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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가야 폴리스 기행

사로국의 서촌 압독국을 가다

<2010년 11월 28일>

 

 

표지 사진 - 조영동 고분군

 

고대 압독국으로 알려진 대구 동쪽의 경산시를 찾았다.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게 압독국이 최초 항복한 것은 파사이사금 23년(102년)의 일이다. 이후 사로국 지마이사금(재위 112~134년) 대에 완전 복속된 것으로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일성이사금 13년(146년) 압독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곳 주민을 사로국의 남쪽 땅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사로국의 남쪽 땅이란 금성의 남쪽으로 왜가 자주 출몰하므로 여기에 이곳 주민들을 이주시켜 방위력 증강을 도모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후 압독 지역은 '신라의 서촌'으로 불리며 사로국이 고대국가 성장의 토대를 일군 곳으로 이해된다. 즉 압독은 사로국이 낙동정맥 동쪽 동해안 궁벽한 곳에서 벗어나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함으로써 이후 삼한 통일의 가장 큰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압독 정벌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임당동 토성과 고분의 위치도. 좌측 붉은선과 초록 점선이 임당동 토성이며, 그 남쪽 아래가 임당동 고분군이다.

 

압량벌과 임당동 토성과 고분이 있는 구릉 전경. 압독국은 압량국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고대 원주민은 스스로 압독국으로 불렀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사로국은 '압량'으로 이곳을 부른 것 같다. '독'이나 '량'이나 무리를 지칭하는 단어로 추정된다. 다만 '독'은 당시 원주민어로 보이며, '량'은 한자식 표기로 추측된다. 지금도 경산시에는 압량면이 남아 있다. 보이는 산구릉이 압량면 일대이다.

 

압량면 소재지에서 북쪽 구릉을 올라가면 임시주차장이 나오고 임당동 고분이 신축 건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전봇대에 임당동 고분 이정표가 걸려 있다.

 

고분 가는 길. 지금은 이 일대가 임당동 고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최초 압독국 지배자의 토성이 있었다. 보이는 길의 우측 부터는 토성으로 추정된다.

 

고분 입구의 마을 보호수

 

안내판. 안내문은 임당동 고분을 4~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압독국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압독국이 2세기 중반경 멸망하였음을 감안하면, 임당동 토성과 순장이 이루어진 고분은 1~2세기에 조성된 것이고 이후 압독국 세력이 사로국의 지방 세력으로 편입되고 임당동 토성이 폐성 되면서 이 일대에 고총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임당동 고분 전경

 

임당동 토성의 토루인지 고분인지 구분이 안되나 현장의 느낌은 망루 같은 토루로 보였다.

 

남서방면. 비슬지맥 남성현과 팔조령 중간에서 북으로 분기한 일지맥으로 보이는 산은 성암산(469.1m). 그 아래가 경산 시내임.

 

성암산 우측으로 안산(470.9m)과 대덕산(600m)이 보임.

 

토루에서 바라 본 임당동 고분

 

 

 

임당동 고분에서 바라 본 남성현 가는 길. 조선조 영남대로는 대구를 중시하여 남성현 서쪽 고개인 팔조령이었으나 고대에는 이곳 남성현이 중시되었다. 남성현을 통하면 지금의 청도인 이서국이 나온다. 압독국과 이서국은 남성현을 사이에 두고 강력한 고대 가야 폴리스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사로국은 압독국을 제압하고도 근 150년 가까이 남성현을 두고 이서국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서기 300년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슬지맥의 고개를 넘어 이서국을 정복한 것이다. 조선조에 영남대로의 영광을 팔조령에게 넘겨주었지만, 식민지 시대 청도 주민의 반발로 경부선이 남성현으로 놓이고 25번 국도 또한 개설되었으며, 근자에 이르러 부산대구고속국도가 놓이면서 남성현은 고대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 조선조에도 팔조령이 관도라면, 남성현은 민도였다. 민중들은 양반이나 관리들이 다니는 고갯길이 싫어 남성현으로 많이 다녔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 청도의 양반들은 팔조령으로 경부선이 나는 것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자신들만 다니는 길에 민중들이 다니는 것이 번잡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길과 고개의 역사에는 조금만 들추어도 지금은 잊혀졌지만 고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담지하고 있는 듯하다. 남성현 계곡 들어가는 우측 산이 성암산이며, 좌측 산이 백자산(486m)이다. 

 

서남방(경산시내와 압량벌)

 

남방(백자산과 우측의 남성현 가는 계곡 길)

 

 

 

고분 뒤로 임당 유물전시관이 보인다.

 

 

 

토루 방면

 

 

 

 

 

 

 

남성현 계곡 방향

 

백구 한마리

 

전시관 앞의 안내판

 

전시관 입장 불가

 

임당동 고분에서 나와 고분 북쪽의 토성터를 둘러볼 요량으로 어린이 공원 뒷편으로 향했다.

 

임당동 토성의 북방으로는 오목천과 금호강 너머 초례봉(636.7m)이 보인다. 토성 내부는 밭으로 개량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속에 압독국의 도성터는 잊혀지고 지워지고 있구나! 맥수지탄의 노래가 절로 나오는구나! 이제야 기자가 은허를 보고 맥수가를 지은 기분을 느끼는구나!

   

토성 내부 남쪽으로 난 길

 

북으로 바라보니 나무 두 그루만이 압독국 도성을 지키고 있구나!

 

 

 

토성 내부

 

토성 외부는 빌라촌을 이루고 있다. 영남대학교가 인근에 위치한 까닭에 이곳 고분과 토성 주변은 대학촌을 이루고 있다.

 

토성 내부

 

임시 주차장에서 바라 본 토성 전경. 좌측 아래길이 고분가는 길이다.

 

토성을 보고 나서 조영동 고분으로 발길을 옮긴다. 걸어서 5~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초행이라 차로 번지수만 보고 갔다가 조금 헷갈렸다.

 

북방으로 오목천과 금호강이 합강하는 지점의 압량벌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조영동 고분

 

북방의 초례봉과 경부고속철도

 

조영동 고분 전경. 조영동 고분과 임당동 고분은 같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어 고분의 주체는 동일하다.

 

 

 

 

 

고분의 북방. 초례봉과 경부고속철도.

 

고분 동쪽의 압량면 소재지인 부적리 일대.

 

 

 

 

 

 

 

 

 

 

 

 

 

명명하여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라 해두자!

 

안내판

 

 

 

서쪽 모퉁이 고분들

 

임당동과 조영동 구릉은 한마디로 고대 압독국 왕족이었던 조상들과 현대 압독국 후손들로 추정되는(?) 영남대학교 학생들이 동거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구릉은 고분과 빌라로만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대와 현대의 기묘한 동거라고나 할까? 나쁘지 않은 광경이다.

 

 

 

 

 

사진 잘 나오는 곳인가?

 

고분사이로...

 

하늘에는 여객기도 보이고...

 

 

 

 

 

안내판2

 

 

 

안내판3

 

토축의 흔적일까?

 

토축의 흔적은 이 빌라의 정면에 있다.

 

사로국은 압독국 정벌 이후 297년 무렵에는 이서국을 정복하여 낙동강 하류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신라로 성장한 6세기 중반 무렵에는 드디어 낙동강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신라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백두대간을 넘어 금강 유역의 남부여(백제)를 공격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남부여 정복 군주인 의자왕의 등장으로 낙동강 중류 유역이 중대한 위기에 봉착한다. 바로 지금의 함양인 속함성과 합천인 대야성 함락(각각 624년과 642년)이 그것이다. 남부여는 낙동강 중류의 지류인 황강 연안을 장악하고 낙동강 도하를 꿈구며 신라의 도성인 금성을 위협한 것이다. 이에 신라는 부랴부랴 압량군에 압량주를 설치하고 김유신을 군주로 임명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압량유적은 당시 김유신이 압량주 군사들을 훈련시킨 연병장 같은 곳이라 구전되고 있다. 이러한 유적은 경산시 일대에 3곳이 남아 있다. 오늘은 그곳 중 하나인 압량리 유적을 방문했다.

 

안내판1

 

압량리 유적 오르는 길. 높이 7m, 둘레 300m의 토성이다.

 

 

 

안내판2

 

내부 광장

 

북방의 초례봉. 이곳 압량리 유적 주변은 온통 공장지대이다. 압량리 유적이 공장지대와 동거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빌라와 동거했던 임당동 고분군과 비교해서 차이점은 무엇일까? 임당동 구릉이 휴식의 거처였다면 이곳 압량리 구릉은 활동의 근거지라는 사실이다. 물론 군사활동과 생산활동의 차이가 있을 분이다. 비록 이러한 토성터가 경산 일대에 3곳 밖에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금호강 지류로 북류하는 오목천 동서로 위치한 점으로 추정컨대 이는 사로국 금성에서 압독국 도성인 임당동토성으로 오는 길목을 오목천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형국이다. 이곳 평야와 구릉지대조차 눅눅하게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일종의 배수진 양상이다. 물론 후대에 신라가 압량주 군사들의 연병장으로 재활용할 수도 있으나, 어쩌면 이곳은 압독국의 대 신라 방어성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장대지나 망루로 추정되는 동남쪽 토루.

 

토루 전경

 

북으로 조망한 내부 광장

 

토루 정상 평탄면

 

토루에서 바라본 북방

 

토루 서남방 아래

 

토루 동남방 아래

 

토루에서 바라본 북방

 

토루에서 바라본 서북방

 

토성 동벽 아래

 

토루

 

토성 서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