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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공주 정지산 유적 : 나제회맹 유적지를 찾아서(3)

<2014년 5월 25일>

 

<표제사진 - 공주 정지산 유적, 웅진시대 왕과 왕후의 대빈(大殯) 터로 추정된다. 대빈은 왕이나 왕후가 죽고난 후 무덤이 축조될 때까지 주검을 임시로 모신 곳을 이른다. 또한 필자는 정지산 유적지를 라제회맹의 유적지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 (출저 : 인터넷 브리태니커)

 

665년에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熊津都督) 부여융(扶餘隆)이 취리산에서 국경문제에 대해 서맹(誓盟)한 것.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에서는 백제의 옛 땅뿐만 아니라 신라까지도 직접 지배하기 위해 663년에 문무왕을 일방적으로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에 임명하는 등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본국에 파견하여 유민을 안집(安集)시키고자, 그를 웅진도독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삼았다. 664년(문무왕 4)에 유인원(劉仁願)의 주재로 웅진에서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천존(天存)과 함께 화친의 서맹을 했다. 그후 다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당은 665년 8월에 문무왕과 부여융에게 웅진 취리산에서 서맹하게 하여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용인받도록 했다. 서맹문은 유인궤가 지었는데, 입에 피를 바르는 절차를 마친 후 제물들은 제단의 북쪽 땅에 파묻고 그 글은 신라의 종묘(宗廟)에 보관하게 했다. 그러나 그후 신라가 백제의 옛 땅에 대해 집요한 공략을 계속하자 두려움을 느낀 부여융은 바로 당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라는 당군에 대한 공격과 화친외교를 병행하면서 결국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 이하를 영토로 확보하게 되었다.

 

<신라를 위한 변론>

 

취리산 회맹은 문무왕의 입장에서는 치욕이었을 것이고, 부여융의 입장에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문무왕은 비록 사비성을 함락시켰지만 삼한 통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완전한 삼한 통일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 군대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고 나서야 가능했다. 신라의 삼한 통일은 백제, 왜, 고구려, 당나라를 순차적으로 격파하는 간난한 과정이었다.

필자는 가끔 고구려나 백제 우위의 사관을 지닌 사론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당시 삼국은 외국이었고, 민족이란 의식은 없었다. 즉 신라 입장에서는 당나라나 왜, 고구려나 백제는 차이가 없는 외국일 따름이다.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백제는 왜(야마토)와 거의 동체이다. 이런 당시의 국제 정세 속에서 최약소국인 신라가 삼한 통일을 이루고 지금 우리 민족의 근간을 마련한 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자기 비하라고 생각된다.

당시로 돌아가보면 신라가 삼한을 통일할 가능성은 제일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이룬 것은 위대하다. 더구나 그 과정은 지난했고, 신라는 그것을 극복했다.

물론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필자의 역사적 가정은 백제 즉 남부여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지금의 일본과는 아마 매우 사이가 좋았을 것이다. 서로간에 왕을 교류하며 삼한과 야마토는 통합을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 최악은 고구려라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중원을 정복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원에서 왕조는 단명을 거듭했다. 원나라는 중원을 정복한 댓가로 내몽고를 잃었고, 청나라는 중원을 정복한 댓가로 만주를 잃었다. 이를 필자는 '정복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지금의 한반도는 중국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가정이다. 혹자는 강대국 중국으로 사는 게 좋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지 모르겠다.

역사는 가정이 중요하지 않다. 과정이 중요하다. 신라의 삼한통일의 과정을 거쳐 우리는 오늘날에 이르렀다. 지금의 현실정치인 영남 패권주의와 결부되어 경상도를 흉노의 후예로 폄하하면서(실제 흉노는 야만족이 아니라 매우 훌륭한 기마족이다.) 반신라주의적 역사관이 만연되어 있다. 허나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현대는 통일신라라는 과정을 거쳐 오늘의 우리 민족에 이른 것이다. 신라의 지난한 삼한통일과정은 우리 민족에게 잡초와 같은 생명력을 제공한 자양분이다. 지금의 일본에 맞서도 한점 주눅들지 않는 자존의 토대가 바로 신라였다.

일본은 신라에 의해 반도에서 쫓겨난 유민들이 세운 복합 왕조이다.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에 대한 열등감의 근원을 제공해 준 것이 신라였다.이후 일본은 신라를 혐오하였고, 신라적인 것이 싫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는 고려와 조선이 싫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조선을 비하했고, 자신들이 힘이 있을 때 임진왜란과 대한제국 강제합병을 시도한 것이다. 그들의 반도 침략 본성은 신라의 삼한 통일에 따른 오래된 역사적 파토스(페이소스)의 축척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반신라주의적 역사관은 지금의 현실정치에 따른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은 있지만, 역사관으로서는 자기비하라고 생각한다.

 

클릭

 

 송산리 고분군 정상에 오르면 뒷길로 공주국립박물관과 정지산 유적지로 갈 수 있다.

 

 

공주국립박물관과 정지산 유적지로 가는 산책로

 

 

 

 

분기. 정지산 유적지로 향한다.

 

 

공주국립박물관 가는 길

 

 

웅진성(공산성)이 보인다.

 

 

정지산유적 가는 산책길은 호젓하다.

 

 

 

 

웅진성 북쪽의 금강교

 

 

정지산 유적. 송산리고분군에서 이곳까지는 10여분 산보 코스다.

 

 

 

 

 

 

 

 

 

 

기와 건물지

 

 

 

 

 

 

동쪽으로 웅진성이 보인다.

 

 

1호 대벽건물지. 대벽 건물에는 주춧돌 흔적이 없다. 이는 임시로 사용한 건물이란 뜻이다.

 

 

 

 

 

 

3호 대벽건물지

 

 

 

 

이때 공산성 부근에 경비행기 출현.

 

 

도시 상공에 경비행기가 날아도 되는 건가?

 

 

 

 

 

 

공산성(웅진성)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백제큰다리와 금강교가 보인다.

 

 

서류하는 금강과 우측(남쪽)의 공산성

 

 

 

 

 

 

 

 

 

 

2호 대벽건물지.

 

 

 

 

 

금강 건너 우측으로 취리산이 보인다.

 

 

취리산. 665년 당나라 칙사인 유인궤의 주선으로 계림도독 문무왕과 웅진도독 부여융(의자왕의 아들)이 백마의 피를 입술에 묻히고 화친을 결의하는 취리산 회맹으로 유명한 곳이다. 혹자는 회맹이 이루어진 취리산을 연미산으로 보는 이도 있다.

 

 

동쪽의 웅진성

 

 

 

 

서쪽의 연미산. 이곳을 나제의 회맹이 있었던 취리산으로 보기도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