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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루트기행/가야 루트

대가야 동서루트(1) : 개포나루~개포동관음보살좌상~대가야고분군~월광사

<2010년 7월 17일>

 

 

 

표지사진. 개포동관음보살좌상.

 

 

필자는 대가야 동서루트의 출발지는 고령 개포, 종착지를 부안 격포라고 하였다. 이는 필자가 한국 지리학의 아버지 고산자 김정호(?~1866)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에 표기된 '가야포'라는 지명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인터넷신문인 <부안21>에 기획 연재된 <고길섶의 부안여지도 18- 부안에 가야의 흔적이 있음에랴>를 읽어 보고, 비로소 '가야포'라는 지명이 부안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가야포'는 고대 역사 스토리의 끊어진 사슬을 이을 수 있는 핵심 고리가 아닌가?

 

아무래도 대가야 동서루트의 종착지로서 격포는 거대한 바위군인 변산을 우회해서 들어가야 하는데 이는 에너지 낭비일 것 같다. 격포는 대중국 서해 연안루트로서 큰 의미를 지니지 지형학적으로 내륙 동서루트로서의 의미는 크게 반감될 수 밖에 없는 항구다.

 

그래서 필자는 변산의 남과 북 중에서 어디를 대가야 동서루트의 종착지로 비정할까 궁구하던 중 <고길섶의 부안여지도>를 읽어 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종착지로 남으로는 보안면의 원남포나 줄포면의 줄포항, 북으로는 상서면 고잔리 목포 정도가 종착지로 유력해 보였다. 그런데 <동여도>에 표시된 '가야포'의 존재는 이러한 고민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이제 목표점이 정해졌으니 대가야 동서루트 답사길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대가야 동서루트 출발지로 잡은 개포나루터에서 출발하여 월광사까지 답사해 보려 한다. 88올림픽고속도로 동고령 나들목에서 나와 성산면 소재지로 접어 들었다. 그때 의봉산성이 떠올랐다. 달구벌(대구)를 조망해 볼 심산으로 성산면 고탄리 일월정으로 차를 몰았다.

 

 

 일월정에서 바라 본 의봉산(551m)

 

 일월정 오르는 길의 해돌이와 달순이

 

일월정에 서면 대구시 달서구 일대가 조망된다. 의봉산성은 대가야 전방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어 낙동강 너머 신라군의 기동에 따라 전술을 수립할 수 있는 요지로 사료된다.

 

 의봉산과 의봉산성

 

 서남쪽의 미숭산(734.3m) 방향

 

 남쪽의 낙동강. 장마 후라 낙동강 물이 황토색이다.

 

 서북쪽의 가야산 방향

 

한컷 더!

 

 남쪽의 성산면 소재지 방향

 

 서북의 가야산 방향

 

구름에 휩싸인 의봉산 산정

 

의봉산 일월정에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개포나루터로 직행하였다.

 

 개포나루터에서 바라 본 낙동강과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석문산성. 석문성은 해발 280m 가량인 석문산과 진등산의 산정을 테처럼 감아 동쪽 절골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석문성의 형태가 보은의 삼년산성과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신라의 낙동강 서안 전초기지(거점성)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가야 도진리산성과 대척을 이루고 있으며, 대가야의 관문 포구인 개포를 상시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추정컨대 대가야 도진리산성과 신라 석문성이 대척을 이루었다면, 개포는 폐쇄되었을 공산이 크므로 대가야 관문 포구는 대가야 도읍의 동쪽을 흐르는 회천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기 이미 신라가 낙동강 중하류 유역을 장악하였다면 대가야는 섬진강 루트를 통해 서해 연안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대가야의 도진리산성. 석문성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척점에 있다.

 

몸살을 앓고 있는 낙동강. 앞 낙동강 동안의 구릉은 대가야 보루로 적당해 보인다.

 

 개경포 표시석

 

 개포나루는 강화도에서 만든 팔만대장경을 배에다 싣고 이곳 개포나루에 내려 해인사까지 운반하였다고 하여 개경포 혹은 장경나루라고도 부른다.

 

 

 

 천황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고천원 고지를 고령군에서는 지금의 가야대학교 부근 계곡으로 비정하고 있다.

 

 개포나루에서 개진면 지나면 개포동 석조관음보살좌상 이정표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개포동 계곡으로 들어가면 관음보살좌상이 눈을 지그시 감은채 와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안내판

 

 

 

 개포동 계곡. 과거 개포나루는 활발한 포구로 이곳 개포동 계곡에는 큰절이 있었던 것 같다.

 

 개포동 석조 관음보살좌상

 

 초승달 모양의 눈썹에 눈은 억지로 감으며 썩소를 날리는 듯한 관음보살상. 열심히 수도하는데 왜 와서 귀찮게 하느냐는 표정이다. ㅋㅋ

 

 

 

광배 뒷면에 음각된 명문. 명문에 따르면 985년 산이란다.

 

 

 

 

 

 자 갑니다. 눈좀 떠보세요! 가다가 갑자기 다시 돌아선다. 그대로 눈감고 계시다.

 

 내려 가는 길

 

 개포리에서 고령읍 가는 길에 양전동 암각화가 있어 들리기로 한다. 사진은 양존동 암각화 전경.

 

 안내판에는 설명이 없으나 암각화 루트라는 것이 있다. 알타이 계곡~오르도스(내몽고)~요하(만주)~반도(동해 연안)~울주 반구대 암각화와 고령 양전동 암각화로 이어지는 루트이다. 청동기 시대 이래 암각화 루트는 중앙아시아 종족들의 주된 이동 경로였다. 알타이 계곡에 근원을 둔 제 종족 중 일파가 이동하여 반도 동해안을 따라 울주나 낙동정맥을 너머 내륙인 낙동강 중류의 고령 지역까지 근거지를 이동한 흔적인 것이다. 위도상 울주 반구대 암각화와 고령 양전동 암각화는 거의 비슷하다.

 

 실측도

 

 암각화 전경

 

 제일 오른쪽 부분

 

 세부분으로 나누어 찍어 보았다. 오른쪽 부분.

 

 중간 부분

 

 왼쪽 부분

 

<2014년 8월 16일 방문 사진 첨부>

 

 

 

 

 

 

 

 양전동 암각화를 둘러보고 대가야 박물관과 대가야 고분군으로 향했다.

 

 박물관 앞의 가야 시대 움집

 

다락 창고

 

 설명문

 

 대가야 박물관 전경

 

박물관에서 대가야 왕릉 전시관 가는 길에는 대가야 역사 안내판이 도열해 있다. 이것만 알아도 대가야 역사에 대해서는 박사급이다.

 

 

 

 

 

 

 

 대가야 이뇌왕과 신라 왕족인 이찬 비조부의 누이가 결혼해 월광태자가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이뇌왕의 결혼은 실패로 끝나고 왕후인 신라 이찬 비조부의 누이는 월광태자를 데리고 신라로 돌아간 듯하다. 그 이유는 이후 월광의 이름이 신라 비문에 나타나기 때문인바, 반은 신라인의 피가 흐르는 월광이 아무래도 대가야 사회에서 용납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어머니를 따라 신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후 대가야는 남부여(백제)와 군사 동맹을 맺어 554년 관산성 전쟁에서 신라를 맞아 싸웠으나 남부여 성왕이 전사하는 등 동맹군의 패배로 끝나자 대가야의 국세는 완전히 기울고 만다.

 

 관산성 전쟁 8년 후 562년 9월 이사부와 부장 사다함이 대가야 도읍으로 진격하자 항복하고 만다.

 

 왕릉 전시관 맞은 편에 고분이 있다.

 

 국도 건너편 구릉에 고분군이 보인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 입구. 전시관 뒤 주산(310.3m) 정상까지의 마루금(능선)에 대가야 고분군이 집중 분포해 있다.

 

순장의 풍습 

 

 

 

 왕의 무덤

 

 오른쪽 산 구릉을 따라가면 주산까지 고분군이 분포해 있다.

 

대가야 고분군에서 회천의 지류인 안림천을 거슬러 지난번 답사했던 월광사까지 갔다.

 

월광사 앞의 가야천

 

 

 

 월광사지 3층석탑

 

 월광사 대웅전

 

 

돌아오는 중에 일본 천황의 원향인 고천원으로 비정되는 가조분지를 조망하기로 하고 합천 가야면과 거창 가조면의 경계인 큰재를 넘기로 한다. 큰재 너머 조망하기 좋은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가조분지를 바라 보았다.

 

 

 

 고천원으로 비정되는 가조분지

 

 

 

 

 

 

 

 

 

<2017년 1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