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8일>
신라군이 금돌성에서 출발했다면, 신라 지역의 소라현(지금의 황간면)~길동군(지금의 영동읍)~조비천현(지금의 양산면)을 거쳐 남부여 진잉을군(지금의 금산읍)~진동현(지금의 금산 진산면)을 통과해 벌곡천 상류로 들어왔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신라군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군사적으로 비교적 저항이 적은 덕목재, 웅치, 물한재(덕곡리고개)를 통해 금남정맥을 넘어 황산벌로 향할 수도 있다. 물론 삼년산성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옥천 관산성을 통해 군북면과 금산 추부, 복수면로를 통해 남부여 진동현으로 들어올 수 닜는 개연성도 충분하다. 그런데 의자왕대 신라와 남부여간의 충돌을 보면, 금돌성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고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를 보더라도 신라는 남부여 최후까지 길동군(지금의 충북 영동군 일대) 지역을 석권한 점을 고려할 때, 황산벌과 제일 가까운 조비천현(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일대에서 5만의 기동이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추론이다. 신라군 입장에서는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단시간에 사비도성으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이 루트가 바로 조비천현에서 출발하는 길이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금남정맥상의 덕목재, 웅치, 물한재(덕곡리고개) 일대만 답사키로 하였다.
연산면(연산천 유역)에서 탑정호 상류인 양촌면(논산천 유역)으로 가려면 697번 지방도를 타고 구릉인 구덕재를 넘어야 한다. 호남고속도로 지선 위의 양촌육교 가기 직전에서 좌회전하면 68번 지방도를 타고 덕목재를 넘어 벌곡면으로 갈 수 있다. 사진은 양촌육교 삼거리에서 바라본 토성산(169m)으로 산정에는 신흥리산성이 있어 남부여는 덕목재나 웅치를 넘어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다.
뒷목 마을 앞에서 바라 본 덕목재
덕목재. 호남고속도로 지선과 68번 지방도가 덕목재를 넘어간다. 덕목재는 해발 고도도 낮아 남부여 당시에도 주요 간선도로였을 것이다. 이는 웅천 계곡에만 남부여 대 3개 산성이 존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덕목재 넘어 웅천 계곡 가는 길. 왼쪽이 호남고속도로 지선.
덕목리 마을. 좌측 산줄기가 금남정맥으로 깃대봉을 거쳐 북으로 함박봉(황령산성), 황령재로 가며, 남으로 산직리산성, 국사봉(333m), 토성산(신흥리산성)으로 향한다. 남부여 황등야산군의 동벽을 이루며 훌륭한 방패 역할을 하였다.
덕목재
덕목리. 좌측 봉우리가 깃대봉(394.1m)일듯.
왔던 길로 다시 나와 산직리 장골마을로 돌아왔다.
장골마을. 뒤 봉우리가 국사봉일 듯하다.
장골마을 입구에서 약간 아래로 이동하여 도로 건너편 웅치를 조망해 본다. 제일 낮은 곳이 웅치로 사료된다. 호남고속도로 지선이 보이지 않지만 좌측으로 광고판이 보여 짐작케한다. 우측 봉우리가 웅치산성으로 보인다(답사를 못해 추정할 뿐이다).
웅치
국사봉
웅치와 우측의 웅치산성
장골마을 동쪽의 산직리산성. 웅치산성과 산직리산성은 호응하며 긴밀하게 신라군을 방어할 수 있다. 실제 장골마을에서 조금더 내려가면 승적골이란 곳이 있다. '적에게 승리한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이 지명은 황산벌 전쟁 당시 남부여군이 신라군을 격퇴한 골짜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웅치산성
웅치 북쪽의 금남정맥이 덕목재로 향하고 있다.
좌측이 산직리산성. 우측이 금남정맥으로 덕목재로 향하고 있다.
금남정맥. 좌측 아래로 덕목재가 있다.
양촌육교 삼거리에서 바라본 갈마산(157m). 산정에는 갈마산성이 있어 바로 동서로 이웃한 토성산성(신흥리산성)과 호응하여 논산천 계곡을 지나려는 신라군을 방어했을 것이다. 따라서 웅치나 덕목재로 들어오는 신라군은 첫번째는 산직리산성과 웅치산성과 직면했으며, 두번째는 논산천변의 갈마산성과 신흥리산성(토성산성)을 대적해야 했을 것이다. 승적골이 산직리산성과 웅치산성 아래에 있으므로 이때의 전투는 신라군이 이미 금남정맥을 넘고 난 후에 벌어진 싸움일 것으로 판단된다. 논산천변의 갈마산성과 신흥리산성(토성산성)을 통과하면 바로 운명의 대결장인 황산벌이 나온다.
신흥리산성(토성산성)과 그 아래 웅천 표지판
한여름의 매우 늦은 오후 양촌육교 삼거리에서 697번 국도를 타고 양촌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대둔산에서 발원하는 논산천 상류를 잠시 감상하다.
인천교. 우측 4번 군도를 타고 가면 쌍계사가 나온다.
양촌면 소재지에서 4번 군도를 타고 반암리로 향한다. 도중의 반암리 요동마을 이정표.
멀리 물한재 터널이 보인다.
아래 물한재 계곡
물한재 터널 입구
물한재 계곡(반암리 계곡)을 조망해 본다. 과연 신라군이 물한재 계곡을 넘어 갔을까? 물한재 인근 바랑산(555.4m) 정상에는 달이산성이 있어 이곳 일대에서 적 준동에 대해 감시하였을 것이다. 신라군 입장에서는 군사적 저항이 거의 없는 이 물한재를 일단의 군대가 넘었을 것이 자명하다.
비록 물한재가 다른 고개들에 비해 다소 높고 험하나 신라군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저항이 거의 없는 이곳 물한재를 군사 이동에 사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2013년 9월 1일>
바랑성을 찾아 물한재 고개를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바랑성에는 산성의 흔적이 없었다. 아마도 김유신의 3도 중에서 물한재는 제외시키는 것이 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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