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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가야 폴리스 기행

공주 수촌리토성과 고분 : 금강 중류 연안의 가야 폴리스를 가다

<2010년 12월 5일>

 

 

표지사진 - 정안천 제방에서 바라 본 공주 수촌리 토성 전경

 

 

원래 가까운 곳이 가기가 힘든 법이다. 작정하면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달리 마음을 먹는다. 주말 대전을 벗어나지 못하면 무조건 근교로 가리라! 오늘은 공주 수촌리 토성과 고분을 보리라 다짐한다. 다짐하고 보니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공주 수촌리는 남부여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곳이다. 일개 가야 폴리스가 반도의 위대한 전제국가로 전화한 그야말로 역사적인 곳이다. 그럼에도 수촌리 토성과 고분은 초라하게 방치되고 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왜냐면 남부여도 잊혀진 마당에 수촌리 고분과 토성의 주인들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수촌리 고분은 구제발굴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구제발굴이란 도로나 댐 건설 내지 신도시 건설 사업 등 우연한 기회에 유적이 발굴되어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구제발굴이라는 우연에 의해 역사의 필연성을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촌리가 그러한 곳이다.

한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으로 내려 오는 가장 빠른 길은 금북정맥상의 차령을 넘어 정안천을 따라 공주로 곧장 내려 오는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이 삼남대로(해남대로)의 일부였다. 수촌리는 정안천이 금강으로 합류하는 지점 직전의 퇴적 평야지대이다. 이 때문에 수촌리 일대는 고대 가야 폴리스가 형성될 수 있는 훌륭한 입지를 두루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교통로의 간선 망에 있으면서 퇴적 평야 지대라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는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공주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편제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공주 지역에는 마한의 1개 국(國)이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목지국(目支國)을 월지국(月支局)으로 기재한 <삼국지> 판본에 따라 그 소재지를 공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나아가서 공주 월성산(月城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에 토성을 축조한 세력과 같은 존재가 공주 일원에 포진한 국 세력의 하나로 보겠다. 이들의 생활상은 공주 탄천면 장선리와 그 주변의 토실(土室)과 장방형 주거지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공주 지역에 소재했던 마한연맹 소속의 1개 국명(國名)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감해비리국(監爰卑離國)을 공주로 비정하기도 한다. 불운국(不雲國)의 소재지로 공주 지역을 지목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공주 지역 세력과 백제와의 관계는 알려진 바 없다." <공주시청 홈페이지 인용>

 

공주시는 백제 이전의 역사를 마한 목지국이나 감해비리국 또는 불운국과 연관시키고 있다. 필자는 마한의 중심지로 알려진 목지국을 다소 협소한 공주로 비정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마한의 일국으로 감해비리국 내지 불운국으로 비정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잠정 동의한다. 기록이 전무한 현재로서는 삼한의 소국들과 삼국의 군현을 직접 정확히 연결시키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삼한의 일국들은 가야 폴리스로서 기능하였으며, 삼국의 등장과 함께 그 군현으로 편재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하다. 따라서 공주 일대를 감해비리국이나 불운국으로 추정하는 견해에 대해 딱히 반론을 전개할 근거도 없거니와 반론 해야할 뚜렷한 이유도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영역 범위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온조왕 13년(BC 6년) 8월에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遷都)를 고(告)하고 강장(疆場)을 획정(劃定)하였는데, 북쪽은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에 한(限)하고, 서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동쪽은 주양(走壤)으로 끝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

 

학계는 패하를 예성강, 웅천을 금강, 대해를 서해, 주양을 춘천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명의 위치라기 보다는 영역의 획정 시기이다. 온조왕 13년(BC 6년)의 일로 보기보다는 후대에 소급된 사실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대에 소급된 기사라는 근거 또한 막연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열도측의 기록인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금강 이남을 경략한 듯한 기사가 있어 참고할 수 있다.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의 침미다례를 도륙(屠戮)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肖古) 및 왕자 귀수(貴須)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 때 비리(比利)·벽중·포미(布彌)·지반(支半)·고사(古四)와 같은 읍락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 및 황전별(荒田別)·목라근자(木羅斤資) 등이 함께 의류촌(意流村)[지금의 주류수기(州流須祇)를 말한다]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예(禮)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이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랐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 조>

 

신공황후 49년(249년) 조에 보이는 백제의 경략 대상 지역은 대체로 금강 이남에서 호남정맥(노령산맥) 이북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신공황후 49년은 백제 고이왕 16년으로 기사에 나오는 초고왕의 시절이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고이왕 16년에 태백성이 달을 덮었다는 천문 기사만 나와 있다. 이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연대 서술이 서로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두 사서 중 어느 기사의 연대가 틀리는 지는 알기 어렵다.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그런데 신공황후 49년 조 기사는 '초고왕-귀수왕자'의 인명으로 인해 그 내용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백제 역사에 초고-귀수로 이어지는 왕계는 두번 있었다. 근초고-근귀수이다. 근초고는 초고에 가깝다는 의미로 초고왕의 위대함에 필적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시호이다. 고대 국가에서 군주의 위대함이란 바로 영역 확장의 의미와 동일하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온조는 당시 금강 유역까지 통치권을 넓힌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우호 세력은 확보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초고왕(재위 166~214년)은 이를 기반으로 마한의 목지국으로 비정되는 익산을 비롯한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의 가야 폴리스들을 제압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공황후 49년 조 기사에 나오는 초고왕을 근초고왕(재위 346~375년)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유력하다. 이 즈음 공주 수촌리 세력도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수촌리 토성은 의당면소재지에서 정안면 가는 7번 군도 상에 있는 양촌마을 서쪽 구릉에 있다. 필자는 네비게이션(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456-8번지 기입)에 의존한 채 와서 그런지 도착한 후 주변 지형을 파악한 후에 비로소 토성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토성은 축사와 밭으로 이용되고 있어 답사 도중에도 몇번이고 토성이 맞는지 의구심을 갖게 하였다.

 

 

토성의 서벽 끝지점

 

북벽. 토성이라 석축의 흔적이 없어 단순히 구릉처럼 보인다. 수촌리 토성은 성 전체를 판축하였으며 높이는 5m, 둘레는 400m 정도라 한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성곽 유적으로 사료된다. 수촌리 토성은 풍납토성, 청주 정북동토성, 평택 농성처럼 강변 가운데 입지한 초기 토성들과 유사하다. 아마도 수촌리라는 지명에서 암시하듯 이 토성은 '물위의 마을' 처럼 보였을 것이다. 고대에는 정안천 자연 제방이 지금 보다 토성 가까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커 멀리서 보면 물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토성 북쪽의 수촌들. 정안천 하류 퇴적 평야지대로 이곳 가야 폴리스 생산의 근원지로 볼 수 있다.

 

토성 서북쪽의 수촌들. 정안천은 인공 제방에 의해 보이지는 않는다. 맨 뒷 능선 좌측 높은 봉우리가 무성산(613.6m)이다. 무성산은 홍길동성으로 불리는 산성이 있다. 홍길동은 가상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지역에서는 무성산을 배경으로 활약한 실존 인물로 보고 있다.

 

토성의 서벽 끝에서 내부를 바라 본 모습

 

토성의 동북부 방향. 오른쪽 앞 능선에 수촌리 고분이 입지하고 있다. 토성(혹은 산성)과 고분군은 가야 폴리스의 한 세트 기념물이다. 이 토성은 수촌리 고분군의 주인공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공주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감해비리국 내지 불운국이라고 한다. 필자는 삼한의 74개국 모두를 가야 폴리스로 추정하고 있다. 대륙의 사서에서는 한(韓)으로, 반도에서는 가야로, 열도에서는 가라[일본에서는 韓을 가라로 읽는다]로 불린 종족들이다. 이들의 최초 출자지는 대륙 산서성 분수(汾水) 유역이었으며, 고조선 당시 하북성 영정하와 난하 유역에서 활동하다가, 전국시대 연의 침공으로 요녕성 대능하와 요하 부근까지 밀려났다. 진한 교체시 연의 유민들이 들어와 고조선을 장악하자 비로소 요동반도와 압록강을 건너 반도로 유입된 것이다. 이어 부여족이 반도로 남하하자 일부는 반도를 버리고 열도로 이주하며 천황족을 형성한다. 韓의 유맹은 우리 고대사 저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필자는 그들의 이주 경로를 고대 사서에서 추적하고 있다.

 

토성의 서벽 아래

 

토성의 동녁을 바라보다. 현재 토성의 서쪽은 다른 지대보다 높아 토성의 내성으로 추측된다.

 

토성의 남쪽. 보이는 고가 도로는 23번과 36번 국도가 합쳐지는 곳이며, 그 남쪽에서 정안천과 금강이 합강한다. 합강점 건너편이 공산성으로 고대 웅진성이다. 웅진성은 남부여족이 고구려에 밀려 남하했을 때, 남부여가 도성으로 삼은 '구마나리'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인들의 사정이 딱해 이곳을 그냥 주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냥 줄리가 있겠는가? 남부여인들이 이곳을 개척하느라 힘좀 들였을 것이다.

 

토성 내부는 밤나무가 자라고 있다. 문화 유적이 이리도 방치되고 있나 싶어 몇번이고 이곳이 토성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수촌들이 시원하게 조망되므로 고분과 함께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개발해 봄직하다.

 

토성 내부

 

토성 남벽 아래

 

토성의 서남방. 연미산 일대.

 

토성 남벽 부근에서 동쪽을 바라본 모습. 우측이 토성의 남벽.

 

남벽 부근에서 서쪽을 향해 바라본 토성 내부 모습.

 

축사 건너편 동쪽의 토성 모습. 기록에서는 수촌리 토성의 둘레가 400m라고 하였지만 실제 1000m 정도는 될 듯하다.

 

서쪽을 향햐 바라 본 토성 내부 모습.

 

남쪽에서 바라 본 토성의 서쪽 부분

 

남쪽에서 바라 본 토성의 동쪽 부분

 

토성 서쪽의 수촌들

 

정안천 제방 위에서 바라 본 토성 전경

 

한컷 더!

 

정안천과 무성산.

 

정안천(하류방향)

 

정안천(상류방향)

 

수촌리 토성 전경

 

 

수촌리 토성을 답사하고 나서 정안면 방향으로 3분여 가면 수촌초등학교가 나온다. 그 뒤 구릉에 수촌리 고분이 있다.

 

 

 이정표

 

고분 가는 길이 꼭 어디 고급 별장 들어가는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하긴 고분이 사후 고급 별장이긴 하지만...

 

 안내문

 

 이곳은 수촌리 고분군 제2구역이다. 서쪽으로 금북정맥에서 분기한 무성지맥이 남으로 금강을 향하여 힘차게 남류하고 있다. 무성지맥은 정안천과 유구천을 동서로 분기시킨다. 남부여 대에는 북으로 정안천과 유구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 금북정맥을 넘는 것이 여제간 주요 간선도로였을 것이다.

 

 서쪽의 수촌들

 

 서남방의 수촌들

 

좌측 능선 끝 자락이 수촌리 고분군 제1구역이다.

 

 

 

 

 

 

 

 보이는 건물이 수촌초등학교이다.

 

 서남방의 수촌들

 

 서북방의 무성지맥

 

 

 

 

 

 우측 마을이 요룡리 요골마을이다.

 

제1구역 가는 길에서 바라 본 1구역 고분군

 

 

 

서북방 무성지맥

 

 

 

제1구역 고분군

 

조그마한 고분들이다. 현재의 분묘들보다도 작다.

 

1구역 고분군 전경

 

 

 

 

 

 

 

 

 

서쪽의 수촌들

 

2구역 가는 길

 

앞에 보이는 조그만 골짜기 건너 오른편 끝 능선 자락에 2구역 고분군이 있다.

 

서북쪽 방향의 무성지맥. 아래가 요골마을이다.

 

2구역 고분군이 보인다.

 

1구역과 2구역 고분군 상단은 산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고대에는 산성과 고분이 공유되기도 하였다. 만약 이곳이 산성이라면 수촌리 고분 주인공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1구역은 이곳으로 들어오면 오기 쉽다.

 

모형비행기인가? 굉음을 내며 날으고 있다.

 

1구역과 2구역 사이의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