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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핏골전쟁(1) : <삼국사기>가 외면한 가야의 전쟁

<2011년 3월 1일>

 

 

표지사진 - 초강(금강 지류)과 금강의 합강 부근에서 바라 본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일대. 앞 능선 너머가 심천면 각계리로 전설을 간직한 핏골이 있다.

 

 

 4년 전인가 1대 75,000 지도책을 한권 산 적이 있다. 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전국을 훑어 보다가 묘한 지형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이 바로 영동군 심천면이다. 난계 박연 선생의 탄생지로도 유명하지만,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 강이 합강하는 곳이라 지형이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은 금강의 지류인 초강과 영동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전국에는 아우라지, 아호라지, 아우내라는 지명이 많다. 이는 물길이 함께 어울린다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합강 내지 병천으로 표기한다. 아우라지는 정선에 있는데, 남한강의 발원지로 유명한 검룡소에서 북류한 골지천과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송천의 물길이 어울려 그 유명한 동강을 이루게 된다. 아호라지는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과 내촌천이 만나는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에 있다. 양평에서 인제 원통가는 44번 국도 변에 화양강휴게소 강 건너편이 아호라지이다. 아우내는 순대로 유명한 천안시 병천면을 이른다. 한자로 병천은 '아우를 병'과 '내 천'으로 내가 아우르는 곳이란 뜻이다.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아우내가 바로 그 곳이다.

 그런데 세강이 합강하는 영동군 심천면은 '아우라지'라거나 '아호라지'라거나 '아우내'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그곳은 '지프내'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깊은 심'과 '내 천'을 쓴다. 그래서 심천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깊은 하천이란 의미이다. 이는 군사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도하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천의 지형은 금강이 동서로 역 S자를 크게 그리며 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 피아간에 도하를 하려면 금강을 세번 건너야 되는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동으로 초강과 영동천이 평행하게 합류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어디가 금강이고 초강이고 영동천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상류가 어디고 하류가 어딘지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금강을 두고 자연스럽게 남부여와 신라간에는 국경이 되었다.

 핏골이 관산성과 더불어 최대의 화약고로 돌변한 것은 가야를 둘러싸고 신라의 서북진과 남부여의 동남진이 정책이 맞부딪치면서 벌어졌다. 남부여는 북동방의 고구려 때문에 할 수 없이 신라와 군사 공조를 맺었으나, 이틈을 타 야금야금 남부여의 동변을 공략하는 신라의 이중적인 태도에 분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구려가 대륙 동북방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돌궐 문제로 한강 이남 공격이 주춤할 때, 남부여 성왕의 명을 받은 태자 창이 기습적으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한편 이 싸움에는 남부여 군대 외 가야와 왜병도 출전하였다. 특히 가야의 영역은 금강 상류(지금의 충남 금산 일대까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낙동강 서안과 금강 상류를 노리는 신라군에 맞서 가야군도 참전한 것이다. 실제 관산성 전쟁에는 남부여군 측에 가담한 총 병력의 60% 이상이 가야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필자는 금산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핏골 전쟁은 가야군이 주축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의 대전-옥천은 남부여의 영역이었지만, 당시 금산과 무주, 장수, 진안 일대는 가야의 영역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특히 금산의 고분에서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가 출현하고 있으며, 장계 침령산의 봉수대에서 금산까지 봉화망이 연결되어 있어 이러한 추론을 확증케 한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산성전쟁이 신라, 남부여, 가야 삼국이 벌인 국제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왜군은 남부여 왕가와 일정한 관계가 있어 물자 보급 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참전의 의의는 크지 않다.

 <삼국사기>가 핏골전투를 기록에서 제외한 것은 가야의 역사가 삼국사에 흩어졌기 때문이며, 이는 백제의 부수적인 부문으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오인한 까닭으로 사료된다. 신라군에 맞서 금산벌을 지키려했던 가야군의 전쟁 지역을 답사해 보는 것은 또 다른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출발점은 옥천읍에서 4번 국도를 타고 동이면과 이원면의 경계인 구집티를 넘으면서 시작된다.

 

 

옥천군 동이면과 이원면의 경계인 4번 국도 상의 구집티 고개. 이원면에서 동이면 가는 방향을 바라 보고 있다. 고대에는 이 길이 옥천읍에서 이원면 소재지 가는 우회도로라 근처 주민을 제외하고는 잘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옥천읍에서 이원면까지 가는 직선길은 구집티 서쪽에 높이 솟아 있는 도덕봉(407.3m) 서록의 솔치이다. 고대 루트는 지름길인 솔치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도덕봉 부근에 도적들이 출몰하면서 평지인 이곳 구집티를 이용한 것으로 전해 온다. 도덕봉의 원래 이름은 도둑봉이다. 

 

구 4번 국도를 따라 오면서 바라 본 이원면 소재지. 경부고속철이 보인다. 경부고속철은 도덕봉 아래 굴을 뚫어 통과하고 있다. 이로서 솔치가 직선길임이 증명된 것이다. 경부선은 아예 솔치 밑에 굴을 뚫어 통과하고 있다.

 

옥천군 이원면 소재지

 

앞 능선 좌측이 이원리 산성이다. 신라때의 소리산현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동남쪽 제일봉은 월이산(551.4m)으로 구름에 가려져 있다. 봉수대가 있다.

 

우측의 월이산과 좌측의 이원리산성 부근

 

현리교 앞에서 바라 본 이원리산성

 

남쪽. 하천따라 오르면 밤티가 나온다. 밤티를 넘어면 영동군 양산면이 나오고 영국사와 호탄교로 갈 수 있다. 금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로이다. 호탄교를 넘어면 조비천현의 치소로 알려진 비봉산성이 바로 나온다.

 

내를 자연해자로 삼은 이원리산성

 

이원리산성 전경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현리마을

 

현리교

 

 

 

마을 자랑비. 현리는 신라의 소리산현과 이산현의 치소가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월이산 봉화대와 이원리 토성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토파역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라는 내용이다. 덧붙여 현리는 월이산의 정기를 받은 풍수지리상 왕조혈이라고 한다. 지금은 4번 국도가 현리 북쪽을 지나지만, 옛날에는 인마가 이곳 현리를 반드시 거쳐야 했던 교통의 요지였다.

 

 

현리에서 이 고개를 넘어면 금강 역S자의 끝인 원동리가 나온다.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 일대

 

필자는 원동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심천면 소재지 가는 지탄리로 향했다. 이천대교에서 바라 본 금강 상류 남쪽 방향. 금강의 물길은 남에서 북으로 역류한다. 이곳 이천대교 지점이 동서 역S자의 끝 부분이다.

 

이천대교 북쪽으로 경부고속철이 금강을 지나고 있다.

 

이천대교 서단에 천연기념물 금강의 어름치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다.

 

이천대교 부근에서 금강 상류 방향을 바라보다.

 

옥천군 이원면 지탄리 지나 낮은 고개 하나를 넘어면 영동군 심천면 구탄리가 나온다. 고개 넘자마자 차를 세우고 금강 상류 방향(남쪽이자 심천면 방향)을 바라 보았다. 사진 좌측 세번째 능선이 초강과 영동천을 가르는 능선이며, 이 능선 넘어에는 역사적 현장인 핏골이 나온다.

 

금강 하류 방향. 이 절벽의 오른쪽 봉우리가 송이봉(224.5m)이다. 금강의 물길은 이 절벽에 부딪혀 남족으로 크게 U자를 그리며 이천대교 아래로 흘러간다.

 

경부고속철이 구탄고가에서 한번 더 금강을 건넌다.

 

남쪽의 금강 상류 방향

 

묘지 부근에서 다시 금강 상류 방향을 조망한다.

 

낚시터 부근에서 바라 본 금강 상류.

 

금강 하류 방향. 서쪽으로 월이산이 보인다. 정면의 우측봉이 송이봉이다.

 

낚시터 부근에서 바라 본 서쪽 방향

 

강건너 심천 구탄리 날근이 마을. 좌측으로 경부고속철이 세번째로 금강을 지나간다.

 

심천면 소재지 남쪽을 흐르는 초강. 정면(동쪽) 능선이 초강과 영동천을 분기하고 있다. 능선 너머 마을이 각계리 핏골이다.

 

경부고속철이 금강을 지나고 있다. 이곳은 초강과 금강이 합강하는 지점이다. 초강의 물길이 금강으로 나가고 있다. 이곳이 바로 핏골 전투가 벌어진 피아간의 혈전의 현장이다.

 

초강

 

심천면 유래비

 

신라땅이면서 백제와 상계하여 치열한 전쟁을 치룬 군사요충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금산 일대를 방어하려는 가야군과 서진하려고 금강을 도하하려는 신라군이 맞붙은 현장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곳에서는 북한군과 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형이 전투를 판가름하는 것 같다.

 

 

 

심천을 우리말로 '지프내'라고 표기하고 있다.

 

초강. 저 능선 너머로 가야군과 남부여군이 학살당한 핏골이 있다.

 

초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이 공원에 있었을 것이다.

 

 심천면 지프내공원에서 각계리로 향했다. 필자가 이원면 구집티 고개에서 심천면 각계리 핏골까지 온 길은 신라군이 관산성 일대로 진출했던 길을 역으로 온 것이다.(물론 신라군은 옥천군 청성면 저점산성에서 보정천을 따라 관산성을 들어갈 수도 있다.) 아무튼 이 길을 가야나 남부여군이 장악한다면 관산성의 후방이 공격 받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신라군 입장에서는 이곳 심천면 방어가 중요했다. 그리고 이곳은 양산과 금산 방면으로 나갈 수 있는 중간 지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곳에 주둔한 신라군을 양산 방면의 가야와 남부여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자 일단의 신라군이 출격을 했다. 그들은 삼년산성과 옥천군 청성면의 저점산성을 거쳐 당재나 장군재를 넘어 초강 유역으로 진격하였다. 그들의 진격은 매우 은밀하여 가야나 남부여군이 알지 못했다. 이때 영동천 일대에서 접전을 펼치던 신라군이 짐짓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승리로 착각한 가야와 남부여군은 신속히 영동천 상류로 진출하였다. 지금의 4번 국도와 같은 길로 영동읍 방향으로 진격한 것이다. 그때였다. 퇴각하던 신라군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전면전 양상을 띠며 맹공을 퍼부었다. 가야와 남부여군 지휘부는 매복임을 직감하고 아차하여 서둘러 영동천 하류로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그때 은밀히 초강 방면으로 진출했던 일단의 신라군이 금강과 영동천 합강 지점을 가로막고 맹공을 퍼부었다. 퇴로가 차단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토끼몰이가 시작되었다. 가야와 남부여군이 선택한 길은 지금의 핏골인 각계리 골짜기로 도망치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막다른 길이었다. 신라군의 일방적인 학살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필자가 추정한 핏골전투의 전말이다. 핏골전투의 패배는 신라가 영동군 양산면 일대까지 진출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 인해 금산 일대가 흔들리자 관산성 전쟁은 남부여의 패배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관산성 전쟁 이전에 핏골전투의 패배가 대회전의 방향을 어느 정도 결정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심천면 각계리 핏골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원과 척을 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뭇 가야와 남부여 군인들의 잔상이 떠올라 마음이 애달파진다.

 

 

 

신라 진흥왕 15년 백제가 신라 관산성을 공격했다가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또 격전을 치렀는데 핏골에서 백제군이 전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아무튼 핏골전투가 <삼국사기>에서 사라진 것은 유감이다. 관산성 못지 않은 요충지를 둘러싼 전쟁인데... 그리고 주력은 가야군이 감행한 전쟁으로 보이는데... 하긴 남부여의 백골산 전투도 기록되지 않은 마당에 하물며 가야의 핏골 전투를 기록할리 만무하지...

 

경부고속철이 마을 입구 위를 지나고 있다. 핏골 입구는 교통의 요지이다. 지금도 경부고속철과 경부선이 지나고, 대전과 대구를 잇는 4번 동서 국도가 지나지 않는가? 고대에도 이곳은 동서 교통의 요충지로 심천의 지형을 보면 큰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았던가. 근자에도 한국전쟁 당시 대전에서 패배한 미군이 철수하며 영동읍을 방어하기 위해 핏골 부근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려고 방어선을 구축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 영동전투에서 패배한 미군이 황간과 추풍령 방면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주민을 북한군 첩자로 인식하고 노근리에서 학살했던 만행이 자행된 곳이다.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경부선 철로. 저 지하도를 통과하면 영동천이 나온다. 영동천을 건너면 4번 국도가 지나간다.

 

핏골 들어가는 어귀

 

영동군 영동읍과 용산면을 잇는 19번 국도로 나가는 길이다. 이 골짜기 마을 이름들이 이채롭다. 분통골도 있고 비탄도 있다. 한자로는 잘 모르겠으나 어감이 핏골 전투의 결과와 일치하는 이름이다.

 

보호수

 

교통 표지판

 

보호수

 

 

 

지하도를 통과하면 영동천(상류방향)이 나온다. 저 다리로 4번 국도가 지나간다.

 

핏골 들어가는 임구. 경부선과 고속철이 상하로 지나가고 있다.

 

영동천 하류. 금강으로 합류한다. 이 부근에서 가야와 남부여군의 퇴로를 막고 양 방향에서 협공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핏골로 퇴각하다가 토끼몰이를 당해 완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동천과 영동읍 가는 길. 영동읍~황간면~추풍령은 고대에도 동서 교통로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핏골에서 나와 4번 국도를 타고 약목사거리(영동천과 금강의 합강 부근)에서 좌회전하면 505번 지방도가 나온다. 심천에서 금강 동안을 따라 남쪽(금강 상류 방향)의 양산가는 길이다. 금강변 드라이브 코스로 좋은 길이다. 가야와 남부여군 일부는 이 길을 따라 심천 일대의 신라군을 공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관산성 전쟁은 총 4방면에서 충돌하였다. 첫째가 심천면이며, 둘째는 이원면 밤티를 넘어 소리산현의 치소인 이원리산성(현리산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째는 금산면 추부 일대 및 옥천읍 관산성 일대이며, 넷째는 백골산을 위시한 대전 동부 능선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전쟁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때 가야군이 담당한 전선은 심천면과 이원면 일대의 전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호교 부근에서 금강 하류를 조망하다. 좌측 봉우리는 국사봉(502.4m)이다.

 

금호교 부근의 금강 상류

 

 

 

금호교 부근의 505번 지방도. 교통 안내판이 남북으로 심천과 양강을 표시하고 있다.

 

금강 서안의 사루봉과 어류산

 

심천면 명천리 기호나루터 부근

 

시루봉과 어류산

 

양강면 구강교 부근에서 바라 본 금강 하류 방향

 

금강 상류 방향

 

멀리 보이는 산이 양산의 진산인 비봉산이다. 비봉산에는 신라 조비천현의 치소인 비봉산성이 있다고 한다.

 

 

 

 

 

금강 하류 방향

 

 

 

양강면 두평리 부근 들판

 

금강 상류 방향

 

양강 두평리 들판

 

외마포 삼거리 부근

 

관방수림 뒤가 양산면 봉곡리 자라벌로 불리는 곳이다.

 

양산면의 진산인 비봉산이다. 이곳이 고대에는 가야의 땅이었다가, 신라가 핏골 전투 이후로 장악하여 길동군의 영현인 조비천현을 설치한 곳이다. 비봉산에는 조비천현의 치소인 조천성(비봉산성)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