 

 

 

 

내성벽

 

 

다시 의봉산

 

 

 

 

 

 

 

외성 구간

 

 

 

 

 

 

외성벽

 

 

 

 

 

 

 

 

 

 

 

 

 

 

 

 

 

 

 

주산성 정문

 

 

 

 

 

 

 

 

정문에서 내려가는 길

 

 

 

 

남명 조식의 월담정시.

 

 

 

<퇴계유감>

 

남명 조식 선생을 떠올리니 단상이 하나 떠오른다. 즉 <퇴계유감>이다.

조선 성리학의 계보상 동인의 정신적 영수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다. 한양에서 봤을 때 낙동강 좌쪽인 강좌학파는 이황이, 강우학파는 남명이 정진적 지주였다. 선조때 서인들이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을 조작(송익필 기획, 정철 행동대장)하고 동인 특히 남명의 제자들인 강우학파를 정여립과 연결지어 학살할 때, 서인들의 서슬퍼런 기세에 그만 퇴계의 제자들인 강좌학파는 침묵하고 말았다. 이 사단으로 인해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갈리고 만다.

이후 임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북인 정권이 탄생한다. 북인 정권의 공과는 다음에 판단키로 하고 서인은 쿠데타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다시 북인들을 학살하며 정권을 장악한다. 그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반정은 그들의 명분일 뿐, 명백한 쿠데타 정권이다. 이후 조선은 서인들의 세상이 되고, 남인들이 일부 참여하는 조정을 꾸린다. 북인들은 재기하지 못하고 정신적 지주였던 남명의 사상은 금기어가 되었다. 이후 조선의 국풍은 보수로 일관하였고, 근대화도 늦게 된다.

필자의 생각에는 근대화 군주의 모델을 굳이 뽑으라면 정조가 아닌 광해군이라고 생각된다. 소설가 이인화는 <영원한제국>에서 정조를 근대화 군주의 모델로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출신지가 대구인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낙동강 좌쪽인 남인의 영향이 강한데서 유년기를 보낸 그로서는 보수적인 남인의 사상을 절대선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가라는 것이 결국 자신의 뿌리를 합리화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인화라는 소설가는 이문열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화페의 인물들은 서인과 동인들로 채워져 있다. 즉 존경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서인의 영수인 이이, 그것도 모자라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동인의 영수인 이황. 그들이 일견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긴 하나, 과하다고 생각된다. 좀더 민족사적으로 애국과 애족의 인물을 화폐에 넣을 순 없었을까?

필자의 고향은 남명 조식이 태어난 곳이다. 필자 또한 어릴 적부터 남명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보다는 세상을 하나의 시선이 아닌 여러 시선으로 봤으면 한다.

 

 

 

 

 

 

 

 

수문지 아래

 

 

 

 

 

 

 

 

 

 

 

 

 

 

 

 

 

 

 

 

 

 

 

 

 

 

 

 

 

 

 

 

 

 

 

 

 

원점회귀

 

 

다시 고분군을 내려오며...

 

 

 

 

고령읍내와 금산성

 

 

고령 고성 전경. 고령군 덕곡면 소재지에 있는데, 대가야 도성 외곽 방어성이다.

 

 

 

 

고령 노고산성. 역시 대가야 도성 외곽 방어성이다.

 

 

무흘계곡의 벗꽃

 

 

무흘계곡은 벗꽃이 조금 늦게 핀다는 걸 알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