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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가야 폴리스 기행

보라국 : 영산강 하류의 가야 폴리스를 가다(1)

<2010년 8월 7~8일>

 

보라국이 사서에 기록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영산강 유역 가야 폴리스를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제10대 나해왕 17년 임진(212)에 보라국(保羅國)·고자국(古自國)[지금의 고성]·사물국(史勿國)[지금의 사천] 등 여덟 나라가 힘을 합하여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으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하였다.  -중략-  10년 을미에 골포국(骨浦國)[지금의 합포] 등 세 나라 임금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갈화(竭火)[아마도 굴불로서 지금의 울주이다]를 공격하니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하였다.  -중략-  물계자가 그의 처에게 말하기를 ‘저 보라[아마도 발라(發羅)로서 지금의 나주이다]와 갈화 때의 전투야말로 진실로 나라의 어려운 고비였다.’” <삼국유사 피은 제8 물계자조>


<삼국유사 피은 물계자조>에 따르면, 212년 보라국 등 포상 8국이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스님은 보라국을 발라군의 전신으로 추정하여 지금의 나주로 보았다. 그리고 물계자는 처에게 말하면서 ‘보라와 갈화의 전투’라고 하며 212년 포상 팔국의 대표체로 ‘보라’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보라국의 영역은 어느 정도일까?


금산군(錦山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나주목(羅州牧)이다. 령현(領縣)은 3개이다. 회진현(會津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두힐현(豆肹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철야현(鐵冶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실어산현(實於山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여황현(艅艎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수천현(水川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


<삼국사기 지리조>를 보면, 발라군에는 3개의 영현이 있다고 한다. 백제의 두힐현, 실어산현, 수천현이 그것이다. 고대 지방 행정 체계에서 군과 영현은 동질적인 문화 권역으로 인식되는 바, 초기 보라국의 영역도 발라군의 영역과 비슷한 것으로 유추된다.

물론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보라국을 <삼국유사>의 저자와는 달리 발라군 즉 나주 지역이 아닌 경남 남해 연안의 가야 폴리스로 추정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고분에 들어있는 유물은 타임캡슐이다. 고분이 만들어진 시대의 생활상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관념까지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고분 속의 미시적인 유물도 중요하지만, 고분양식이라는 거시적인 조성방식은 문화·정치적 세력을 구분하는 척도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기록상으로 영산강 유역은 단 한 번도 일국의 도성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일대에 대략 500~600여기 가량의 고분들이 즐비하다. 특히 고분 속에는 관으로 사용한 옹관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다른 지역의 고분 양식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이를 두고 고고학계에서는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 세력’으로 부르기도 한다. 물론 옹관묘가 영산강 유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황해도 일부와 경기 이남 전 지역에서 해안을 따라 고루 분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영산강 유역을 주름잡았던 문화·정치세력을 유독 옹관묘 세력으로 부르는 까닭은 옹관의 풍습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은 6세기 중반까지 이어졌으며, 매장 풍습도 옹관 하나를 묻고 봉분을 만든 다음 그 뒤로 옹관을 묻고 또 묻는 식의 다장(多葬)이라는 점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며, 사람 키보다도 큰 2m 이상의 대형 옹관이 출토된다는 특징 때문이다. 즉 고고학적으로 영산강 유역이 옹관묘 양식의 최고 정점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의 최초 옹관묘의 주인들은 누구인가? 필자는 기록상에 등장하는 보라국 내지 발라국 사람들이라고 추정한다. <삼국유사 피은 제8 물계자조>에 나오는 보라국이 바로 대표적인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 세력으로 사료된다. 보라국은 이미 영산강이라는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에서 고대 국가 단계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212년 해상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가야 폴리스 내부 전쟁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처럼 보일뿐 실제 보라국은 낙동강 유역의 어떠한 가야 폴리스보다도 힘의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212년 전쟁은 일명 포상팔국전쟁으로 마치 사로국 대 포상팔국의 대결로만 기술되어 있으나, 그 저류를 천착해보면 낙동강 유역의 가야폴리스들과 영산강 유역의 가야 폴리스들간의 대결 양상이 짙다. 가야 폴리스의 하나였던 석씨의 사로국도 낙동강 유역의 가야 폴리스에 참전하여 보라국과 전쟁을 하였을 것이다. 실제 남해 연안의 가야 폴리스들은 대부분 보라국 편에 참여하여 전쟁을 벌였다. 이는 사로국을 비롯한 낙동강 연안의 가야 폴리스들이 영산강 유역의 가야 폴리스들과 전면전을 벌일 정도로 성장한 것을 의미한다.

남부여의 성장과 남하에 따라 보라국도 남부여로 편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나주 복암리 고분과 반남고분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부여는 보라국을 발라군과 3개의 영현으로 편입시켰다.

 

작년 여름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가야 폴리스 보라국 이곳 저곳을 답사하였다. 하지만 선뜻 답사기를 올리는 것은 무리였다. 보라국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미룰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시론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영산강과 나주 가야산 전경

 

나주에는 나주 곰탕, 구진포 장어, 영산포 홍어가 유명하다. 장어로 유명한 구진포 나루에서 영산강과 나주 가야산을 바라보고 있다. 가야산은 나주에도 있다.

 

영산강이 서류(西流)하고 있다.

 

영산강

 

구진포 나루에는 빈 배만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구진포에서 다시면 복암리 고분 가는 길 중간에 회진성이 있다.

 

회진1구(사직마을) 마을회관

 

마을 유래비. 회진성은 백제 두힐현의 치소로 추정된다.

 

회진성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사직마을 계곡을 감싸는 낮은 산지에 판축한 포곡식 토성이다. 둘레가 2.4km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며, 계곡 방향 판축 성벽 중간에 남문지가 확인되었다. 인근에 복암리 고분군이 있어 가야 폴리스인 보라국의 유력한 도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물론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성과 반남고분군도 보라국의 도성 후보라고 할 수 있다. 사직 마을을 감싸는 산 능선을 동에서 북으로 조망해 보았다.

  

회진성은 좌측 된비알 능선부터 시작될 것으로 추정된다.

 

회진성은 사진에서 보이는 봉우리에서 시작하여

 

좌측 마을 뒷편 북쪽 봉우리 사이의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으로 추정된다. 실지 답사는 못해 추정할 뿐이다.

 

사직마을에서 남녁을 바라보니 영산강 너머 영암 월출산이 보인다. 영산강 하류의 나주벌이 광대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나주에서 영암 월출산까지 산 구릉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진성에서 자동차로 3분여 거리에 복암리 고분군이 있다. 남부여 진출 전의 회진성 주인공들이 묻힌 곳이다.

 

남쪽으로 영산강 너머 월출산이 보인다. 보라국의 영역은 월출산이 보이는 나주평야 전 지역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안내문

 

고분군 북방

 

고분군 북방

 

 

 

월출산과 고분

 

 

 

 

 

 

 

 

 

 

 

 

 

 

 

고분과 복암리 강암 마을. 그 뒤편 동쪽 너머가 사직마을로 회진성이 있다.

 

영산강 평야와 월출산

 

 

회진성과 복암리고분군 답사를 마치고, 보라국의 또 하나의 도성터로 추정되는 자미산성과 반남고분군을 보기 위해 나주시 반남면 소재지로 향했다.

반남면소재지 북쪽 산이 자미산이다. 영산강에서 월출산까지는 영산강 평야가 뻗어 있다. 이 일대에는 산 구릉이 거의 없는데, 나주시 반남면에는 해발 55m에 이르는 자미산이 있어 고대 보라국 지배층이 이곳에 산성을 쌓았던 곳이다. 그리고 주변 평지에 고분을 축조하였다. 그런데 그 숫자가 놀라울 정도로 많다. 아마 반남면 일대가 한반도 최대의 고분 산포지일 것 같다.

반남면은 옹관묘 문화의 원향으로 불릴만하다. 필자는 일본 천황가의 비조라 사료되는 경남 거창군 가조분지의 고대 고천원 세력을 축출하고, 2기 천황가를 형성한 인덕천황 세력의 선조들이 머물렀던 원향이 반남면 일대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그 이유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 6호분, 덕산리 2호분과 일본 최대의 고분인 인덕천황릉이 전방후원분으로 동일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분 주위에 도랑을 판 것이나 무덤 경계로 붉은 원통형 토기(하니와)를 두른 것이 동일하다. 물론 이는 단정할 수 없고 현재로서는 역사적 추론일 뿐이다. 

 

자미산성 가는 도중에. 복암리 고분군 서쪽을 흐르는 문평천의 남쪽. 월출산이 보인다.

 

반남면 소재지 전경

 

반남면 소재지 좌측에 자미산성 등산로 입구가 있다.

 

 

 

산성 안내문

 

회진토성 옆에는 복암리 고분군만 있지만, 자미산성 일대는 많은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아마 반남면 일대가 반도 최대의 고분 산포지일 것이다.

 

영산강 동쪽의 고분군 산포지

 

자미산성 측량도

 

 

 

 

 

 

 

산성 둘레가 680m 정도이다.

 

 

 

산성 오르는 입구

 

산성 오르다 우측 길에는 자미정이 있다.

 

산책로

 

편안하다.

 

서쪽의 대안리 고분군

 

 

 

 

 

동쪽

 

산성 부근에 다다랐다.

 

안내문

 

이정표

 

산성 오르는 길. 자미봉 전망대 가는 길.

 

남벽

 

남족으로 월출산 자락이 보인다.

 

자미산 천지단

 

월출산

 

월출산 서쪽

 

월출산

 

 

 

영산강 이남과 월출산 이북이 나주평야 지대이다. 자미산성이 위치한 반남면 일대는 그 중간이다. 그리고 영산강 뱃길로 가장 빨리 서해안으로 나가기도 편하다. 그래서 이곳 자미산성이 보라국의 도성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전망대. 2006년도 방문시에는 없었는데...

 

자미봉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 본 주변. 솔직히 방향은 모르겠다.

 

남쪽

 

남쪽의 월출산.

 

 

 

 

 

 

 

 

 

동쪽 (덕산리 고분군 방향)

 

우축이 반남초등학교. 이 일대가 반남 고분군이다.

 

 

 

북쪽 나주시 금성산 방향. 나주가 금성으로 불린 것이 묘하다. 금성은 가야나 신라 김씨의 도성을 의미한다. 이는 보라국이 가야 폴리스임을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미산성 서쪽으로 기억된다. 서쪽이라면 멀리 보이는 좌측 산이 무안의 승달산일 것이다.

 

 

 

평야지대. 영산강 유역의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보라국은 가야 폴리스 최대 세력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보라국은 영산강이라는 천혜의 수로와 서해라는 해상 수로가 교차하는 곳으로 보라국은 사료가 적어서 그렇지 낙동강 하류의 가야 폴리스들을 압도하였을 것으로 평가된다. 보라국이 아마도 포상팔국전쟁의 중요한 한 축이라고 추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하게 말해 보라국 일파가 낙동강 하류에 진출하여 지금의 가야를 만들지 않았을까도 상상해 본다.

 

 

 

월출산

 

월출산 동쪽 부근의 능선

 

 

 

서쪽의 대안리 고분군으로 기억된다.

 

좌측으로 서쪽의 무안 승달산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산성 답사를 다시 시작한다.

 

자미산성은 두 봉우리를 연결한 산성이다. 봉우리 중간이 말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마안(馬鞍)형 산성이라고 한다. 필자가 서있는 지점이 마안(말안장)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자미봉 언덕을 바라 본 것이다.

 

자미산성은 자미봉과 하늘봉을 감싼 마안형 산성이다.

 

하늘봉 일대 평지. 사실 자미산성은 초미니 마안형 산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전형적인 마안형 산성의 마안은 양 봉우리와 고도차가 많이 난다.

 

산성 동벽 아래 산책길

 

 

 

 

 

자미산성 하산길에 바라본 바위. 당시 보라국 사람들의 숭배 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미산에 있는 유일한 큰 암석으로 보인다.

 

신촌리 고분군에서 바라본 자미산성 전경. 자미산성이 과연 보라국의 도성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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