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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가야 폴리스 기행

신라의 전신 소문국을 가다 : 탑리5층석탑(국보)과 금성산 고분군

<2010년 7월 10일>

 

무려 1800년 동안 신라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잊혀져 버린 고대 가야 폴리스가 있다. 지금의 의성을 중심으로 경북 중부지역 일대를 주름잡았던 소문국이 바로 신라 탄생의 비화를 간직하고 있다. 한자로 표기된 '召文國'을 '소문국'으로 읽는지 '조문국'으로 읽는지 학자에 따라서 엇갈리고 있지만, 필자는 '땅이름 소'로 읽어 '소문국'으로 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의성군 홈페이지나 향토사학자들은 어감상 '조문국'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고 여겨 한글 표기를 '조문국'으로 하는 것 같다(참고로 '소문'은 여성의 음부를 지칭한다). 허나 이 또한 역사의 실체를 왜곡할 수 있으므로 고대음에 가까운 중국어 'shào'의 발음을 존중하여 '소문국'으로 부르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삼국사기>에는 '소문국'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벌휴이사금 2년(185년) 2월에 파진찬(波珍湌) 구도 (仇道)와 일길찬(一吉湌)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군주(軍主)의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서라벌 석씨 왕조는 하나의 가야 폴리스에서 벗어나 정복 전쟁을 벌이며 고대 국가로 성장하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결과물이 바로 경북 중부 일대의 패자였던 소문국과의 정복 전쟁이었다.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형산강 유역을 장악한 석씨 왕조는 낙동정맥을 넘어 낙동강 중류 유역으로 진출하려 하였다. 다행히도 그 과정을 잘 설명해주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파사이사금 23년(102년) 가을 8월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그에 대한 결정을 요청했다. 왕은 이를 곤란하게 여겨 ‘금관국(金官國)의 수로왕(首露王)이 연로하고 지식이 많다.’라고 하고서 그를 불러 물었다. 수로왕이 논의를 일으켜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했다. 이에 왕은 6부에 명해 함께 모여 수로왕에게 향연을 베풀도록 했다. 5부는 모두 이찬(伊湌)으로 접대를 주관하게 했으나,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자로 이를 주관하게 했다. 수로왕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해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 종은 음즙벌의 우두머리 타추간(陀鄒干)의 집으로 도망해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는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정벌하니, 그 우두머리와 무리가 스스로 항복했다. 실직(悉直)·압독(押督)의 두 국왕이 항복해 왔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양주(良州)조>에 따르면, 음즙벌국이 음즙화현(音汁火縣)이 되었고, 그곳이 안강현(安康縣)에 속하였다고 한다. 곧 음즙벌국은 지금의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일대에 에 있었던 가야 폴리스였던 것이다. 한편 실직곡국(悉直谷國)은 일명 실직국(悉直國)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일대에 있었던 가야 폴리스였다. 기록에 따르면 두 폴리스는 2세기 전후 무렵 경북의 동해안 북부 유역을 두고 다투다가 서라벌에게 결정을 요청했지만 파사이사금은 무엇 때문인지 금관국 수로왕에게 결정을 미루었다. 이 대목은 초기 가야 폴리스의 정치지형, 외교관계, 군사에 대해 많은 시사점들을 농축하고 있다.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초기 가야 폴리스들의 많은 비밀을 밝힐 수도 있으리라 사료된다. 아무튼 금관국의 입김에 따라 음즙벌국에게 손을 들어 주었지만, 서라벌 내부에서는 이러한 수로왕의 결정에 대해 불만 세력이 있었던 것 같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인데, 파사이사금이 수로왕을 위해 베푼 향연에 이찬 보다 지위가 낮은 인물을 보내 접대를 주관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수로왕은 종 탐하리를 시켜 보제를 암살하였다. 이때 탐하리는 서라벌을 견제할 수 있는 음즙벌국의 왕 타추간에게 의탁하였는데, 서라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타추간은 탐하리를 서라벌로 보내지 않았다. 이를 기화로 서라벌의 파사이사금은 친 수로왕의 가야 폴리스인 음즙벌국을 정벌하였다. 이때 서라벌의 군사적 위세에 눌린 주변 가야 폴리스들인 실직(悉直)과 압독(押督)도 항복하였다. 이 기사는 수로왕 우위의 시대에서 서라벌 파사이사금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기록한 사실로 보인다.

 

특히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 강역 다툼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던 압독국까지 사로국에게 항복한 것이다. 압독국은 일명 압량소국(押梁小國)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경북 경산시 일대에 있었던 가야 폴리스였다. 이는 사로국이 이미 낙동정맥을 넘어 낙동강 지류인 금호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의 기록과는 달리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지마이사금(재위 112~134년) 대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나와 있다. 압독국의 중심지는 ‘금호강 유역의 들판을 낀 남천 사이의 구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한 사로국은 북으로 낙동강 상류와 남으로 낙동강 하류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북으로는 소문국이 있었고, 남으로는 이서국이 있어 신라국의 영역은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이를 타개한 이가 바로 벌휴이사금이다. 앞의 <삼국사기> 기사를 재인용한다.

 

"벌휴이사금 2년(185년) 2월에 파진찬(波珍湌) 구도(仇道)와 일길찬(一吉湌)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군주(軍主)의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기사에서 주목해야 될 인물이 있다. 바로 파진찬(波珍湌) 구도(仇道)이다. 파진찬은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구수혜(仇須兮)의 관위인 일길찬(一吉湌)은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이로 보면 좌군주인 구도가 소문국 정벌의 총사령관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좌군주인 구도는 누구인가?

 

구도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나중에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아버지이다. 아달라이사금 19년(172)에 파진찬에 올라 벌휴이사금 2년(185)에는 좌군주(左軍主)로서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고, 같은 왕 5년(188)과 6년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다음해(190년) 와산(蛙山)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미추왕이 즉위 2년(263년)에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 바로 구도는 신라 김씨 왕조의 중시조격인 인물이다.

 

고대에는 정복한 땅을 혁혁한 공을 세운 이에게 식읍으로 하사하는 것이 관례임을 볼 때, 아마도 소문국은 좌군주 구도에게 통치를 위임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에 따르면, 지증마립간 6년(505년)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은 것이 처음이라고 하였다. 물론 실직주의 군주 이사부는 주(州)의 장관으로서 행정과 군사를 총괄한 것이 분명하지만, 벌휴이사금 대의 구도가 이사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군주(軍主)의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정복 후 2~3년간은 소문국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비록 190년 백제와의 와산 전투에서 패하여 부곡성주로 좌천되기까지는 소문국과 어떠한 관련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정사와는 달리 <미광(微光)>이라는 사료집에는 소문국의 역사적인 활동까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국내는 평온이 계속하야 민강부국한지라 경덕왕(敬德王)은 인국(隣國)을 정벌할 대계(大計)를 세우고 엇든 날 군신을 집회하고 적라(今 軍威軍에 잇더 나라)를 정벌할 군략(軍  )을 모의한즉 ………, 왕이 드디어 김장군으로서 선봉을 삼아 ……, 그 일족 중 굴지(屈指)하는 김운용(金雲龍) 외 28명의 호걸을 다러고 적라국 토벌의 도(途)에 취(就)하다 …… 적라를 대파하고, 그 땅을 召文(소문)의 영지로 하니 ……”

 

김완수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광>은 잡기(雜記)로 오인될 정도의 어색한 표현과 체제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자를 들먹이는 이유는 혹시나 이글의 저자가 인용하였을 원전(原典)이 어디엔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남당 박창화선생의 신라사초(新羅史抄)의 역주(譯註) 글에서는 소문국(召文國, BC 128~AD 245.2)의 1대 예왕에서 마지막 22대 묘초(왕)까지의 왕명과 제위기간 등을 밝히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물론 경덕(景德)왕과 운모(雲帽)공주의 기록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소문국 사료집 ‘미광’에 나오는 경덕왕(敬德王; 한자가 틀린다)과 운모 김씨 세력의 존재는 모두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광>에 대한 기사가 완벽한 허구(fiction)라고는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김완수 교수는 구도가 소문국을 정벌했다는 185년의 사건을 다른 각도로 해석을 해 역사적 상상력을 풍부케 한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유적, 유물에 의하여 소문국의 멸망시기를 서기 185년보다 늦은 3~4세기경으로 설정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러한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구도의 소문국벌(召文國伐)’은 소문국의 국읍인 금성을 침공한 것이 아니고 적라세력의 본거지인 적라산을 정벌한 사실로 이해하고자 한다. 역사학계의 연구결과 소문(조문)국의 김씨세력(집권세력)과 신라의 김씨왕조 세력은 같은 혈연관계라고 보고되어 있다. 따라서 같은 부족(씨족)사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희생양으로 적라를 공격하게 된 것이 아닐까. 물론 당시의 적라는 ‘미광’에 의하면 김운룡을 따르는 28명의 장수에 의하여 정복되어 이미 소문국의 강역에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설정은 가능하리라 본다.”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다. 아무튼 소문국은 구도가 정벌 전에 이미 신라 김씨와 혈연적 관계에 있었던 아니면 정벌 후 구도의 후손들이 실력을 양성한 토대가 되었던 신라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 완성의 근거지였음을 확신케 한다.

 

 

 

 

 

 군위읍에서 927번 지방도를 타고 의성 금성면 소재지로 향했다. 위천의 지류인 쌍계천 청로교 부근에서 금성산(530.1m)이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위용을 드러낸다.

 

 

 한컷 더! 오른쪽 뒷산은 수정사 뒷산인 비봉산(671.8m)이다.

 

 

 금성면 소재지 메인 도로 중간쯤에 오층석탑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70년대 풍 서울세탁소가 눈에 확 들어온다.

 

 

국보 제77호 의성 탑리 오층석탑이다.

 

 

안내판. 경주 분황사 석탑 다음으로 오래된 석탑이다. 전탑(벽돌탑)의 수법을 모방하였으며, 목조 건물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석탑이다.

 

 

 오늘 답사할 금성산성과 고분군에 대해서 곁들여 안내판은 설명하고 있다.

 

 

 

 

국보급 5층 석탑 감상할 시간입니다. ~ ~

 

 

 

 

 

 

 

 

 

 

 

 

 

 

 탑에서 동쪽으로 금성산이 조망된다.

 

 

 탑 후면

 

 

 

 

 

 탑 정면

 

 

 

 

금성산 고분군으로 발길을 옮긴다. 의성읍 가는 28번 국도를 타고 대리삼거리 지나 언덕을 오르면 바로 '소문국 사적지'라고 쓴 큰 비석 하나가 보인다.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길 건너편에서 보아야 잘 보인다. 들인 것에 비해 간판 역할은 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주차장 앞의 고분군 안내도

 

 

 

 

 

 주차장에서 바라 본 고분 전경

 

 

 

 

 

 

 

 

 금성산 고분군에 대한 설명

 

 

 고분군 조망대 옆에는 문익점 면작 기념비가 있다.

 

 

 면화밭

 

 

면화는 어릴 때 보고 처음 보는 것 같다.

 

 

 문익점 면작 기념비

 

 

 비문

 

 

 조망대에서 바라 본 고분 공원

 

 

조망대에서 바라 본 1~6호분

 

 

 6호분 부터

 

 

 

 

 

 길 옆으로 금성산이 보인다.

 

 

 6호분

 

 

 

 

 

 5호분

 

 

 금슬 좋은 5호분과 6호분

 

 

 

 

 

 5호분, 6호분 나란히 ~ ~

 

 

 3호분

 

 

 

 

 

1호분 (경덕왕릉)

 

 

 의성현령의 꿈에 나타나 경덕왕릉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소문국 경덕왕릉

 

 

2호분과 4호분은 발굴 조사 진행 중인 것 같다.

 

 

 16호분

 

 

 그 흔한 숫자 하나 표기되어 있지 않은 무명분 

 

 

 18호분

 

 

 

 

 

 

 

 

 

 

 

 

 

 

 고분군을 거닐다 보면 삶과 죽음도 자연의 일부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언이 생각난다.

 

 

 34호분

 

 

 34호분

 

 

 

 

 

 

 

 

 

 

 

 36호분

 

 

 

 

 

 37호분

 

 

 

 

 

 33호분

 

 

 

 

 

 소문국의 주인공들은 김씨왕조의 신라 건국의 비밀을 안고 1500년 동안 잠들어 있다.

 

 

 

 

 

 35호분

 

 

 

 

 

 25호분

 

 

 

 

 

 20호분

 

 

 

 

 

 19호분

 

 

 

 

 

 

 

 

 

 

 

 고분군에서 북쪽으로 28번 국도 가는 방향

 

 

 소문국의 서쪽 산줄기

 

 

 금성산 가는 길에 바라 본 금성산