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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신라 산성

화성 당항성(당성) : 신라와 당나라 손을 잡다

<2010년 1월 31일>

 

 

<삼국사기 태종무열왕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적혀 있다.

 

"태종 무열왕 7년 여름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왔다. 21일,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법민은 '우리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대장군의 도착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라도 달려 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했다. 왕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나당군의 남부여 정복 전쟁 직전, 즉 660년 6월 21일 신라의 태자 법민과 당나라 소정방이 덕물도에서 만났다. 태자 법민이 덕물도로 가기 위해 출발한 항구가 바로 당항이다. 당항성은 바로 당항을 지키는 성이다. 최초 당항성은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가 점령하여 당성군(唐城郡)이 되었다가 6세기 이후 신라의 영역이 된 후에는 신라가 당나라와 교통하는 중요 항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곳은 전략적인 중요성이 인정되어, 선덕여왕 11년(642년)에는 남부여와 고구려(북부여)가 함께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전하기도 했다.

 

당항성은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는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성의 내벽은 흙으로 쌓고, 외벽은 돌로 쌓았다.

 

당항성은 서해안고속도로 비봉나들목에서 나와 313번 지방도를 타고 제부도 방향으로 가다가 송산면 육일리 육일로타리에서 구 도로로 나와 굴고개를 넘어면 신흥사 이정표가 나온다. 신흥사 뒷산이 바로 당항성이다.

 

 

 신흥사 연혁 및 유래 안내판을 보면, 고구려 영류왕(618~641년) 대에 당나라에서 팔학사를 당항성으로 보냈는데, 그 중 홍학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당나라 문물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후대의 개작이라고 <화성군사(1990년)>에서는 단언하는 바, 고구려 영양왕 22년(639년) 무렵 지금의 화성 일대는 신라의 영토였을 거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기록물은 추정에 근거한 역사적인 정황보다는 신빙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저자들이 단순히 설화에 근거해 당항성의 유래를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근거가 되는 사료가 있었기에 채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약사여래석불 안내판

 

 

 약사여래석불, 얼굴 없이 오랜 세월 옛 절터에 파묻혀 있던 것을 복구한 것이다. 

 

 

 약사여래석불 뒷길로 오르면 고개 하나가 나온다.

 

 

 우측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기와 조각이 발길에 채이고.

 

 

 드디어 당항성 성곽이 나온다.

 

 

서벽

 

 

장대지(망해루) 가는 길

 

 

 저 끝이 장대지다.

 

 

장대지에서 멀리 좌우로 보이는 산이  앞이 화성 송산면 새로 간척한 지화리 들판이다. 옛날에는 저 앞까지 조수가 들어왔다. 좌로 보이는 산이 남경두토성(화량성)이 있는 와룡산(80.7m)이며, 우측 산이 승학산(111.0m)이다.

 

 

 

 

 

 동문터

 

 

 북벽

 

 

 서문터

 

서문터를 되돌아 나가 원래 올랐던 신흥사 뒷 고개길로 나와 남서쪽 봉수대까지 갔다.

 

 

 봉수대 직전의 헬기장

 

 

봉수산 봉수대

 

 

 삼각점

 

 

 봉수대에서 바라본 대부도 방향

 

당항성에서 내려와 남경두토성(화량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부도 가는 4차선을 타고 가다가 화성 서신면 장외리 노가리 마을에서 우측으로 나와 송산면 지화리 가는 다리를 건넜다.

 

 

 지화리 가는 다리

 

 

 화량진 앞 하천으로 고대에는 이곳 넘어까지 조수가 들어왔다.

 

 

 와룡산. 이 산에 남경두토성 즉 화량진성이 있다. <화성군사>를 보면, 화량진성은 와룡산 남쪽 기슭을 에워 싸고 있다. 남쪽 부근은 토축성이고 북쪽 부근은 약 10층 이상으로 쌓은 석축성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성밖으로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 다시 도랑을 파고 그 도랑 밖에 다시 얕은 토축 성벽을 쌓아 이중 성벽을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추정컨대 고려시대 이후 왜의 침입을 막을 요량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당성의 역할을 화량진성이 이어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화량진성을 보고 화성 마도면 백곡리에 있는 백곡리 토성을 찾아 보기로 했다. 육일로타리에서 우회전하면 백곡리 향기실 마을 삼거리가 나오는데, 향기실 마을 뒷산이 바로 백곡리토성이다. 당항성과 지근 거리에 있어 당항성을 보호하는 부수적인 참호성 내지 보루성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김유신 장군의 사당이 있는 화성 팔탄면 창곡리 금산사에 들렀다. 팔탄면 소재지에서 구 39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청요사거리 가기 전 금산사 이정표가 나온다. 김유신 장군의 사당인 금산사의 연혁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당항성을 개척하여 남부여(백제)와 북부여(고구려)의 허리를 끊고 삼한 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태종 무열왕(김춘추)과 김유신의 업적이 후대에 구전으로 전하여 기념물로 남은 것이다.

 

<하늘도깨비의 사론>

 

지금 당항성 개척으로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신라는 이민족과 야합하여 외세를 등에 업고 삼한 통일을 이룬 것은 비자주적이며,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비판 내지 비난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그리고 아주 자주적인 남부여와 북부여는 그 시간 삼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역사는 비정하게도 승자의 역사이긴 해도 우리 스스로 역사의 결과인 신라의 삼한 통일까지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역사 공동체가 결정되어 있지도 않았고, 신라의 삼한통일 이후 고려와 조선의 중앙집권적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 같은 우리 민족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신라 또한 당나라와 제휴한 결과 반도의 대부분이 당나라의 도독부로 전락하는 현실을 묵과하지 않았으며, 당과의 대규모 전투 결과 반도에서 승리한 것이다. 결국 신라의 삼한 통일은 자기 투쟁의 산물이며, 우리 역사 공동체가 형성되기 전에 이룩한 삼한 통일을 가지고 우리 역사 공동체인 민족의 입장에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역사는 북부여나 남부여, 신라 내지 가야의 관점이 있었을 뿐이다. 고구려(북부여)의 신하국에서 출발한 신라는 스스로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반도의 정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천년 왕조를 이어간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나라다. 반도에서 패퇴하여 열도로 이주한 가야와 남부여인들은 <일본서기>를 통하여 신라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갔다.

열도인들은 후대에 반도를 점령하고 <식민사관>을 유포하며 신라를 맹비난하였다. 그것은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만세일계라는 천황의 뿌리가 가야 내지 남부여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신라에게 패퇴하여 열도로 이주한 가야인들이나 남부여인들이 일본의 정체성을 이룩하였고 이에 근거한 일본 역사 공동체의 관점에서 신라를 기초로하여 이룩한 우리역사공동체의 근간을 비판하거나 비난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의 관점이다. <식민사관>은 고려나 조선까지도 비판을 서섬치 않는다. 즉 반도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이다. 한때는 자기 역사 공동체가 반도에서 유력한 국가(가야와 남부여, 특히 가야는 임나일본설의 근간이다.)를 건설하여 당당히 경쟁하였기 때문이다.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반도에 자기 정체성을 내렸을 것이란 역사적 파토스가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역사 공동체에서 부여적 관점이란 두 가지이다. 북부여 관점은 북한의 관점이고 가야 내지 남부여 관점이란 일본의 관점이다. 묘하게도 두 관점 다 신라의 비판과 비난에 촛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하늘도깨비의 생각은 신라의 삼한통일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관점의 근저에 착목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 공동체의 형성 과정이나 결과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보다는 자기 합리화는 아니지만 긍정적인 마음으로 역사의 결과물을 해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의 <삼국 대륙설>이 패권주의적 경향으로 흐르지 않았으면 한다. 하늘 도깨비는 산성 답사를 통하여 남한에만 2천여개의 산성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북한과 만주에 산재해 있는 산성의 수까지 합한다면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많은 산성의 존재는 사국(가야 포함)이 결과적으로 반도에서 무수히 다투었다는 증거이며, 설혹 삼국의 기원이 대륙에 있었다 하더라도 삼국 최종의 대회전의 지역적 배경은 반도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 고대 중원의 문명이 동이문화라는 사실에 대한 자기 방어적인 이론이다. <동북공정>은 결코 공세적인 이론이 아니다. 일본의 <식민사관>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은 역사적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다만 제 민족의 역사적 파토스의 방향을 제고하고 정립하는 과정이다.

하늘도깨비의 산성 답사는 <식민사관>이나 <동북공정>같은 허구의식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세워보자는 취지에서 전국을 누비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륙, 반도, 열도의 고대 사서에 등장하는 장소적 배경을 찾아 전국의 산성을 살아있는 기념물로 만들고 싶은 의욕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자부하여도 좋다고 생각한다. 멀리 중앙아시에서 출발한 흉노 일파와 양자강에서 출발한 부여 일파가 만주에서 만나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반도로 또 다시 일부는 열도로 뻗어 나간 강한 생존력으로 그렇지만 눈물겹도록 처절한 우리 선조들의 자기 투쟁의 역사는 현재 우리의 프라이드라고 생각한다.

고대 역사의 깊이를 더하면 더할수록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처지의 민족들을, 이웃들을 어떻게 안아야 할지 자명하다. 우리는 종족 패권주의 때문에 대륙에서 반도로 반도에서 열도로 유맹을 거듭했다. 오늘날 일본을 보면 가야와 남부여 유민의 역사적 정체성 회복에 몸부림치고 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해야만 가야와 남부여 유민의 한을 풀 수 있는 것이다. 하늘도깨비의 눈에는 일본이 너무도 애닯아 보인다. <동북공정>을 통해 고대 동이와 고대 하화족을 화확적으로 결합시켜야만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중국인들의 현 주소도 애처럽기만 하다. 우리 민족이 거친 역사적 여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위대해져 가는 것 같다.

 

 

 

 금산사 전경

 

 

 

 

 

 

 신라태대각간 김공유신장군 지묘정비

 

 

 위국문

 

 

 금산사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