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옥천 굴산성과 저점산성 : 신라가 남부여의 인후를 겨누다 청성면 면소재지인 산계리는 남으로 보청천을 향하여 튀어나온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신라의 굴산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마립간 8년 정월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아 일선지방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하였다.'고 한다. 소지마립간 8년은 AD 486년이다. 즉 신라는 5C 말엽에 이르러 보은지역에서 백제군을 몰아내고,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다시 쌓았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의 금강 연안까지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후일 관산성 전쟁에서 '성왕의 비극'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남부여 군주 성왕을 기습하여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한 군대가 바로 삼년산군 출신 도도가 이끌던 신라군이었던 것이다. 백제 입장에서는 이곳 보은 지역을 유린당함으로써 전선이 금강까지 밀렸으.. 더보기 옥천 굴산성 : 신라 굴현의 치소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자비마립간 13년(470) 삼년산성을 쌓았다." "자비마립간 14년(471) 봄 2월에 모로성을 쌓았다." "소지마립간 8년(486) 봄 정월에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았다. 일선계(一善界) 장정[정부(丁夫)] 3천 명을 징발해서 삼년(三年)과 굴산(屈山) 두 성을 고쳐 쌓았다." 신라군은 상주에서 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상 중에서도 해발 고도가 제일 낮은 지역인 중화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토대로 삼년산성을 축성한다. 470년 삼년산성의 축조는 신라가 남부여와 고구려의 분쟁지역 중심으로 들어오는 일대 반도 각축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신라는 남부여와는 금강 연안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는 금북정맥을 넘어 금강의 .. 더보기 익산 용화(성태봉)산성 더보기 익산 미륵사지 석탑 더보기 익산 미륵산성 : 남부여 완성을 위한 전략 거점 익산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는 고대에는 지모밀지로 불렸다. 무왕은 소부리(사비)에서 이곳 지모밀지로 천도를 꿈꾸었다. 미륵사와 미륵산성, 왕궁을 축조하며 성왕이 못다이룬 남부여 완성을 위하여 매진했다. 미륵산성은 그 꿈의 중심에 있었다. 더보기 공주 정지산 유적 : 나제회맹 유적지를 찾아서(3)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 (출저 : 인터넷 브리태니커) 665년에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熊津都督) 부여융(扶餘隆)이 취리산에서 국경문제에 대해 서맹(誓盟)한 것.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에서는 백제의 옛 땅뿐만 아니라 신라까지도 직접 지배하기 위해 663년에 문무왕을 일방적으로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에 임명하는 등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본국에 파견하여 유민을 안집(安集)시키고자, 그를 웅진도독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삼았다. 664년(문무왕 4)에 유인원(劉仁願)의 주재로 웅진에서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천존(天存)과 함께 화친의 서맹을 했다. 그후 다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당은 665년 8월에 문무왕과 부여융에게 웅진 취리산에서 서맹하게 하여 .. 더보기 공주 연미산 : 나제회맹 유적지를 찾아서(2) 더보기 공주 취리산 : 나제회맹 유적지를 찾아서(1)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 - 개설 당나라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과정에서, 허수아비 정권인 백제를 내세워 신라에게 백제와 화친하도록 강요하여 이루어진 동맹이다. - 역사적 배경 7세기 초 당나라가 성립하면서 신라와 당나라는 서로 접근하였다. 고구려를 패망시키려는 당나라와 백제를 통합하려는 신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648년(진덕여왕 2)신라의 김춘추(金春秋: 뒤의 태종무열왕)가 당나라로 가서 당 태종과 외교적 담판을 맺었다. 즉, 양국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백제 전지역과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에게 할양하기로 하는 일종의 영토분할을 약정하였다. 그 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 더보기 이전 1 ··· 19 20 21 22 23 24 25 ··· 9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