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6일>
<표제사진 - 월평동 산성 장대(고대지)>
구성동산성을 답사하고 바로 월평동산성으로 향했다. 두 산성은 갑천을 두고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다. 안내문을 보면 구성동산성은 백제의 노사지현의 치소로 보고 있으며, 월평동산성은 백제부흥군이 활동했던 내사지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사지성이나 내사지성은 이름이 유사한데 실제는 동일한 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백제 노사지현의 치소는 어디일까?
필자는 초기 노사지현의 치소는 구성동산성이었다가 방어상 필요에 의해 월평동산성을 축조하고 이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구성동산성은 토성으로 삼한시대에 이미 이 지역의 유력한 세력이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백제가 근초고왕 시기 남벌을 단행하면서 금강 유역을 장악하는데, 그때 이곳 구성동산성 세력도 백제의 권역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 천도가 이루어지자, 대전은 도성과 가까우므로 신라의 서진이나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여 석성인 월평동산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때 구성동산성은 폐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평동산성은 이전에도 답사했으나, 그땐 둘러보는 정도였다. 그때 답사기라고 끄적거린 것이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을 구분하지 못했다. 월평동유적은 월평동산성에서 불과 20m 떨어진 서쪽 사면의 월평정수장 부지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월평정수장 건설 계획에 따라 1990년 9월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한 후 국립공주박물관과 합동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특이한 점은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에서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토기가 골고루 분포하는데, 이는 당시 삼국의 세력 판도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고구려가 토기는 475년 한강 유역의 한성 함락과 동시에 백제 왕조는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천도하는데, 고구려가 뒤이어 대전까지 남하해서 웅진성을 위협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유물로 추론하기도 한다. 한편 신라 토기는 신라가 내사지성(혹은 노사지성)에서 백제부흥군을 축출한 후 주둔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유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은 고대 삼국의 역학관계를 추론케 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사료된다.
대전일보 옆 도로에 주차하고 월평동산성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입구. 추풍령 할매 갈비가 맛있는 지는 모르겠다.
대한불교진각종 득도심인당. 득도가 득도(得道)가 아니라 득도(得度)이다. 마침 오늘이 초파일이다.
옴마니반헤훔의 6자 진언을 염송하는 것이 주된 수행법이다.
월평동산교회 교육관을 지나
등산로
<도솔산-매봉산-월평산성에 이르는 등산로 안내판>
안내판
남서벽 장대지
남문지 가는 길
남문지
남문지에서 아래로 바라본 남벽
내부 건물지
장대지
장대지에서 바라본 건물지
장대지
건물지
건물 평탄지에서 바라본 장대
건물지
남벽 산책로
동벽 가는 내부 산책로
동벽구간에서 건물지 오르는 길
남동벽 구간
동벽 구간
동벽
뒤돌아본 동벽
동벽 구간 옆에 있는 묘지도 산성 내부이다.
이 바위 또한 산성 내부이다.
여기서 동벽 구간은 끝난다.
동북벽 모서리 구간 석축의 흔적
등산로가 개설되어 석축의 흔적은 많이 지워졌다.
북벽 시작 구간
북벽 구간은 수풀이 있어 들어가지 않았다. 북벽에는 북문지, 건물지, 연지가 있다고 한다. 월평동산성은 북쪽으로 난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의 둘레는 680m이다. 그리고 필자가 답사한 바로는 월평동산성은 남벽 건물지 지역이 높아 내외성 이중 구조를 겸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동벽 구간을 거슬로와서 서벽 구간의 산책로를 답사했다.
남벽 건물지는 위치가 높아 흡사 산성의 내성처럼 보인다.
건물지에 마련한 쉼터
쉼터 아래 남벽 구간
남동벽 모서리 구간
동벽
동벽. 회곽도인듯 성벽따라 평탄한 구간이 이어진다.
동벽 아래 산책로
서벽구간으로 가기 위해 장대지 아래 길을 걷는다.
남벽 장대지
건물지로 사료된다.
장대지 서벽 아래로 가는 산책로
장대지와 서벽이 만나는 구간의 석축 흔적
서벽 구간의 산책로
서벽 구간 상의 평탄지
묘지 부근에서 서벽이 끝나고 북벽이 시작되는 것 같다.
저 부근이 북문과 연지가 있을 듯. 연지는 수문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장대지로 나와 서쪽 능선을 따라 조금 가면 월평동 유적이 있는 정수장이 나온다.
정수장 가는 길
월평동 정수장. 월평동산성 서문지 밖 조금 낮은 능선에 월평동유적이 있었는데, 발굴 조사 후 공사가 재개되면서 현재 유적은 대부분 멸실되었다. 자연에 대한 개발과 보존의 문제처럼 유적에 대한 개발과 보존의 문제는 항상 어려운 과제이다. 90년대 중반에는 유적보다는 정수장 개발이 더욱 중요한 가치였을 것이다. 지금에는 공존을 도모하며 정수장을 건설했을 텐데. 당시에는 둔산신도시에 공급할 정수장이 필요한 시기였으니...
<월평동 유적의 의의>
약 4000평 가량을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목책과 도랑이 조합된 방어시설, 2차에 걸친 석축성벽, 목곽고 1기, 주거지 11동, 대형수혈 2기, 저장공 350여기,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가 확인되었다.
목곽고 내부에서는 악기 금의 양이두(양의 귀 머리 모양)와 목제사다리 등이 출토되었다. 플라스크 모양의 저장공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발견되었고, 성벽 가운데 1차 성벽은 석축 사이에 나무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박혀 있어 고구려적인 축성 기법이다.
성벽의 구조와 토기로 보면 고구려군이 한때 이곳에 진출하여 방어시설을 구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개소문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유성구 신동의 금강 남안 유역의 소문성, 그리고 소문성 금강 북안의 세종시 부용면(구 충북 청원군 부용면) 일대 고구려 산성들과 함께 월평동 유적은 웅진시대 백제와 고구려와의 대치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그래서 유적이 멸실된 것이 안타깝다.
필자는 월평동유적이 월평동산성보다 앞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고구려군이 백제의 월평동산성을 함락시켰다면 따로 보루를 건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월평동 1차 성벽은 백제가 쌓았다가 고구려군에게 함락되고 고구려군이 2차로 성벽을 보강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백제군이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월평동 유적 동쪽 정상에 더욱 튼튼한 월평동산성을 쌓고 노사지현의 치소를 구성동산성에서 이곳으로 이전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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