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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탄현은 어디인가?

신라군의 황산벌 진격로인 3도를 따라서(1) : 탄현(양정고개)로

<2010년 7월 18일>

 

오늘은 신라군의 황산벌 진격로를 따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출발지를 어디로 해야 할까? 출발지가 보은의 삼년산성이라면 아무래도 신라군은 청성면의 저점산성을 거쳐 옥천 관산성~마달령(내지 자모실고개)~대전 동구 삼정동산성~대전 서구 가수원~흑석동산성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여기서 김유신은 5만의 군대를 3분하여 3도로 나아갔을 것이다. 필자는 대전 동부의 금남지맥상의 주요 3고개가 3도의 방향이었다고 추정한다. 3고개 중 하나는 계룡시 양정고개로서 지금도 1번(남북국도)과 4번 국도(동서국도)가 합류하여 지나가는 간선도로이다. 다른 하나는 황령재로서 논산 벌곡면 소재지인 한삼천리에서 황산벌로 알려진 연산면 연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마지막 하나는 논산 벌곡면 덕목리에서 덕목재를 넘어 남부여의 산직리산성과 웅치산성이 지키고 있는 산직리 계곡을 지나 황산벌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덕목재가 아닌 웅치를 넘어 산직리 계곡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신라군이 덕목재를 넘든 웅치를 넘든 아니면 동시에 둘다 넘든 전술적으로는 동일한 루트라고 할 수 있다.

 

 대전 서구 정림동에서 가수원 가는 수중교 부근에서 바라본 갑천

 

 호남선 굴다리 지나서 가수원 역 앞 도로로 장태산 휴양림 방향으로 가면 흑석동 사거리가 나온다. 장태산 휴양림 방향은 좌회전하면 된다. 흑성동 산성은 직진하면 바로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 따라 호남선 굴다리를 통과하여 승상동과 석고개 마을을 지나쳐 야실마을 가기전 봉곡2교 앞에서 흑석동산성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흑석동산성. 산성 서안의 갑천이 자연해자의 역할을 한다. 신라군은 남부여 흑석동산성을 공격하지 않고 황산벌로 직행한 듯하다.

 

 벌곡천과 갑천은 야실마을 서쪽에서 합강한다. 사진은 벌곡천 상류로 벌곡면 소재지인 한삼천리를 지나 황령재를 가거나 덕목재나 웅치로 가려면 벌곡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진은 갑천 상류 가는 길로 탄현으로 추정되는 양정고개로 가려면 갑천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처럼 흑석동산성은 황산벌로 들어가는 고갯길들을 갑천과 벌곡천이 합강하는 지점에서 비호하고 있다.

 

 먼저 갑천 상류로 거슬러 양정고개 가는 루트를 먼저 따라 가본다. 고대에는 강따라 신라군이 움직였겠지만, 필자는 차로를 따라 가므로 지름길로 내닫는다. 야실마을에서 되짚어 나오다 호남선 위 다리를 지나 계룡시 방향으로 간다. 양정고개 가는 길은 지금의 호남선과 평행하게 달린다. 흑석리역~원정역~계룡역~개태사역~연산역의 호남선 루트가 바로 김유신의 3도 중 하나다. 이 루트가 황산벌로 나아가는 고대 주요 간선도로이다.

 

벌곡천에서 갑천으로 넘어가는 지름길 상의 미림이 마을 앞의 정자. 고대에도 유용한 도로였을 것이다.

 

 원정역 부근에서 바라본 위왕산. 위왕산은 갑천 상류 북안의 절벽이다.

 

 위왕산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탄현(양정고개) 넘어려는 신라군에게 다소 위협적인 산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남부여 정복 군주인 의자왕의 기세와 풍모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겁많은 신라 군사들에겐 심장이 콩닥콩닥 거렸을 법하다.

 

 위왕산과 갑천

 

원정교 위에서 바라 본 위왕산(257m)

 

위왕산 건너편 호남선 철교. 이후 4번 국도를 타고 양정고개까지 달려갔다.

 

 양정고개(논산 연산면 가는 방향)

 

 양정고개(대전 가는 방향)

 

 양정고개(논산 연산면 가는 방향)

 

양정고개. 필자는 이곳을 탄현으로 비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탄현은 성을 쌓지 않고 목책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후 4번 도로를 타고 개태사 앞까지 왔다. 좌측의 개태사와 뒤 금남정맥상의 천호산(기록에 황산으로 알려져있으며 높이는 310.6m임).

 

 개태사 입구

 

 천호산 개태사

 

 대둔산 방향의 금남정맥 줄기

 

 계룡시 방향의 개태사 계곡 들판

 

 천호산(황산)

 

 개태사 오층석탑

 

 안내문

 

 정법궁

 

 남북통일세계평화기원대도량

 

 

 

 육각 건물

 

 

 

 개태사 철확

 

 철확의 규모로 보아 옛날 개태사의 규모를 짐작케한다.

 

 

 

 

 

 

 

안내문

 

 철확 옆의 육각 건물

 

 개태사 담장과 그 뒤로 보이는 금남정맥상의 천호산.

 

 극락대보전

 

안내판

 

내용

 

 아미타삼존석불. 중앙 본존불은 태조 왕건의 형상을 닮았다고도 한다. 태조 왕건은 이곳 황산 아래 지금의 개태사 부근에서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의 군대를 물리치고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개태사를 창건하고 황산은 하늘이 보호했다는 의미에서 천호산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아마타삼존석불 중 본존불은 왕건을 모델로 하여 조성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극락세계에 거처하며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인 아미타불과 후백제를 물리치고 태평의 세상을 연 왕건을 동일시하며 아미타불의 인격체가가 바로 왕건임을 주장한 것이리라. 국가 사찰로 출발한 개태사는 거대한 철확에서 보이듯 고려초부터 그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 조정에서 개태사를 매우 중시한 때문이다.

 

 좌협시보살

 

 우협시보살

 

 

 

 

 

 본존불

 

 좌협시보살

 

 개태사를 나서며...

 

 개태사 건너편 산자락

 

 연산면 방향의 개태사 부근 벌판. 고려 왕건의 군대와 후백제 신검의 군대가 삼한 재통일을 두고 대회전을 벌인다. 삼백년 전에도 신라의 김유신 군대와 남부여(백제)의 계백 군대가 이곳에서 삼한을 두고 대회전을 벌인 바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연산방향의 금남정맥

 

 의자왕을 비롯한 남부여 군 수뇌부는 탄현(지금의 계룡시 양정고개 부근으로 추정)을 넘어 들어온 신라 5만의 군대를 이곳 천호산(황산) 아래 개태사 부근에서 기병전을 전개하여 몰살시키려고 하였다. 계곡은 불과 동서 500m도 안되는 곳이라 5만의 군대가 일시에 덤빌수도 없고 기병 간격을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공격한다면 신라군은 삼국사기의 표현대로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 신세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 군대는 이곳 탄현으로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두 길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전선의 규모를 넓혀 계백의 5천 군대를 포위 공격할 수 있었다. 계백은 험한 구릉에 3영을 구축하고 저항하였으나, 신라군의 다섯번째 공격에는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