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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루트기행/가야 루트

대가야 동서루트(6-1) : 가는정이~평사리산성~시산리산성~무성리산성

<2010년 6월 6일과 2010년 7월 25일>

 

대가야 동서루트(5-2)에서 계속

 

 호남정맥 가는정이 마을에서 정읍시 산외면 내려가는 계곡. 사진은 여우치 마을에서 가는정이 마을 가는 윗길을 찍었음.

 

 여우치마을

 

 여우치 마을 들어가는 길

 

 옥정호(섬진강 수계) 물을 동진강 유역으로 변경하여 흘려보내는 수로. 일제시대 처음 만들어 칠보면에 섬진강수력발전소가 생기전까지 동진강 일대 호남평야에 물을 공급하던 주된 수로였다. 북한 지방에는 유역 변경식 댐이 많으나 남한지방에는 최초의 유역 변경식 댐이 이곳이다.

 

 섬진강 수계에서 호남정맥을 통과하여 동진강 수계로 물이 당차게 흐르고 있다.

 

 

 

 

 

 산외면 내려가는 길

 

 가는정이 마을에서 산외면 가는 길은 옥정호 수로와 같이 간다.

 

 물과 같이하는 대가야 동서루트

 

칠보면에 섬진강 수력발전소가 생기기 전에 발전을 담당하던 종산리 발전소

 

 옛날 발전소 건물이 폐쇄된 낡은 정신병원 처럼 기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멀리서 본 구 발전소 건물

 

 

 

 

 

 

 

 가는정이 마을에서 산외면 가는 계곡은 물이 풍부해 길 전체가 살아있는 듯하다.

 

 지난 6월 6일 답사 구간에 이어 7월 25일 답사를 계속하기 위해 전북 정읍시 산외면으로 향했다.

 

산외면 가는 도중 27번 국도 상에서 바라 본 호남의 어머니 산 모악산.

 

 신정삼거리에서 49번과 55번 합류 지방도를 타고 산외면 능암마을에 도착하여 들판을 바라보다.

 

 

 

가는정이 마을 가는 상류쪽 계곡

 

 산외중학교 교정

 

 

 

 산외중학교 전경

 

 산외면 소재지 남쪽의 노은마을. 마을 뒷산에는 산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운 날이라 답사할 엄두는 못내고 소 닭보듯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사진도 여러장 찍었지만 그나마 이게 제일 낫다. ㅠㅠ

 

 산외한우마을. 단풍 시즌에는 고기 질이 떨어지므로 피할 것.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을 그제야 알았다. 그렇다고 산외한우마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산외면에 와서 김개남 장군 묘를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대가야 동서루트를 조금 벗어나 동곡리 지금실 마을로 향했다. 장군 묘소. 허나 이 묘는 가묘이다. 전봉준 장군과는 달리 김개남 장군은 서울로 압송되지 않고 전주에서 처형 당하였다. 그만큼 당시 기득권들은 전봉준 보다는 김개남을 더 무서워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의 시신은 수습되어 임실 모처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그의 본명이 '영주'이나 '남쪽을 연다'는 뜻으로 '개남'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평등세상은 요원한 것인가?

 

 

 

 묘소 전경

 

 도강 김개남 장군 묘비

 

 저수지 제방 뒤로 김개남 장군이 태어났을 때 엄청난 기운을 부여했을 상두산이 인고의 시간을 버틴 듯 말없이 묘소를 응시하고 있다.

 

 상두산(575.3m)

 

 개남장

 

 

 

 

 

 김개남 장군 생가터 부근에서 바라본 상두산. 전봉준과 김개남은 이곳에서 지금재를 넘어 원평장터(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소재지)에서 거사를 도모하였다고 한다. 110여년 전 두 영웅이 반제국주의 반봉건의 기치를 내걸며 숙고하고 또 숙고했을 법한 역사적인 현장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니 느낌이 새롭다.

 

 김개남 장군 고택터 안내판

 

 고택터 전경

 

 

 

 고택터는 고추밭으로 변했다.

 

 

 

 

 

 

 

 

 

 입구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장군의 고택을 지켜주고 있다.

 

 

 다시 길을 이어 칠보면 섬진강 수력발전소로 향했다.

 

 섬진강 수력발전소. 이곳 수력발전소에 당도하니 하늘도깨비 머리에서 순간적으로 왜 이 근방에 전봉준과 김개남 장군이 태어났는지 알듯하다. 위대한 동진강이 숙명적으로 치뤄야 했던 '물의 전쟁' 때문이다. 동진강 유역은 평야지대이나 항상 물이 부족하였다. 그래서인지 남부여 시절에는 벽골제를 만들면서 단야낭자의 희생이 필요했고, 민초들은 제방 노역에 동원되어 고역을 치렀으며, 신라군은 이곳을 정복하기 위해 남부여 부흥군을 학살하였다. 조선 말기 뇌물주고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하자 본전을 뽑기 위해 동진강과 정읍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만석보를 설치하고 수세를 징수하자 전봉준과 김개남이 봉기한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동진강 유역의 쌀 생산량을 증대시켜 공출하기 위해 섬진강 댐을 만들고 유역변경하여 동진강으로 섬진강 물을 흘려 보내는 고된 역사를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 군산항을 통해 조선 민중의 땀의 결실을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다. 개발독재 시절에는 계화도 간척, 현재에는 새만금방조제사업. 땅을 개척하면 또 그만큼 물이 필요할 것이고...고대로부터 현재까지 동진강과 그 유역 민초들에게 '물의 전쟁'은 이처럼 숙명인 것이다.

 

 

 

 섬진강 수계인 옥정호에서 관을 통해 동진강 수계로 물을 흘려 보내고 있다.

 

 

 

 

 

 실제 계곡 물은 쫄쫄 흐르고 있다.

 

옥정호 수문에서 터널을 만들어 도수관을 설치하면 이곳 칠보면에서 보면 산 중턱 이상이 되는 높은 곳에서 물이 낙하한다. 발전도 가능하고 들은 넓으나 물이 부족한 동진강계로 농업용 용수도 공급하게 되는 것이다. 겨우내 방류하지 않고 있다가 봄 농사철이 되면 '백파식'을 거행하고 옥정호 물을 대대적으로 방류하기 시작한다.

 

 

 

 

 

 

 

 

 

 멀리 하얀 도수관 위 봉우리가 칠보면 시산리 행단마을 뒷산인데 이곳에도 호남정맥 고개인 구절재를 방어하는 산성이 있다고 한다.

 

 

 

 

 

 칠보면 소재지 동진강 건너편의 무성리에도 산성이 있다고 하여 대강 위치라도 확인할 요량으로 마을로 진입한다. 처음에는 정면 구릉을 산성으로 생각하였으나 아무래도 무성서원 뒷산이 산성일 것 같아 서원을 방문하였다.

 

 무성서원 정문 누각인 현가루. 옛날에 누가 공부하러 오는 지 놀면서 감시하기 좋은 곳이다. ㅎㅎㅎ

 

 

 

 신라시절 태산군수를 지낸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태산군은 남부여 시절 대시산군으로 지금의 정읍시 태인면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면한 유서 깊은 곳이다. 오늘날로 치면 무성서원은 공부하는 대학이란 뜻에서 서원 철폐를 면한 것이다.

 

 

 

 

 

 무성리 산성으로 추정되는 곳

 

 

 

 멀리 행단마을 뒷산의 도수관이 보이고 봉우리에 시산리산성이 있어 이곳 무성리 산성과 호응을 이루며 동진강 유역을 방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