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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합천 독산성(2) : 옥문곡 전투의 비밀을 간직한 신라 고성

<2021년 12월 5일>

 

<표제사진 - 독산성에서 바라본 동쪽 벌판, 벌판 너머 제방 뒤로 가야산에서 발원, 고령(대가야)을 거쳐온 회천이 독산성 부근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합천 독산성 위치도

 

아래 글은 2010년 11월 6일 독산성 주변을 둘러보고 쓴 글이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독산성 답사는 무려 12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 지나보니 엊그제 같은데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

 

신라 최초로 여왕이 등극하다

 

신라의 진평왕이 남자로서는 마지막 성골이었다. 632년 진평왕이 죽고 더 이상 왕실에 남자 성골이 없자, 하는 수 없이 진평왕의 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다. 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공주가 바로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왕이다. 여왕의 등장은 내외의 불안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당 태종은 자신에게 신라를 맡기는 것이 어떠냐며 노골적으로 선덕왕을 조롱할 정도였다.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 일어난 것도 여왕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 조정은 선덕왕이 현명한 군주라는 것을 내외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에피소드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곳곳에 나온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덕만이 공주이던 시절에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아 맞춘 얘기다.

 

전 임금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의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는데,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을 심으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는데,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원년(632년) 조>

 

<삼국유사>에도 선덕왕의 모란꽃 일화가 나온다. 모란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국화였는데, 예로부터 꽃 중의 제일이라고 하여 ‘꽃의 왕’ 또는 ‘꽃의 신’이라고 하였으며, 또 부귀를 뜻하는 식물로서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하였다. 당나라 이후 중국 사람들에게 특히 애호되어 그림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모란에 향기가 없다는 것은 낭설이다. 이처럼 최초의 여왕인 선덕왕은 신라 조정에 의해 군주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야만 했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이번에는 전투와 관련이 있다. 전투에서도 선덕왕의 승리를 애써 견강부회할 필요가 있었다.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은 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필탄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의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 울소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활로 쏘아 죽이고, 이후 병사 1천 2백 명이 오자 역시 쳐서 모두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삼국유사 기이 선덕왕 지기삼사 조>

 

<삼국유사>에는 선덕왕이 지기삼사(知幾三事) 즉 '세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는 내용으로 미화되어 나온다. 그 세가지 일이란 1)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 2) 적의 침투를 미리 알고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격퇴시킨 것, 3) 미리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을 말한다. 그 중의 두번째 에피소드가 여근곡 전투다.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에게 어떻게 꽃과 개구리 두 가지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나의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말한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남근은 여자의 음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었음을 알았다.” 하였다. 이에 군신들이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모두 감복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선덕왕 지기삼사 조>

 

그럴 싸한 엑스(X)담이다. 여근곡은 Y자형 계곡을 말한다. 계곡이 합쳐지는 지점에 연못이 있으면 딱이다. 여근곡은 고대인들의 X담으로 학자나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일연 스님은 선덕왕의 '지기삼사'를 기술하며 얼굴 꽤나 붉혔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여근곡의 위치는 누대로 학자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여근곡의 위치를 부산(富山) 아래로 보았다. 부산(富山)은 지금의 경주시 건천읍 서쪽에 위치한 높이 729.5m의 산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자들도 경주에 오면 점잖치 못하게 여근곡을 보러 부산 근처를 기웃거렸다고 한다. 헐!

 

옥문곡 전투란?

 

<삼국유사>의 여근곡은 <삼국사기>에서는 옥문곡으로 기술하고 있다.

 

선덕왕 5년(636년)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의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두꺼비는 성난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서남쪽 변경에 이름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니 혹시 이웃 나라의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라고 하였다. 이에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의 장군 우소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는데, 알천이 갑자기 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상 옥문(玉門)과 여근(女根)은 같은 뜻이다. 여근보다는 옥문이 유학자들에게는 더욱 고상하게 들렸으리라.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옥문곡이 서남쪽 변경이라고 하여 경주 교외가 아닌 것으로 말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옥문곡전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다만 장군 우소는 화살이 떨어져 신라군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당시 나제의 전황을 보면, 신라가 수세적인 입장에 있다고는 하나 도성인 경주 교외까지 백제군이 기습을 감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버티고 있는 마당에 낙동강을 도하하여 경주로 직공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부산 아래 여근곡과 남산 고개 바위 운운하는 것은 일연 선사의 완전한 오류로 보인다.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점필재 김종직도 이를 지적하였다. 그는 '옥문곡을 지나다(過玉門谷)'라는 시에서 '얕은 골에 어찌 적병을 숨길 수 있으랴(淺谷何能伏敵兵)'며 옥문곡이 부산 아래 여근곡이라는 것에 의문을 표한다.

그렇다면 옥문곡 전투가 벌어진 현장은 어디인가? 옥문곡전투의 현장인 옥문곡을 알려면 당시 나제간의 전쟁이 어느 방면에서 벌어진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옥문곡 전투의 배경

 

옥문곡전투가 벌어진 636년은 신라 선덕왕 5년이며 백제 무왕 37년이다. 무왕은 554년의 관산성 전쟁의 대패배를 완전히 극복하고 오히려 신라의 변경을 넘어 동진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동진의 루트는 관산성(충북 옥천) 방면이 아니라 대야성(경남 합천) 방면이었다.

백제 무왕의 동진 루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조>에 잘 나와 있다.

 

- 무왕 17년(616년) 겨울 10월 달솔 백기에게 명령하여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 무왕 25년(624년) 겨울 10월에 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6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무왕 28년(627년) 가을 7월 왕이 장군 사걸에게 명하여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웅진에 주둔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이를 듣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급한 사태를 말하였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중지하였다.

- 무왕 33년(632년) 2월에 마천성을 고쳐 쌓았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였다. 왕이 생초원에서 사냥하였다.

- 무왕 34년(633년)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다.

 

옥문곡전투 이전까지 백제 무왕은 이름 그대로 '무(武)의 왕(王)'이다. 무왕의 동진루트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모산성(남원 아영면 아막산성으로 아영분지 서쪽의 백두대간 상에 위치함)-속함성(지금의 함양)-마천성(지금의 함양 마천면 일대)에 이르는 루트이다. 이는 동남방루트이다. 다른 하나는 동북방루트로 지금의 청주나 청원 방면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정면인 동방루트를 치지 않고 우회루트를 선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신라가 관산성-금돌성(지금의 경북 상주 모동면 백화산)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왕은 관산성 동남방이나 동북방 루트를 통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한 것이다. 만약 관산성 동남방이나 동북방이 뚫린다면 신라의 관산성과 금돌성은 스스로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북방 루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충북 옥천의 삼년산성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왕이 최대의 전과를 올린 것은 동남방 루트로 이것이 바로 모산성과 속함성 함락이다.

동남방 루트는 속함성(함양)-거열성(거창)-대야성(합천)으로 이어지고 만약 대야성을 함락시키면 바로 신라의 코 앞인 낙동강 서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군 앞에는 대야성이 버티고 있었다. 대야성을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대야성은 난공불락이었던 것이다.

대야성이 함락된 건 무왕 대가 아닌 의자왕 2년(642) 8월이었다. 장군 윤충이 남부여군 1만을 이끌고 대야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무왕 때는 아직 남부여와 신라는 속함성과 거열성을 사이에 두고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의 치열한 전장은 지금의 함양과 거창 경계인 거창군 마리면 일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무왕은 전선이 고착되자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진격루트가 필요했다.

 

독산성은 어디인가?

 

무왕 34년(633년)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633년 8월 남부여는 신라의 서곡성을 13일 만에 함락시킨다. 서곡성 전투가 벌어진지 3년 후 옥문곡 전투가 벌어진다. 그렇다면 서곡성은 어디일까?

신라 감문군(경북 김천)의 속현에 무산현이 있다. 지금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이다. 백두대간 이서의 무풍 일대가 신라 땅인 셈이다. 지금의 무풍면 소재지 백산서원 부근에 오래된 고성이 하나 있다. 추정컨대 신라 무산현의 치소였을 것이다. 한편 남부여 진잉을군(충남 금산)의 속현에는 적천현이 있다. 지금의 무주읍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무주군 일대는 고대 남부여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주라는 지명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무산현은 고려 때에 와서 지금의 이름인 무풍현으로 바뀐다. 그리고 적천현은 고려 때 주계현으로 불렸다. 무풍의 '무'자와 주계의 '주'자를 합해 '무주'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남부여와 신라의 통합처럼 무풍과 주계의 통합도 제법 시간이 걸린 것이다.

무주는 나제통문으로 유명한 곳이다. 나제통문의 연원은 짧다. 이름은 거창하게 나제통문이지만  고대의 교통로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제통문이 상징하듯 그 부근이 고대 남부여와 신라간의 국경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본지로 돌아오면 무왕은 새로운 진격루트로 신라의 무산현을 선택한 것 같다. 633년 8월 13일 동안 벌어진 서곡성 전투는 무왕이 무산현의 치소를 빼앗고 신라군을 완전히 백두대간 이동으로 축출하기 위한 전투로 추정된다. 이후 남부여군은 백두대간을 넘어 낙동강 지류인 대가천을 따라 남하하여 3년 후 유명한 옥문곡 전투를 벌였을 것으로 보인다.

옥문곡 전투라고 하지만 실제는 남부여가 신라의 독산성을 차지하기 위한 기습전으로 볼 수 있다.

 

선덕왕 5년(636년)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의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두꺼비는 성난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서남쪽 변경에 이름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니 혹시 이웃 나라의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라고 하였다. 이에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의 장군 우소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는데, 알천이 갑자기 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옥문곡은 독산성 부근의 Y자 계곡일 것이다.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기습하려고 군사 5백명을 이끌고 옥문곡에 숨어있다가 알천과 필탄의 군대에게 발각되어 사살된 전투가 바로 옥문곡 전투라고 볼 수 있다.

대가천이 소가천과 합류하는 고령읍 일대에서는 회천이 되고 회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북방 구릉에 오래된 고성이 하나 있다. 이곳이 바로 합천 독산성이다. 독산성은 대야성의 훨씬 동쪽이다. 즉 압량주와 대야성의 중간 루트로 낙동강의 길목을 지키는 중요한 성이었다. 무왕이 독산성을 노린 것은 바로 압량주와 대야성의 루트를 끊어내고 대야성을 배후에서 고사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처럼 독산성은 경주~압량주~대야성에 이르는 신라의 동방루트를 좌지우지하는 낙동강 관문으로 자칫 이곳을 상실한다면 낙동강 이서 지역은 완전히 남부여 영역이 될 정도로 중요한 성으로 볼 수 있다.

옥문곡을 둘러싼 독산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 어디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합천 독산성 부근을 옥문곡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지금까지 없었다. 필자의 추론이 독산성과 옥문곡을 비정하는데 있어 일말의 단초라도 제공할 수 있다면 족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