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추론/탄현은 어디인가?

탄현에 대한 고찰 : 남부여 최후의 대회전에 대한 보고서

1. 탄현에 대한 사서의 기록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군대는 수로,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는 육로를 통해 사비성으로 곧장 진격하였다. 남부여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常永)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唐軍)은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나라 군사들이 진격하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한다]과 탄현(炭縣)[혹은 침현(沈縣)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해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의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오게 하여 소로(小路)를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왕은 또한 당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4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충은 4년전에 이미 좌평 흥수와 똑 같은 견해를 의자왕에게 표시한 바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조> 기사에 실려있다.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좌평 성충과 좌평 흥수는 육로 방어에는 탄현(침현)을, 수군 방어에는 기벌포(백강)의 언덕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남부여 군주 의자왕은 시기를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인지 아니면 군사적 관점이 성충과 흥수와는 다른 것인지 모르겟지만, 신라군에게는 탄현을, 당군에게는 백강구를 허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의자왕은 달솔 상영의 말대로 신라군을 선택하고 군사 한 명이 창 하나로 만명을 대적할 수 있는 험준한 곳인 탄현이 아닌 황산벌의 평지에다가 남부여 운명을 베팅한다.

 

2. 탄현 추정의 결정적 단서

 

 1) 탄현은 황산벌과 가까워야 한다

 

탄현의 위치는 황산벌과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 하늘도깨비의 추론이다. 이는 의자왕을 비롯한 남부여 군사 수뇌부가 탄현 방어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는 편견에 대한 도전이다. 남부여 군주 의자는 역사의 패배자이기에 우매하고 방탕하고 사치스런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 정복 군주로서 위용은 신라군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즉 의자왕 대에 이르러 신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의식이 팽배하였다. 이러한 위기를 고구려나 당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타개하려고 하였다. 결국 고구려를 끌어 들이는데는 실패하였지만, 당나라 군대의 참전이라는 성과를 끌어낸다. 만약 의자왕이 정복 군주가 아니고 보통의 군주였다면, 신라가 집요하게 남부여 멸망을 기도하였을까? 답은 의자가 대단한 정복 군주이기에 신라군은 국운을 걸고 남부여를 공격한 것이다. 그것이 성공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의자는 강력한 정복욕 때문에 비운의 군주로 전락한 셈이다.

 

의자를 비롯한 남부여 군의 수뇌부들은 의도적으로 탄현을 버리고 황산벌을 선택하였다. 즉 탄현을 넘어오는 신라군을 기다린 것이다. 이는 곧 남부여 군이 기병 우위의 군대였다는 사실을 방증한 것이다. 일당 십의 기병은 그 열배 정도의 군사는 거뜬히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황산벌에 집결한 남부여 군은 군주 친위 부대로 기병 우위의 전략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전쟁 양상은 <삼국사기 계백열전>에서 그 편린을 찾을 수 있다.

 

"황산의 벌판에 이르러 3개의 군영(軍營)을 설치하였다. 신라 군대를 만나 전투를 시작하려고 하자, [계백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며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吳)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고 하였다. 드디어 격렬히 싸우니, [백제의 군사로서] 일당천(一當千)이 아닌 자가 없었다. 신라군은 이에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진격하고 퇴각하며 싸운 것이 4차례에 이르렀지만, [계백은 결국] 힘이 다하여 죽었다."

 

'일당천'의 군사라는 기사와 4차례의 공격을 막아낸 사실을 보면,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기병 위주의 엘리트 군대였음에 틀림없다. 계백 5천 결사대의 부대 특성을 이해한다면, 기병들이 탄현 같이 좁은 곳에서 보병과 어울려 싸운다는 것은 전술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신라군은 사비도성에 이르는 간선도로 좌우의 산성에서 농성전을 전개하고 있는 남부여군의 보병을 상대하지 않고 황산벌로 직행하였다. 보병이 기동하여 탄현으로 집결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신라군을 추격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사비도성이 포위된채 농성하기도 어렵다. 결국 계백의 도성 방위군을 차출하여 황산벌로 급파하여 기병전을 전개하는 것 말고 달리 남부여군 수뇌부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최초부터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행히 신라군 보다는 남부여군이 기병전에서는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평야 지대가 짧은 신라는 보병이 발달한 반면, 남부여군은 평야지대가 넓어 기병이 발달하였을 것이다. 황산벌에서 시작되는 평야지대를 반나절 정도 걸어야 사비도성에 이를 수 있기에 만약 이 정도 거리에서 기병을 기동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남부여 수뇌부는 확신하였다. 그런데 김유신의 신라군 또한 만만치 않은 기병들이 존재하였다. 화랑도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삼국사기 관창열전>에서 그 유명한 화랑 관창의 기록을 살펴보자.

 

"관창(官昌)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나이 16세 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능숙하였다. 거동과 외양이 모두 우아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화랑(花郞)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 경신(660년)에 왕이 군대를 내어 당나라 장군과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관창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였다. 아버지 품일이 이르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다. 어찌 용기가 없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관창이 '예.' 하고는, 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빗겨 들고 곧바로 적진을 공격하여 말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상대편의 수가 많고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 살아서 백제의 원수(元帥) 계백(階伯)의 앞에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게 하니, 그가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이에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다. 소년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겠는가!' 하고는, 살려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고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 마신 후에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웠다. 계백이 사로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고 말하였다. 전군이 이를 보고 슬퍼하고 한탄하며 뜻을 세웠다. 북을 요란하게 치며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신라군에 관창 같은 16세의 어린 화랑들이 포진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신라군 총사령관 김유신이 어린 화랑들을 이용하여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하였다고 불 수도 있지만, 어리지만 말을 잘 다루는 화랑들까지 차출하여 기병부대를 예하에 편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남부여군이 기병전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황산벌을 최후의 대회전의 전장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보병들이 탄현 협곡에서 빠져 나오기 전에 섬멸하는 것이 기본이다. 계백은 역시 기본에 충실하였다. 이러한 남부여 군 수뇌부의 전략은 우리가 주목한 적은 없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기사에 그대로 실려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의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오게 하여 소로(小路)를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왕은 또한 당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4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에 오르게 하고 소로를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고는 공격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의자왕은 신라군이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 기동을 감행한 것이다.

 

남부여군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이한 이유가 이러하다면, 탄현은 황산벌로 곧장 들어오는 고개이어야 한다. 그리고 의자왕을 위시한 남부여 수뇌부는 탄현을 넘어 들어오는 신라군을 협곡에서 대회전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탄현과 황산벌은 하나의 세트와 같다. 따라서 탄현은 황산벌에서 지근거리여야 한다.

 

 2) 탄현은 대전 동쪽의 식장지맥 상이 아닌 대전 서쪽의 금남정맥 상의 고개이어야 한다.

 

 '탄현은 황산벌과 가까워야 한다'의 명제가 맞다면 탄현은 대전의 동쪽 산줄기인 식장지맥 상이 아니라 황산벌로 추정되는 남부여 황등야산군(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일대)으로 가는 대전 서쪽의 금남정맥 상의 고개이어야 한다. 따라서 탄현과 황산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남부여의 군사, 행정체계를 먼저 논구하여하여야 한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따르면, 황등야산군에는 속현이 둘인바, 진현현과 진동현이다. 먼저 진현현의 치소는 지금의 대전시 유성구 교촌동 진잠향교 주변 일대이다. 남부여 대에는 황등야산군에서 양정고개(금남정맥)-계룡시-유성구 세동 계곡-진치-성북동 계곡-성북동 산성을 거쳐 남부여 진현현의 치소에 이른다. 이곳에서 대전-옥천 방향으로 해서 신라로 나갈 수 있다.

 

 한편 진동현의 치소는 지금의 금산시 진산면 읍내리 일대이다. 황등야산군에서 황룡재(금남정맥)를 넘으면 논산 벌곡면 한삼천리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신라로 가는 2가지 루트가 있다.

 

 하나는 벌곡천(갑천 상류)을 따라 내려가면 대전 서구 흑석동 흑석동 산성이 나오고 호남선 가수원역 가기 전에 원정림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원안영 마을로 빠지면 사정동 산성이 나온다. 사정동 산성은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백제 동성왕 20년(498년) 7월 사정성을 쌓아 한솔 비타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다는 기사가 바로 그 대목이다. 이로 추정컨대 백제 시절 황등야산군에서 이곳 사정성에 이르는 지금의 남대전 루트를 굉장히 중시하였던 것 같다. 사정성-비파치 산성-계현산성-옥천 성치산성을 거치며 옥천 관산성 일대와 대치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논산 벌곡면 한삼천리에서 벌곡천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남부여 진동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진산면 읍내리 진산성이 나온다. 진산에서는 복수-추부를 거쳐 옥천에 이르거나 진산성-복수 곡남리산성-만낙리산성-소리니재(식장지맥)를 거쳐 금산-영동 양산까지 진출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부여 황등야산군은 사비성 남부를 통해 신라로 가는 모든 루트의 출발지인 셈이다. 그 역 또한 성립한다. 즉 신라가 사비 도성 남쪽으로 침공하는 모든 루트가 황등야산군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남부여의 군사, 행정체계는 신라군이 황등야산군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황등야산군의 두 속현인 진현현과 진동현에서 미리 적들을 방어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김유신의 신라군은 바둑의 격언처럼 상대가 예상하는 수를 두지 말라는 격언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하나가 신라군이 두 속현에서 황등야산군으로 들어오는 주요 루트 좌우에 포진한 산성들을 공격하지 않고 바로 황산벌로 직행하였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가 금남정맥을 넘을 때 군대를 나누어 3고개를 넘었다는 이른바 '3도'가 그것이다. 전자는 모든 군사력을 동원한 신라군으로서는 개별 산성 격파 보다는 거시적 차원에서 사비 도성 함락 작전이 최종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와 협공하여 사비 도성을 공략하려면 약속된 기일 내에 사비성까지 진격해야 하는 물리적 한계 때문에 산성 우회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후자는 협곡의 평지에서 남부여 기병들과 맞부딪히는 것을 경계하엿기 때문이다. 이는 남부여 군 수뇌부가 선택한 전술이었다. 김유신의 신라군은 남부여의 바람대로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금남정맥의 산줄기에 이르러서는 군대를 3분하여 3고개를 넘은 것이다. 김유신은 황산벌 같은 협곡의 들판 보다 더 넓은 곳이 필요하였다. 황산벌은 넓기는 하엿지만 본질적으로 협곡이라 필요시 군대를 좌우로 퇴각하기가 힘들었다. 경사도가 가파르기도 하엿지만 좌우의 산으로 퇴각하엿다가는 협곡을 좌우로 둘러싼 남부여 산성의 보병들에게 개죽음 당할 위험도 있었다. 

 

결국 계백은 김유신의 '3도' 때문에 '3영'을 설치하고 최후의 대회전을 취뤄야했다. 이는 남부여 군대의 장점을 하나도 못살린 채 끌려가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이즈음 이르면 기실 '탄현의 위치' 문제도 새삼 황산벌 대회전의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게 된다.

 

굳이 탄현의 위치를 비정하라면, 필자는 진현현에서 황등야산군으로 들어오는 고개인 계룡시 양정고개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사료적 근거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연산현 산천조>에는 '황산은 일명 천호산이다. 현의 동쪽 5리 정도에 있다. 신라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 군대가 백제를 침공한 곳이며, 견훤이 고려 태조를 따라 그의 아들 신검을 토벌한 곳이다.'라고 하여 지금의 천호산이 황산임을 밝혀두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한 곳이라 그 산을 '천호산(하늘이 보호한 산)'이라 하였고, 산 아래 절을 지어 이름을 '개태사(태평한 세상을 연 절)'라 하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고려와 후백제의 삼한을 건 최후의 전장이 이곳이라면, 군사적 입지가 비슷한 남부여와 신라간의 최후의 대회전도 이곳에서 벌어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지금의 천호산 아래 개태사 부근이 황산벌이라면 금남정맥상에 있는 지금의 계룡시 양정고개가 탄현일 것으로 추정된다. 금남정맥의 지맥인 대전 동방을 휘감아 분수를 이루는 식장지맥은 남부여의 전방격으로 이곳의 주요 고개(계현, 자모실고개, 마달령) 중 하나를 탄현으로 추정하는 것은 신라 침공의 시간적 간격이 있어 설명이 부자연스럽다.

 

3. 보론 : 신라 김유신 군의 출발지와 3도의 문제

 

 1) 신라군의 출발지

 

 신라군의 출발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잇다. 금돌성(경북 상주)과 삼년산성(충북 보은)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 기사를 보면,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이 경주를 출발한 것은 5월 26일이었다. 6월 18에는 남천정에 도착하엿고, 6월 21일에는 태자 법민이 덕물도에 들어가 소정방과 만나 사비도성 함락 작전 계획을 짠다. 그런데 5만의 군대를 이끌고 경주를 출발하여 남천정까지 간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20일 이상 걸리는 대규모의 군사적 기동은 남부여 세작들에게 노출될 것이 뻔하다. 그리고 당나라 소정방 군대의 도착 확인과 작전 계획 수립도 필요하다. 따라서 신라군은 5만이 일시에 기동한 것이 아니라 신라 최전방의 배후성 정도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과연 남부여 사비성으로 최단 시간 진격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황산벌 대회전 직전 나제간의 전투 장소가 어디엿는가가 중요하다.

 

 2) 김유신 군대의 3도는 어디인가?

 

김유신이 군대를 3분한 까닭은 자명하다. 5만의 전군이 탄현만을 넘어 황산 협곡에서 일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따라서 탄현을 포함한 금남정맥의 세 고개를 택해 진격하면 남부여군도 3분될 것이고 이는 곧 남부여군 수뇌부가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군사를 배치한 황산 협곡 일대 보다 전선이 광역화되므로 신라군이 수적 우위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유신이 택한 3도의 금남정맥상의 고개는 어디일까? 1) 필자가 탄현으로 추정하는 계룡시 양정고개와 2) 진동현(지금의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 일대)에서 황등야산군(지금의 연산면 일대)으로 들어올 수 있는 황룡재, 덕목재, 곰치재, 덕곡재 중 2곳일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