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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주류성을 찾아서

부안 우금산성(1) : 남부여 부흥군의 聖地 주류성인가?

<2010년 9월 16일>

 

부안 우금산성과 그 주변 지역을 직접 답사해보니 이곳이 주류성이라는 확신이 든다. 홍성의 석성산성은 주류성이라기 보다는 임존성과 더불어 내포를 지키던 주요 방어성으로 사료된다. 초기 부흥군을 이끌던 흑치상지의 항복과 더불어 내포(홍성과 예산 일대)의 부흥군은 도침의 지도하에 이곳 주류성에 웅거하며 사비성 재탈환을 노렸던 것 같다. 그후 도침의 죽음과 함께 복신과 부여풍이 주류성의 부흥군을 이끌다가 부여풍과 나당군이 백강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것으로 남부여의 역사는 종결된다.

 

 

 표지사진-우금암과 개암사 대웅전

 

 개암사 입구 주차장 건너편에 서있는 농학농민군 대장 김기병 행적비

 

우제 김기병 장군의 묘

 

 주차장에서 우금암이 조망된다. 우금암은 소정방이 주류성을 정복하고 김유신을 만난 바위라는 에피소드에서 '만날 우(遇)'와 김유신의 '김(金)', '바위 암(巖)'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우금암

 

 능가산 개암사 일주문

 

 개암사에는 불이문 대신 불이교가 있다. 자 이제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역시 개암사의 상징은 우금암이다.

 

 

 

 

 

 신라 군대의  장군 김유신은 주류성인 지금의 우금산성 동쪽과 북쪽에서 공격하였으며, 당나라 군대의 장군 소정방은 우금산성 남쪽에서 진격하여 지금 보이는 우금암에서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당나라 군은 웅진강(지금의 금강)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곰소만 북안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곰소만 북안 일대는 남부여의 흔량매현으로 지금의 부안 보안면 유천리 일대 토성이 당시의 치소이다. 주류성이 부흥군의 성지가 되자 유천리 일대 토성들을 수축하여 주류성의 남방 방어성으로 사용한 듯하다. 유천리 토성 남쪽의 줄포는 남부여 부흥군의 항구로서 일본과의 교통에 중심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는 이곳 곰소만 일대를 장악하여 유천리 일대 남방 방어선을 뚫고 주류성으로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 곰소만 북안의 진서면에는 내소사가 있다. 소정방이 온 절이라 하여 내소사라 부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내소사에서 주류성 정복의 기원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내소사 뒤의 관음봉에 올라 주류성(우금산성)을 정탐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개암사 대웅보전

 

 개암사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 왕사가 개창했다고 한다. 남부여 부흥군의 승장 도침은 묘련 왕사의 사자(使者)이다. 도침은 임존성을 위시한 내포 일대 부흥군이 흑치상지의 항복으로 와해되자 부흥군을 이끌고 묘련 왕사가 창건한 개암사가 있는 주류성으로 항전의 근거지를 옮긴 것이다.

 

 

 

 관음전과 우금암

 

 

 

 관음전 옆으로 우금암 오르는 산책로가 있다.

 

 개암사에서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 당시 남부여 부흥군의 식수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기와 파편들

 

 

 

 15분여 오르자 산성 입구가 나온다.

 

 산성 입구

 

 석축의 흔적

 

 안내판의 글씨가 시누대 그림자에 가려 사진상에는 읽기가 어렵다.

 

 

 

 북동 산책로는 시누대로 덮혀 있다.

 

 올라온 길

 

 우금암

 

 수직으로 깍아지른 우금암. 위세가 느껴진다.

 

 

 

 북방 산책로의 시누대를 헤치고 오르면 복신굴이 나온다.

 

 복신굴

 

 복신굴 앞의 석축

 

 북쪽 산책로

 

 

 

 복신굴은 남부여 부흥군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흑치상지의 항복으로 내포(홍성과 예산 일대)의 남부여 부흥군이 와해되자 도침은 이곳 주류성으로 옮겨 항쟁한다. 도침은 부흥군 초기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결국 복신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는 내포의 부흥군 세력이 이 일대 남부여 중방성이 있던 고사부리 세력을 대표하는 복신에 의해 압도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풍이 일본(열도) 세력을 등에 업고 남부여 본토(반도) 세력의 지도자인 복신을 압박한다. 이 와중에 복신은 병이 났다고 하여 부여 풍이 문병을 오게 되면 암살하려고 기도하였다가 도리어 부여 풍의 자객에 의해 역습을 당해 본인이 죽고 만다. 이로써 남부여 본토 부흥군 세력은 주도권을 잃고 부여 풍을 위시한 열도 남부여인들이 부흥군을 지도하게 된다.

 

 

 

 복신굴은 인공적인 동굴이다.

 

 돌을 떼어낸 흔전이 완연하다.

 

 

 

 우금암 바위의 위세가 느껴진다.

 

 우금암과 가을 빛이 완연한 하늘

 

 

 

 우금암 바위 틈에 핀 초목

 

 

 

 

 

 우금암 왼쪽으로 산책로가 나 있다. 복신굴은 인공적으로 채석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 오른쪽으로 바위를 떼어낸 흔적이 보인다.

 

 

 

 기와 조각

 

 기와조각. 복신굴 주변에 기와조각이 많은 걸로 봐서 이곳이 당시 남부여 부흥군 지도부의 거처였던 것 같다.

 

 

 

 

 

 우금암 뒤쪽에도 채석한 흔적과 인공 동굴이 있다. 아마도 성돌을 만들면서 생긴 바위 굴인듯하다.

 

 

 

 우금암 뒤쪽의 바위 동굴

 

 

 

 

 

우금산 정상을 향하여 오르는 길 

 

 

 

 변산의 서북쪽 능선. 제일봉이 의상봉(545.4m)인 듯.

 

 변산의 서남쪽 능선. 제일 뒤 능선이 왼쪽부터 신상봉(488m)~망포대(492.4m) 줄기 같고 바로 앞선 왼쪽 봉우리가 관음봉(424.5m)인 듯하다.

 

 우금암 절벽

 

 올라서 도라도 닦아야 하나?

 

 변산의 서북 능선

 

 

 

 변산의 서북 능선

 

 북동방으로 산성 성곽이 보인다.

 

 

 

 우금암 정상을 조망하다.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진다.

 

 

 

 

 

 바위 사이로 개암사를 내려본다. 수풀이 있어 조망이 별로다.

 

 서벽으로 내려서자 우금암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서벽의 석축들. 돌의 규모가 엄청나다.

 

 되돌아보며 우금암을 바라보다.

 

~ 부안 우금산성(2)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