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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안성 죽주산성 : 신라가 고구려의 십자 결절지를 장악하다

<2011년 2월 20일>

 

표지사진 - 포루와 나무

 

 

진흥왕 11년(550)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550년 신라 장군 이사부는 고구려와 남부여의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살성은 지금의 충북 증평군 도안면 소재지 뒷산의 이성산성으로 비정된다. 보강천은 미호천의 지류인데, 미호천은 또한 금강의 지류이다.  당시 이성산성은 국원경(지금의 충주시 가금면 일대)에서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을 따라 서진하는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남부여 군대는 증평평야(지금의 증평읍 일대) 서쪽 산록의 금현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금현성은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에 소재한 낭비성이 유력하다. 낭비성은 신라의 삼년산성에서 올라오는 남북 교통로 상에 있는데, 바로 남쪽에는 한남정맥의 이티를 지키는 구녀산성이 위치한다. 당시 신라군이 구녀산성을 접수하고 이곳에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부는 구녀산성에서 고구려와 남부여의 전투를 관망하다가 양 군대의 피로한 틈을 타 두 성을 기습하여 공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어부지리인 셈이다. 

 

진흥왕 12년(551)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서 10개의 군(郡)을 빼앗았다. <신라본기>

 

551년 신라군은 백두대간을 넘어 남한강이 영월에서 남류하다가 꺾여 서류하는 단양과 충주 일대를 침입하여 10군을 공취한다. 그야말로 신라군의 대약진이었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무력(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신라본기> 

 

553년에는 백제가 어렵게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동북변경 6군을 공취한다. 이때 신주를 설치한다. 신주 설치는 신라가 미호천 상류 일대를 장악하고 한남정맥을 넘어 남한강 하류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신주는 지금의 진천읍 대모산성이 유력하다.

신주에서 한남정맥을 넘어 남한강 지류인 청미천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고개가 바로 수레티 고개이다. 수레티 고개는 지금의 중부고속도로 화봉육교 아래이다. 수레티는 말 그대로 수레가 넘을 정도로 큰 길이란 뜻이다. 고대 남북 교통로가 지명에도 남아 있다. 이처럼 중요한 수레티를 지키는 산성이 있다. 바로 안성(음성) 망이산성이다. 화봉육교에서 등산로가 있어 지금도 산성까지 길이 나있다.

수레티를 넘어면 바로 청미천 상류에 위치한 안성시 죽산면이 나온다. 죽산면 주변의 지명으로 일죽면과 삼죽면이 있다. 모두 고려시대 죽주에서 파생된 지명이다. 고구려 대의 지명은 개차산군이며, 영현으로 청미천 하류인 이천 장호원과 설성면에는 노음죽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안성시 죽산면 일대인 고구려 개차산군은 남북 교통로 뿐만 아니라 동서 교통로가 교차하는 결절지라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있다. 신라는 고구려 개차산군을 점령하고 개산군으로 개명한다. 이곳에서 동으로는 청미천을 따라 남한강 본류로 나가 고구려 국원경이었던 충주 일대를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는 북으로 주행하는 한남정맥을 넘어 안성천 유역을 따라 아산만이나 남양만으로 진출할 수 있다. 신라의 대당 포구인 당항성 개척은 교통의 십자 결절지인 개산군 정복 때문이었다. 당항성 개척이 신라의 삼한통일의 필요조건이었다면, 개산군 점령은 충분조건은 될 듯하다. 그리고 개산군 정복은 신라의 신주 설치 덕분에 가능했다.

 

진흥왕 16년(555)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혀 정하였다. <신라본기>


진흥왕 18년(557)에 신주(新州)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신라본기>

 

553년 신주 설치 이후 555년 경에 진흥왕이 한강 이북의 북한산을 순수한 것으로 보아 개산군 정복은 신주 설치 직후 일찌기 마무리된 듯하다. 정복의 역사적 소임을 다한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한 것은 신라가 한강 이북까지 노리고 있다는 실용적 자존심의 표현일 것이다.

 

오늘은 신주 설치 이후 점령한 고구려 개차산군의 치소였던 죽주산성과 한남정맥 수레티를 지키던 망이산성을 답사했다. 죽주산성은 죽산면 소재지의 매산삼거리에서 용인가는 17번 국도를 타고 1분여 가다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그곳에서 비보호 좌회전하면 죽주산성 오르는 길이다. 산성의 7부 능선까지 차로 갈 수 있어 답사는 편안한 편이다. 

 

 

주차장 주변의 비봉산 등산 안내도

 

안내문

 

산성 안내도. 삼중의 성벽이 중첩된 구조이다.

 

동문. 오르는데 완전 빙판길이다.

 

동문 우측 동벽

 

동문으로 산성 내부가 보인다.

 

동문 좌측 동벽

 

동문 우측 동벽

 

산성 내부

 

산성 내부

 

산성 내부에서 바라 본 동문

 

좌측 동벽으로 먼저 오른다.

 

동문 입구

 

산성 동쪽

 

동쪽으로 큰바래기산(414m)과 마국산(444.5m)이 보인다. 마국산 아래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건너편 동벽이 조망된다.

 

동북방으로 마국산이 보인다.

 

동남방으로 한남정맥 수레티를 지키던 망이산성이 조망된다. 좌측이 망이산(454m), 우측이 죽림산(354m).

 

남벽

 

남벽포. 치로 보았으나 포를 쏘던 곳이다. 현재의 죽주산성은 고려와 조선에 와서 수축된 산성이다. 고대에 포를 쏘지는 않았을 터...

 

동남벽 아래 청미천 지류인 죽산천 유역의 죽산 벌판이 보인다. 동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은 노성산(274m)이다. 산성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필자는 노성산 좌측 고개(329번 지방도가 지나는 길)를 거쳐 신라군이 경기도 이천을 거쳐 광주의 남한산성에 이른 것으로 추론한다. 신라군은 이 길로 통해 한강 유역의 북한산주까지 진출했을 것이다. 마국산 일대 보다는 노성산 일대가 비교적 낮기 때문이다.

 

남벽 위

 

남벽 아래

 

남벽포와 남벽

 

동남방으로 망이산성이 보인다.

 

남벽 산책로

 

되돌아 보며...

 

남벽과 남벽치

 

남벽치. 남벽치 아래에 남문이 있다.

 

남문

 

 

 

남문 밖에서 남벽을 바라보다

 

밖에서 바라본 남문

 

성문 기둥을 끼웠던 홈

 

 

 

남벽치에서 바라 본 죽림산과 망이산성

 

 

 

남벽 동쪽으로 죽산벌이 보인다.

 

남문과 남벽 전경

 

남벽 치성

 

안성시 죽산면 소재지 일대. 우측가는 길이 한남정맥을 넘어 서쪽 안성천 유역으로 나가는 길이다. 죽주산성을 신라군이 점령했다는 의미는 동서와 남북의 십자 교통로 결절지를 장악하고 서진과 북진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안성천 유역에서 아산만이나 남양만으로 진출할 수 있다. 남양만의 대당 창구인 당항성 개척은 신라가 죽주산성을 점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벽 치성과 망이산성

 

서쪽의 비봉산(372m). 죽주면의 진산이다. 죽주산성은 비봉산의 동쪽 산록에 위치한다.

 

서벽 전경

 

서벽 아래에 충의사가 있다. 잠깐 념을 올린다. 충의사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에서 큰 전과를 올린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다.

 

충의사에서 산성 내부로 내려가는 길

 

충의사에서 우측 길로 오르면 내성 남벽이 나온다.

 

내성 남벽

 

내성 북벽

 

서벽(외성)

 

내성 서벽 구간. 내성이지만 외성과 내성이 중복된 곳이다.

 

내성 서벽에서 바라본 서남쪽의 죽산면 소재지 일대

 

내성 서벽 마무리 구간

 

내성 서벽 종점에서 바라 본 북방의 마국산 일대. 마국산 아래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좌측이 청미천 상류(용인시 백암면 방향), 우측이 청미천 하류(이천 장호원 방향)가는 길.

 

외성 서벽으로 바로 아래가 서문이다. 오늘은 망이산성이 최종 목적지이므로 외성의 서벽과 북벽  답사는 하지 않았다. 길도 험할 것 같고...

 

내성 북벽과 좌측의 마국산

 

내성 북벽 전경. 내성은 중성 골짜기를 따라 빙둘러 쌓았다. 그래서 남벽과 북벽의 사이가 매우 좁다. 삼중의 복합식 산성 구조로 매우 복잡하다. 축조자의 어떤 듯이 숨어 있는 걸까?

 

내성 북벽 전경

 

내성 북벽은 중성 골짜기를 감싸고 있다.

 

되돌아본 내성과 외성의 종점 부분

 

내성 북벽

 

되돌아본 내성 북벽. 오른쪽 아래가 중성 골짜기이다. 신라 당대의 죽주산성 규모는 현재의 중성 골짜기를 포곡식으로 연결한 산성일 가능성이 있다. 복잡하게 된 사연은 고려 이후 축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내성 북벽의 망대(?)

 

내성 북문. 중성으로 가는 유일한 연결 통로이다.

 

내성 북벽 포루 부근

 

돌아본 내성 북벽

 

포루와 나무

 

 

 

포루 부근에서 바라 본 마국산 일대

 

 

 

포루 부근에서 바라 본 북방의 마국산

 

죽산벌 중심에는 마국산 우측의 노성산이 보인다. 노성산 좌측의 낮은 고개(329번 지방도 가는 길)로 신라군이 북벌을 감행하여 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을 것이다. 오른쪽 산구릉 좌측 아래로 청미천이 동류한다. 청미천 하류가는 길이 이천 장호원 가는 길이다. 죽주산성 부근이 십자 교통로 결절지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도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쉽게 진출할 수 있는 요지이다. 신라가 고구려의 개차산군을 점령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바탕에는 551년에 설치한 신주의 힘이 있었다. 신주를 개척한 이는 삼한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 있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울릉도 정복와 실직주 군주였던 이사부라는 신라 전쟁의 신이 있었다.

 

포를 쏘던 구멍

 

동남쪽의 망이산과 망이산성. 그 아래 수리티를 넘어면 신주가 나온다.

 

우측의 망이산. 중부고속도로가 북쪽으로는 마국산 서쪽 아래로, 남쪽으로는 망이산 저쪽 아래로 지나간다. 신라의 북벌로는 미호천 이북 지역에서는 지금의 중부고속도로와 거의 비슷하다.

 

포루 우측 바깥 부분

 

포루 내부

 

멀리 동북쪽으로 노성산이 보인다.

 

 

 

동문으로 회귀하며 되돌아본 동벽.

 

동문으로 오르는 길

 

동문 부근

 

동쪽

 

이정표

 

죽주산성 현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