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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가야 폴리스 기행

함평천 유역의 무명 가야 폴리스를 찾아서(2) : 죽암리 고분, 용성, 철성

<2010년 6월 20일>

 

기산산성 답사를 마치고 23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치달아 서해안고속도로 함평나들목 지나면 함평고등학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함평고등학교 막 지나고 나면 금산삼거리에서 함평군 손불면 소재지 가는 20번 군도로 좌회전 하여 1분여 가면 신비의 죽암리 고분이 나온다. 이 일대에서는 고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죽암리 고분을 장고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언덕) 외형이 국악기 중에서 장고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암리 고분과 가까운 곳에는 마을 이름도 장고산 마을이 있다.

 

죽암리 고분 일명 장고산 고분은 일본 천황가의 전방후원형 고분들의 원형으로 이해하는 고고학자들도 있다. 일본 천황가와 함평천 일대 무명의 가야폴리스나 남부여 굴내현의 수장층들간의 혈연적 친연성도 언급하는 학자도 있다. 물론 함평천 일대 남부여 고분 축조 기술자들이 열도로 건너가 천황가의 고분 축조를 담당했을 개연성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열린 마음으로 이 죽암리 고분을 대했을 때, 전해오는 신비감은 유월의 찌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필자가 함평천 상류 지역의 대동면 용성리 용성을 가야 폴리스의 치소 내지 남부여 굴내현의 치소로 주장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즉 이 주변 지역이 고분 산포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방후원형의 장고분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 일대가 남부여의 세력 확장으로 가야 폴리스로서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지배층이 열도로 귀의한 사실을 방증한다. 장고분의 연대를 5~6세기로 추정하는 바, 이는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가야 폴리스가 아직까지 남부여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컷에 고분 전체를 담을 수가 없어 삼분하여 담았다. 오른쪽에서부터 시작~

 

 다음

 

끝부분

 

 길 건너편에서 조망하려고했으나 여기서는 양분해서 담았다.

 

 다음

 

 안내판

 

 내용. 전방후원분은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근 고분을 말한다.

 

 

 

 

 

 고분 옆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동쪽에서 찍은 후원 모양

 

 

 

 각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찍어 보았다.

 

 

 

 

 

전방(앞은 네모나다)의 모습

 

 후원(뒤는 둥글다)의 모습

 

 

죽암리 고분을 감상하고 난 후 무명 가야 폴리스와 남부여 굴내현의 치소로 비정되는 함평군 대동면 용성리 금성마을로 향했다. 죽암리고분에서 금성마을로 가려면 23번 국도 지하통로를 통과해서 함평고등학교 아래 도로를 통해 함평천을 건너면 금성산의 지맥이 남북으로 필자를 가로막고 나선다. 용성(금성산성)이 있는 금성산 지맥이다.

 

 함평고등학교 옆의 고분. 이따 금성마을 답사 마치고 다시 와야겟다.

 

함평영화학교. 함평고등학교 옆에 있다. 앞 구릉에 고분이 있다.

 

 함평천 상류

 

 

 

 금성산성의 전경이 보인다. 과거에는 용산으로 불린 듯하다. 산의 형국이 용을 닮은 듯하다.

 

 함평천이 대동평야를 적시며 남으로 흘러 합평읍까지 이른다.

 

 금성산 줄기가 남북으로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남쪽 계곡을 막아 포곡식으로 축조한 금성산성이 있었다. 남부여 굴내현의 치소로 추정된다.

 

 함평천을 건너 동서로 가다보면 남북으로 금성산 지맥이 가로막고 나선다. 처음에는 뒤 산줄기가 용성이 있는 금성산이라 생각했는데, 앞산이 금성산 산줄기이다. 산줄기 끝 부락이 구룡마을인데, 금성산 줄기의 모양이 뱀이나 용이 크게 또아리를 틀고 형국처럼 보이며 구룡마을이 꼬리 부분으로 사료된다. 아무튼 금성산성은 용성으로도 불리는데, 모양으로 보면 금성산을 용산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고, 용산에 성이 있으므로 용성이라 불렸던 것 같고, 그 결과 이 일대의 지명이 용성리로 귀결된 것 같다.

 

 함평천을 따라 형성된 대동평야

 

 대동평야 가로질러 금성산 줄기에 부딪혀 길은 남북으로 나온다. 우회전(남쪽길)하면 구룡마을이 나오고 여기서 좌회전하면 금성마을로 가는 마을 길이 나온다.

 

 금성산 줄기

 

 함평 야구장이 있는 구룡마을에서 좌회전하여 금성부락 가는 길에 바라본 금성마을의 안산 봉우리. 금성마을 앞을 외곽에서 포근하게 감싸는 산줄기의 끝자락이다. 풍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금성마을은 진산인 금성산이 뒤에서 마을을 비호하며, 앞에서는 안산인 봉우리가 감싸안은 전형적인 명당 자리이다. 안산이 크게 마을을 감싸 안으므로 비옥한 토지가 넓으며 용연천의 물도 풍부하여 농사 걱정이 없는 곳이다. 그리고 북풍은 금성산이 막아주고 마을은 남방을 향하고 있어 배산임수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셈이다. 다만 산의 형국이 용의 기세를 닮았기에 심장이 약한 사람이 살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이도 용을 달랠 수 있는 대책을 보완한다면 완벽한 명당이 되겠다. 이곳이 고대 가야 폴리스의 중심지이거나 남부여 굴내현의 치소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다만 실지 답사를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답사문에 대해서는 남도일보의 김선기 기자가 쓴 '전라도 성' 시리즈에 연재된 '함평 금성산성 편'을 게재한다.

 

전라도 城(37)=함평 금성산성(金城山城)

 

-등임이 반드시 놀고 구경하고 즐김이 아니요/ 가는 말은 잠깐 쉬어 한가한 것을 빌림일세/ 긴 길은 북으로 가리역에 통하고/ 뜬 구름은 동으로 금성산에 잇닿았네/ 남풍이 베개와 댓자리는 속세를 벗어난 듯/ 긴 여름날에 누각이 푸른 나무 사이에 있네/ 석류꽃의 붉음이 한창이어서 나그네 그런대로 다시 한번 웃음일세.

함평 금성산성(金城山城)에 관련한 시 한 수다. 싯귀절을 음미하며 함평읍에서 북쪽으로 6km를 내달려 대동면 용성리 금성마을을 밟았다. 마을 복판을 가로지르면 해발 220.7m의 금성산을 끼고 도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의 모습이 나타난다. 성(城)은 금성산을 정점으로 북쪽으로 1개의 능선과 남쪽으로 두 개의 능선이 뻗어내려 금성동을 에워싸고 있다. 한줄기는 남쪽을 향해 거의 직선을 이루며 뻗어내려 마을 어귀 서편에 머물고, 또 한줄기는 동쪽 220m의 봉우리에서 남진하여 마을 어귀에서 매듭짓고 있다.

양쪽 산줄기가 머문 사이인 200m 가량의 남쪽은 평지로 대동평야와 연결된다. 금성산성은 산줄기와 계곡을 포용하여 쌓은 포곡식으로, 토축인 북벽의 50m 정도를 제외하고는 석축이다. 특히 금성산성은 전남 서해안 지대에 있는 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城의 축성과 폐성

금성산성은 언제, 누구에 의해 쌓아졌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농경지가 된 성안 이곳 저곳에서 고대 토기편이 수습되고 성안의 지명에 원님이 살았다는 ‘원터’, 죄수를 가두었다는 ‘옥터’등의 지명이 전해오고, 남쪽이 평지여서 산성이라기 보다는 읍성으로서의 조건을 더 갖추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성(城)은 그 이전에 현의 치소의 이음돌고분, 죽암리 장고형고분, 진양리 하느리고분, 대덕리 고양촌고분 등 대형 고분의 피장자 세력과 크게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 금성산성은 서쪽 지근에 영광군 군남면 대덕리에서 발원한 함평천이 남으로 흐르고, 해보면 용천사에서 발원한 대동천이 성의 동쪽을 감돌아 남쪽을 가로질러 외덕 마을 앞 들판에서 함평천과 합류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은 자연적으로 해자(垓字) 몫을 하고 있으며, 또 이들 하천에 근세까지 배가 드나들어 교통의 요로는 물론 천혜의 요새지였음을 알 수 있다.

금성산성은 언제 폐쇄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반퇴폐(今半頹廢)’라는 기술과 동국여지지에 ‘금진퇴비’라고 적혀있는 점으로 보아, 이 성은 1531년에 이미 반쯤 무너진 상태였음이 짐작된다.

◇성의 규모 및 현황

금성산성의 동벽은 금성 마을 초입에서 시작해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210m 봉우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구간에 비해 거의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 지역과 암벽으로 이어져 있어 암벽의 위나 암벽 사이에 보축하여 성으로 이용한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

동벽의 중간 지점은 속칭 동문터로 평편한 암반이 깔려 있으며, 암반에 기둥를 세웠던 흔적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여러개 확인되고 있다.

또 북벽은 동벽이 끝나는 지점으로 부터 금성산 정상부까지 네벽 중 가장 짧다. 동벽과 북벽이 갈라지는 지점에 장대지(將臺址) 또는 망루지(望樓址)였을 것으로 보이는 장방형의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길이 15x10m, 높이 1.5x2.7m 규모다.

북벽의 속칭 ‘뒷등’에는 북문이 설치되었다고 하나 현재 확인되는 것은 없다. 건물터에서 50m 가량 지나면 성이 내리막을 타는데 약 50m가 토성으로 쌓여있다. 서벽은 북벽이 갈라지는 지점으로부터 금성 마을 서편에서 능선이 멈추는 곳까지로 네 벽중 가장 길다.

남벽은 두 능선의 초입부를 직선으로 가로질러 연결하고 있으며, 지금은 민가의 중심부가 되어 훼손 상태가 심하다. 옥터라고 전하는 곳만 기단에서 3단까지가 보존되고 있고 성문터는 마을로 들어서는 큰길이 되었다.

금성마을 입구 담 밑을 통해 대동천과 만나는 지점까지 돌로 쌓은 수구가 있었으나 1970년대 말 농경지 정리를 하면서 그대로 메워졌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구들장이 수없이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 옛날 성 밖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 오재만 문화유산사진연구소장

 

구룡마을에서 금성마을 가는 도로. 덕산삼거리에서 대동저수지 옆의 수암소공원 가는 2번 군도를 타고 금성마을로도 들어올 수 있다.

 

 금성마을 어귀

 

 저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야 금성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오른쪽이 마을 정자이다. 보이는산은 금성마을 안산 줄기.

 

 마을 정자 부근에서 바라본 금성마을과 금성산 줄기

 

 마을 오른쪽 산줄기

 

 서남쪽으로(함평천 방향으로) 평야지대임. 남부여 굴내현의 경제적 여유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마을 왼쪽의 산줄기

 

 마을 정자와 금성마을 전경. 좌우의 산줄기가 금성마을을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다.

 

 마을 정면 농로에서 바라본 금성마을과 금성산 줄기. 금성산성은 포곡식 산성이다.

 

 오른쪽 산줄기

 

 왼쪽 산줄기

 

 마을 정면

 

함평영화학교 앞 구릉에 있는 고분을 보러 다시 함평읍 진양리로 향했다.

 

함평영화학교 운동장

 

함평 진양리 화동고분군

 

 전라남도 일대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지석묘(고인돌)을 비롯하여 고분의 형태가 다양하다. 이는 지배층의 변화가 어느 지역보다도 많았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전남 일대가 서해와 남해로 개방되어 있어 수많은 이방인들이 오가는 중간지대라는 특성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 주변도 주포라는 서해 최대의 항구가 있엇기에 많은 이족들의 왕래가 있엇으리라 사료된다.

 

 1호분. 가야 폴리스나 남부여 대 함평천 일대의 대동평야와 금성산성의 주인이 묻힌 곳이라 사료된다. 이곳에서는 함평천과 금성산성이 동쪽으로 시원하게 조망된다.

 

조그만 2호분

 

 1호분 전경

 

동남쪽으로 함평천과 대동평야가 조망된다.

 

 동방

 

 동북방. 소나무 사이로 금성산성(용성)이 조망된다.

 

 

 

 좌측 2호분, 중간 함평영화학교, 우측 1호분.

 

철성산성을 가기 위해 23번 국도를 타고 주포가는 양림삼거리에서 주인은 백반으로, 말은 LPG로 배를 채운다. 철성산성은 금성산성(용성)의 동남방 방어성으로 기능하엿을 것이다. 대동면 금곡리 나막마을 북쪽 뒷산이 철성산(262.6m)인 바, 이 산정을 감싼 테뫼식 산성이라고 한다. 함평천 유역의 굴내현에서 동쪽의 고막원천 유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간선도로가 철성산 옆을 지나간다. 따라서 용성을 동쪽의 외적으로부터 비호하기 위해 철성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 같다. 대동면 금곡리 나막마을을 가려면 함평읍 남쪽의 함평로타리에서 24번 국도로 갈아타야 한다. 24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가다가 월송리 동암마을 가는 길로 우회전하면 금곡리 나막마을 가는 도로가 나온다.

 백반집. 푸짐하고 맛있었다. 손님들로 북적였다.

 

금곡리 나막마을 가는 길에 바라본 철성산 자락

 

 철성산 가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법음사를 경유해 철성산 북쪽으로 오르는 길과 나막마을에서 철성산 남쪽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고 한다. 역시 실지 답사 계획은 없어 입구만 확인할 요량이다. 나막마을 가는 도로에 법음사 이정표가 있어 가 보기로 한다.

 

법음사 계곡은 좁지만 저수지가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저수지에서 조금 계곡을 올라가면 밭도 있다.

 

법음사 가는 길.

 

 법음사 주차장과 철성산. 주차장 옆 등산로로 철성산을 오를 수 있다. 건데 법음사는 사찰이라기 보다는 개인 주택이라는 느낌이 든다. 철성산이 손에 잡힐듯 가까워 답사의 유혹은 강했으나, 처음 와본 산을 6월 중순에 답사하려면 개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오전에 기산산성을 둘러본 터라 산행이 구미에 당기지도 않았고, 산책로가 수풀에 가려져 있다면 특히 뱀 한마리 정도와는 키스할 각오를 해야 한다. 오우 ~ 생각만 해도 ~ 올 늦가을 무렵 뱀도 땅속에 겨울잠 자고, 수풀도 말라 산책로가 보일 때 와야지 한다. 

 

법음사 계곡 

 

법음사 계곡을 나와 나막마을로 왔다. 지도상에는 남악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간이 정류소 도안이 나비 문양으로 되어 있어 보기에 좋았다. 함평은 지자체의 색깔을 확실히 표현하는 모범적인 곳으로 생각된다.

 

 나막마을 뒤 철성산. 바위산인 듯 군데 군데 암벽이 보인다. 철성산 위에 보루성을 쌓고 고막원천 유역에서 함평천 유역으로 넘어가려는 외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기에 적절한 듯하다.

 

 

 

 철성산 줄기는 동서로 이루어져 철성산 남북으로 긴 협곡을 만들어 철성산 남북 도로 모두를 이곳 철성산성에서 통제한 듯하다.

 

 나막마을 앞의 지석묘 공원

 

 

 

 

 

 

 

 

 

 

철성산성과 지석묘. 청동기 무렵 나막마을 근처에 제법 큰 취락이 있었던 것 같다.

 

 기이한 지석묘

 

 

 

 

 

 

 

 

 

 

 

 나막마을에서 나와 5번 군도로 합류해서 남부여 다지현으로 추정되는 함평 나산면 방향으로 가려고 북으로 달리다가 고막원천을 보기 위해 대동면 상옥리 옥동교로 나갔다. 고막원천의 아름다운 모습. 남부여 다지현은 고막원천 중류 근역을 배경으로 한다. 함평은 함평천 중상류의 굴내현과 고막원천 중류의 다지현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고막원천. 남쪽으로 아름다운 물길을 내며 다지현의 평야 지대를 적시고 잇다.

 

 

 

 옥동 마을 뒤편의 철성산 줄기. 동서로 맥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고막원천

 

 철성산 줄기

 

 옥동교. 옥동교도 나비 문양을 하고 있다. 함평과 나비가 각인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